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둑싹둑?
오늘은 수현이 애인과 함께 집에 온다고 한 날이다.
“오늘 처제가 애인하고 같이 온다고?”
“응. 저녁은 먹고 온다고 했어. 잠깐 얼굴만 보러 들르는 거야.”
“처제 애인은 어느 집 아들이야?”
아직 수현의 애인이 누구인지 듣지 못한 상준이다. 그래도 자신이 이름만 들어도 알 집안의 자식일 것은 분명했기에 어느 집 아들인지를 묻는 것이다.
“보면 바로 알아.”
“오! 내가 아는 집안인가 보네?”
“큭.”
‘그건 아니지만….’
남편이 여동생 애인의 얼굴을 보면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은 다 어디 가셨어? 왜 집 안이 휑해?”
“괜히 밖에 소문나면 그래서 일찍 들어가고 내일 오라고 했어.”
“잘했네. 결혼 전에 소문은 좀 그렇지.”
띵동.
“왔나 보다. 내가 문 열어 줄게.”
수진이 얼른 거실로 달려가 인터폰을 받고 문을 열어 줬다.
“들어와. 수현아.”
-응. 형부 있지?
“물론!”
수현과 진태가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동안 상준은 차를 내리러 주방으로 갔다.
“상준 씨. 얼른 와.”
“먼저 얘기하고 있어.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만 부어 놓고 나갈게.”
그사이 수현이 진태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언니. 나 왔어.”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습니다. 이진태입니다.”
“……!!”
수진은 세상 충격적인 걸 봤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태의 얼굴에 눈을 고정했다. 뻔히 이진태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이 모양이다.
“봐. 내가 저런 표정으로 볼 줄 알았다니까.”
“아하하.”
“처제 왔….”
차를 내리다 나온 상준도 이진태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
“형부. 오랜만!”
“안녕하십니까. 이진태입니다.”
“헐.”
“형부 인사 안 받아요?”
“아, 아. 반갑습니다. 진태 씨. 우리 집에서 진태 씨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래서 내가 알아본다고 했구나.’
그래도 남자라 적응이 빠르다.
“형부. 언니 좀 어떻게 해 봐요.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아까부터 인사도 안 받고 저러고 있잖아요.”
멍하니 진태의 얼굴만 보는 아내의 모습에도 상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보. 하린 엄마. 수진 씨?”
“어, 어. 어?”
“처제가 인사시켜준다고 데려왔잖아. 진태 씨 인사 안 받아?”
“아,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이진태입니다.”
“미쳤다. 어떻게 저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다 들어가지?”
수현이 진태를 만나고 처음 했던 말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옴마! 내가 지금 입 밖으로 내뱉었나요?”
“자매가 괜히 자매가 아니네요. 하하하.”
.
.
.
자리에 앉아서도 진태와 대화하기보단 남편과 주로 대화하는 수진이다.
“예전에 올케언니 처음 봤을 때랑 비슷해. 그냥 외계인하고 만나는 느낌?”
“외계인까지는 아니고 그냥 인종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아?”
“그러게.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수진은 진태의 얼굴을 보다가 남편을 보고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어휴. 깜짝이야. 여기 큰 바위 얼굴이…. 눈은 어디 숨었니? 코는 왜 이렇게 낮아? 입술은 해삼 같아.”
“…지금 나보고 한 소리야? 언제는 나보고 잘생겼다며?”
수현은 수진과 형부의 만담에 팔짱을 끼고 말했다.
“지금 진태 씨 앞에 앉혀 두고 둘이 뭐 해?”
“처제. 우리끼리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이야.”
“맞아. 적응이 필요해.”
수현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나도 적응하는데, 시간 좀 걸렸지. 이 남자 얼굴은 적응 기간이 필요하긴 해.”
“자기야.”
자신의 애인까지 이 대화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부른 것이다.
팔꿈치로 수현의 팔을 살짝 밀치면서 말했는데 반응은 앞에서 나왔다.
“와. 당신 들었어? 처제를 “자기야”라고 불렀어.”
“뭔가 괴상한 소리를 들은 기분이네.”
“그런데 둘이 자꾸 이럴 거야? 앙?”
“푸흐흐. 처제 화났다. 이제 그만하자 여보.”
