소설리스트

Yes or Yes (256/304)

Yes or Yes

수안은 고려 호텔 최상층 로열 스위트룸 소파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도시의 빛나는 네온사인과 빌딩의 조명이 빛나는 가운데 눈발이 날리는 중이다.

“우리 시원이 보러 가야 하는데…. 차 막히겠네.”

아버지는 셋째에게 시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고, 아내는 그 이름을 무척 만족해했다. 일주일 전에 셋째를 출산한 아내는 지금 처가댁에서 산후조리 중이었다.

요즘 일을 끝내고 바로 집으로 들어가던 수안이 호텔에 들어와 앉아 있는 이유는 만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장님. 밖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비서가 안에서 문을 열었고 발소리까지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이진태였다.

바짝 긴장한 얼굴의 진태는 수안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진태입니다.”

“앉아요.”

“예.”

수안은 비서가 자리를 나간 다음 호박색 위스키를 크리스털 잔에 담아 진태에게 넘겨줬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위스키를 조금 따라 살짝 입을 축였다.

진태는 술을 마셔도 되나 싶어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편하게 마셔요. 긴장하지 말라고 줬으니까.”

“예. 회장님.”

진태는 크리스털 잔에 입을 가져가긴 했지만, 술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수안은 진태의 굳은 얼굴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수안은 일부러 말을 편하게 하며 상대를 편하게 대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내가 잡아먹나?”

“하하. 카메라 앞에 설 때보다 더 떨립니다.”

“우리 가족이 될 사이 아닌가? 남이라고 생각해?”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내가 먼저 말 편하게 했으니까 밖에선 편하게 하자고. 우리 72년생 동갑이야.”

“…예.”

아무리 동갑이라도 상준과 만났을 때처럼 편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본인이 만나고 있는 여자의 오빠였고, 대기업 회장인 수안이다.

“정 힘들면 말은 천천히 놓기로 하고.”

얼른 아기를 보러 갈 생각밖에 없었던 수안은 본론을 꺼냈다.

“날짜는 언제 잡을 건데?”

주어를 빼고 던지는 말이었지만, 진태도 대충 알아들었다.

“결혼식 말입니까?”

아직 둘은 집에 인사하러 오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날짜를 언제 잡냐는 물음은 곧 결혼이 당연하다는 말과 같았다.

“약혼식부터 해야지. 조촐하게 양가 가족들만 모여서. 결혼식 날짜도 그때 잡아야 할 것이고.”

“먼저 댁에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조만간에 갈 생각이었습니다.”

다행인 점은 진태도 수현에게 생각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결혼도 하고 싶고 수현도 무척 마음에 들지만, 그녀의 오빠인 수안은 알려진 것과 너무 달랐다. 항상 두렵고 겁나는 존재였다.

“부모님이 진태 씨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계셔. 괜히 주눅 들지 말고 와. 집엔 진태 씨를 반기는 사람들밖에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할 일은 아니지. 진태 씨가 선한 사람이고 그동안 수현이와 잘 만나왔으니 성사된 일이야.”

“수현 씨는 요즘 보기 드문 여성입니다. 앞으로도 잘하겠습니다.”

잘해야 했다. 절대 잘리고 싶지 않았다.

‘싹둑…. 잘리고 싶지 않아.’

“그리고 결혼식은 공개 결혼식으로 진행해야 할 거야. 장소는 컨벤션센터 아무 데나 잡고.”

“…비공개가 아니라 공개요?”

당연히 비공개로 할 줄 알았다. 또한 결혼식 장소는 화려한 호텔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정치 일선에 계시는 아버지께 여전히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묻어 있어서 그래. 자식 결혼을 호텔에서 비공개로 진행하면 재벌 이미지만 덧칠하는 꼴이거든. 간소하고 소탈하게 공개 결혼식으로 진행될 거야. 결혼식이 화려하지 않아도 그러려니 해. 대신 약혼식은 성대하게 하자고.”

수안은 진태의 대답이 필요 없다는 듯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다음 주 수요일에 일정 있나?”

“없습니다.”