“당신은 진태 씨랑 잠깐 얘기 좀 하고 난 수현이랑 얘기 좀 하고. 오케이?”
서로 오가는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상준이 벌떡 일어났다.
아내의 뜻이라면 바로 움직이는 남편이었다.
“콜. 진태 씨는 나랑 잠깐 정원에 나가 볼래요? 자매끼리 얘기할 일이 있나 보네요.”
“아. 예.”
진태가 상준과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이유를 묻는 수현이다.
“뭐야. 무슨 소릴 하려고?”
“…진짜 결혼하려고?”
“그럼?”
“넌 걱정도 안 되냐? 나 같으면 밖에 내보내지도 못하겠다.”
실물을 확인하고 나니 생각보다 더 심각한 현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맨날 데리고 다녀? 그리고 저 사람이 나 놔두고 딴 년을 만나지? 그럼 나도 빠이빠이 하면 돼. 내가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질까 봐 걱정이야? 나 강운 그룹 강수현이야. 이거 왜 이러셔!”
“아무리 그래봤자 야. 난 오늘 진태 씨를 보니까 네 걱정만 되네.”
수현은 오랜만에 언니다운 말을 하는 수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언니. 내가 진태 씨한테 들었는데 말이야….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더라고.”
“왜?”
“언니가 밖에 나가서 진태 씨를 만났다고 생각해 봐. 말 걸 수 있겠어?”
“…못 건다. 저 얼굴을 가진 사람한테 무슨 용기로 대시하니?”
“정답. 함부로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던데? 극성팬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물이 너무 맑아서 물고기가 못 살아? 말 되네.”
“본인도 쉽게 마음을 못 여는 타입이라고 하더라고.”
“오오~. 더 얘기해 봐.”
.
.
.
밖에서도 비슷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어휴. 춥다. 둘이 안에서 긴히 할 얘기가 있나 봐요. 조금만 있다가 얼른 들어갑시다.”
“제가 상준 형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에이. 진태 씨랑 나랑 동갑 아닌가? 우리끼리는 편하게 합시다. 호칭은 나중에 어른들 앞에서나 쓰고.”
“그럴까?”
“오. 편하게 대하니까 좋네. 하하하.”
상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진짜 처제랑 결혼할 생각?”
“그렇지. 그러니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어?”
“…난 걱정이 좀 되는데.”
“뭐가?”
“강운 그룹 만만하지 않아.”
“…그건 나도 알지.”
지난번 경호 실장의 경고가 아직도 진태의 뇌리에 선명하다.
“중간에 포기할 것 같으면 얼른 결정해 주는 편이 처제한테도 좋겠다 싶어서 그래. 진태 씨는 평소에 가만있어도 여자들이 알아서 달라붙지 않나?”
“…생겨도 적당히 생겼어야 달라붙지. 나 정도 생기면 여자들이 겁나서 말도 못 붙여.”
상준은 잠시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태를 보다가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하긴. 내가 여자라도 진태 씨한테는 말 못 붙이겠다. 그런데 여배우는 자주 만나지 않아? 탤런트들은 서로 자주 만나고 그럴 테니까.”
“가끔 같이 작품 하는 여배우들? 걔들은 같은 배우는 취급도 안 해. 어떻게든 사업가 만나서 팔자 고쳐 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녀. 이미 강운 그룹에서 성공 사례를 봤으니 더하지. 그리고 대부분 여배우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거치고 그 자리를 유지하는 애들이야. 더러운 세상에 물들대로 물들어서 내가 싫어.”
강운 그룹의 사례란 임아현과 윤혜린을 이르는 말이다. 윤혜린은 범 강운 그룹으로 알려진 뉴월드 그룹 장자와 결혼했고, 임아현은 재계 1순위에 빛나는 강운 그룹 맏며느리로 받아들여졌으면서도 연예계 활동까지 병행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강수안. 운동선수 출신이라 뛰어난 체력(?)을 기대할 수 있었고, 자상하고 아내와 아이들만 생각하는 가정적인 남자라는 소문까지 있었다.
여기에 강운 그룹의 장자로 이미 회장에 올라섰고, 해외엔 BE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여배우들이 꿈에 그리는 이상향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연예계에 제2의 임아현, 윤혜린이 되기 위해 재벌가를 기웃거리는 여배우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상태였다.
“여자 탤런트가 다 그래?”