있어도 없어야 했다.

‘인터뷰 일정을 바꿔야겠네.’

“같이 한국대학교 특별 강연이나 가지. 클린턴이 온다고 했거든.”

“…….”

미국의 전 대통령을 친구 부르듯이 입에 담는 수안이다. 순간 클린턴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지만, 겨우 기억해 냈다.

“아. 클린턴!”

“대통령과 정치인도 상당수 올 거야. 아버지도 오실 거고.”

“예. 가겠습니다.”

“수현이도 불러서 진태 씨 옆자리에 앉혀 놓을게. 미리 둘이 같이 있는 사진을 미리 언론에 뿌려야 대중에게 갑작스러운 소식으로 들리지 않을 테니까.”

“…예.”

“끝까지 감추고 나중에 깜짝 이벤트로 알릴 생각이라면 말리지 않을게. 나중에 욕먹을까 봐 얘기한 거야.”

“아닙니다. 따르겠습니다. 차라리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욕 안 먹게 기자들에게 잘 쓰라고 전해 두지. 나중에 결혼 기사가 나와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을 거야. 아! 그리고 기획사도 걱정하지 마. 우리 쪽에서 알아서 연락할 테니까. 진태 씨 소속 회사가 전속 계약 위반이네 뭐네, 따질 정도로 간이 크진 않겠지.”

“…감사합니다.”

진태는 새삼 강운 그룹과 강수안 회장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자 할 얘긴 다 했고, 내게 할 얘기 없나? 부탁이든 뭐든.”

무얼 말해도 들어줄 수 있다는 투였다.

“궁금한 게 하나 있긴 했습니다.”

“오. 뭔데?”

“혹시…. 해외에 PMC를 갖고 계십니까?”

아무래도 이 부분이 믿기지 않았던 진태였다. 경호 실장에게 듣기도 했고, 상준에게 전해 듣기도 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듣기 전엔 확신할 수 없었다. 본래 진짜 자를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질문을 할 수 없어 다른 질문을 던진 것이다.

“…누구에게 그 말을 들었지?”

수안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겨, 경호 실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있을지도 모른다고만 하셨습니다. 제가 밀리터리에 관심이 많아서 혹시나 하고 여쭤봤을 뿐입니다. 곤란한 내용이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호 실장이라면 최장호였다. 최 실장의 입에서 나왔다는 말에 수안은 얼른 표정을 풀고 말했다.

“최 실장도 하여튼. 뭐 하러 쓸데없는 소릴 하고 그래?”

“…….”

“이제 진태 씨도 매제가 될 테니 알려 줘도 상관없겠지.”

꿀꺽. 절로 긴장되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말하는 뉘앙스로 짐작했을 때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아냐.”

“아….”

“PMC 해체하고 보안 요원으로 일 시키고 있으니까. 뭐 필요하면 다시 설립할 수 있겠지. 아닌가? 보안 요원들을 여전히 PMC로 생각해야 하려나? 어차피 총 들고 다니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미국에서 활동하는 애들이니 총은 당연히 들어야겠지.”

‘진짜 있구나.’

경호실장에게 들었던 말과 상준에게 들었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갑자기 해체한 이유라도….”

“3년 전 미국에서 항공기 테러를 저지하면서 PMC 대원들이 일부 죽고 다쳤거든.”

“……!!”

“대원들은 훈장도 여럿 받았지. 덕분에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네. 부시 그 새끼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열불이 나. 테러를 막아 줬으면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라는데 BE 지분이나 팔아먹고 말이야. 그래도 부시 덕분에 미국 정부 지분율이 낮아져서 나쁘진 않았지만….”

“부, 부시….”

“클린턴이나 부시나 어차피 한 나라의 대통령이야. 정치인이라는 점에선 한국 대통령이나 미국 대통령이나 거기서 거기지.”

“정치인이긴 하네요.”

세계 최강대국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점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다음 주에 클린턴 만날 때도 너무 긴장하지 마. 그 사람은 나름대로 마무리가 좋았으니까.”

“예. 청심환이라도 먹고 가겠습니다.”

“오늘 나보고 긴장하는 거 보니까 먹긴 먹어야겠다.”

수안과 대화하며 조금씩 긴장을 풀어가던 진태는 원래 하려던 말을 이제야 떠올렸다.

“아! 회장님 득남 축하드립니다. 처음 뵙자마자 축하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제가 깜박했습니다.”

“흐흐. 첫째도 아니고 셋째인데 뭘. 그러고 보니 우리 매제 나이가 나랑 동갑인데 서둘러야겠어?”

“아하하….”

“그렇다고 애부터 덜컥 갖으라는 말은 아니야. 요즘은 배불러서 식장에 들어가도 그리 흉은 아니라지만, 매제 이미지를 생각하면 조심하는 편이 좋겠지.”

‘결혼하기도 전에 애부터 가졌다가는….’

수안의 말대로 남자 탤런트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이다. 결혼으로 인한 팬들의 실망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재벌가 딸을 임신시켜 결혼에 성공했다는 괴담이 돌면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강운 그룹에서 달가워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없기는 개뿔. 조심 또 조심하라고. 매제 이미지만이 아니라 강운 그룹에도 좋지 않은 일이니까.”

지은 죄(?)가 있으니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예, 예. 조심하겠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다음에 젊은 사람들끼리 한번 뭉치자. 다들 나이대가 비슷해서 말이 잘 통하겠어.”

“일전에 수현 씨와 수진 씨 집에 다녀왔습니다. 상준 형님도 만났습니다.”

“오. 벌써? 이제 수용이만 만나면 되겠네. 일정은 내가 잡아서 전달하는 편이 좋겠지? 비서실에 연락해서 서로 일정을 맞춰 보라고 할게.”

“예. 회장님.”

“나도 형님이라고 부르지? 언제까지 회장님이래?”

“…예. 형님.”

“이봐 얼마나 듣기 좋아. 하하하.”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불편하기만 했다.

* * *

수안은 진태를 보내고 자신도 얼른 차로 향했다.

“한남동 집으로 가겠습니다.”

“막히겠지?”

“아무래도 눈이 쌓여서 좀 막힐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눈길이니까 운전 조심해.”

“예. 회장님.”

수안은 차 안에서 지난 카드 대란으로 개편된 카드사 현황 자료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분명 한 시간 이상의 퇴근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크게 변화는 없군.’

카드 대란을 예측했던 수안은 정부의 소비 활성화 정책에도 무분별하게 카드를 발급하지 않았다. 덕분에 다른 카드사가 부실 채권을 처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에도 견실한 성장을 거듭해 왔다. 게다가 지금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아 신용 불량자라는 단어가 사람들 인식에 자리잡고 있었고, 실제 수백만의 신용 불량자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특히 소득이 없는 대학생들에게까지 카드 발급을 독려했던 대부분의 카드사 중에 외환 카드는 매각 절차를 밟았다. 외환 카드가 매각되었다 하기보다는 모회사 외환 은행이 매각되었다고 해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카드사 부실이 촉매가 되어 외환 은행까지 매각 절차를 밟게 된 사건이다.

‘론스타.’

수안은 사모 펀드의 먹튀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론스타 이 새끼들 덕분에 인수하느라 애 좀 먹었지.’

작년에 외환 은행을 인수한 곳은 사모 펀드 론스타가 아니었다.

BE가 지분을 확보한 미국의 은행 모건 스탠리였다.

‘돈 받아 처먹고 부실을 부풀려? 그게 통하겠어?’

외환 은행은 상당한 수익을 내는 금융사였다. 아무리 부실하다고 소문을 내도 수안에게 통할 리 없었다. 거액의 부실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보고서를 넘기던 수안은 2002년 동양 카드를 인수해 카드 사업을 시작한 샤롯 그룹의 샤롯 카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인수한 카드사라 아직 규모는 작았다.

‘그보단 샤롯 카드를 무너트려야 하는데 말이야….’

수안이 보고서에 푹 빠져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우웅. 우웅.

“응? 여보세요?”

-오빠!

동생 수현의 목소리였다.

“수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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