“물론 다 그렇진 않지. 개중에 몇은 정신이 똑바로 박힌 배우들도 있어. 그런데 그런 여자 탤런트들은 인물을 안 보네? 다들 잘도 짝을 찾아서 결혼해. 그렇다고 내가 이제 막 데뷔한 어린 여자를 만날까? 세대 차이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을 어린 여자애들을? 난 수현이 정도 나이가 딱 맞아. 소탈한 성격에 신경질적인 모습도 없어. 사회 생활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사람 대할 줄도 알더라니까? 게다가 수현이 정도면 연예인급 미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 쉽게 만나기 힘든 여자야. 이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내게 결혼할 기회가 올까 싶어.”
“흠. 처제가 좀 예쁘긴 하지. 제 언니랑 많이 달라.”
아내가 들었으면 큰일 날 소리였지만, 밖이라 마음 놓고 내뱉을 수 있었다.
“훗. 그리고 내가 수현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어.”
“국내 최고 배우가 돈이 없진 않을 것이고….”
“당연히 돈은 아니지. 설마 내가 팔자 고치자고 수현이를 만날까. 지금 당장 일 그만둬도 늙어 죽을 때까지 돈 떨어질 일은 없는데.”
진태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다음 말했다.
“수현이 마음에 상처 주면 강 회장님한테 죽을지도 몰라. 무조건 결혼하라셔. 아니면 여기 잘릴 각오 하라고 하시더라.”
상준은 진태가 가리키는 중심부를 잠시 딱하게 쳐다본 다음 말했다.
“…결혼 축하해. 먼저 장인어른 댁에 인사드리러 가야겠네.”
“…….”
재빠른 태세 전환에 진태는 배신자를 보듯이 상준을 흘겨봤다.
그래도 상준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형님이 그렇게 얘기했으면 답 없어.”
“물론 결혼이야 나도 할 생각인데…. 회장님이 짓궂은 농담을 하신 건 아닐까?”
“거기 자르는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형님이 어떤 분인데….”
“아는 일화라도 있어? 아니면 실제로 겪은 일이라도 있어?”
상준도 진태와 마찬가지로 주변을 돌아본 다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강운 그룹 총수 일가에 청부 살인 의뢰가 있었어.”
“뭐? 그런 일이 있었어? 난 금시초문인데?”
“설마 이런 일이 뉴스에 나가도록 두겠어? 나도 미국으로 신혼여행 가서 퇴역 군인처럼 보이는 BE 소속 직원에게 처음 들었지. 그 사람 팔뚝이 내 허리통만 하더라. 진짜 퇴역군인이었고, 또 PMC 출신이라고 들었어. 아마 몰래 운용하는 군사 조직이 있을지도 몰라.”
‘PMC도 거짓이 아니었어?’
최장호 실장에게 PMC 얘길 들었을 때 과장이 섞여 있지 않나 의심했었다. 국내에서 누가 PMC를 보유한단 말인가. 총기도 불법인 나라에서 사설 용병은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 말도 사실이었나?’
최장호 실장의 말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
[대한민국을 벗어난다고 진태 씨가 살 수 있을까요? 저는 힘들다고 봅니다.]
“그리고…. 청부 살인을 지시했던 사람이 둘이었다고 들었는데, 전부 죽었어. 누구도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고 했지. 으으. 그 얘기 하는데 나는 한마디도 못 하고 듣기만 했어. 사람 죽는 게 어디 보통 일이야?”
“딸꾹.”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겁니다. 그땐 죽여 달라고 빌어도 절대 죽이지 않으실 겁니다.]
“당일 밤 아내가 형님께 전화해서 고맙다고 하더라. 모르는 사이에 가족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내가 아내 통화를 엿들은 건 아내도 몰라. 그 이후로 나도 아내 비위 맞추며 살고 있지. 마누라에게 잘못했다간 형님이 어떻게 돌변할지 나도 모르니까.”
“딸꾹.”
[좋게 만나면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우리 잘하자. 진태야.”
“딸꾹. 어, 어. 당연하지!”
“춥지? 이제 들어갈까? 동지?”
“어. 딸꾹. 그래. 동지.”
“이제 혼자가 아니라 마음이 든든하네. 하하하. 얼른 들어가서 뜨끈한 차라도 마시자.”
동질감을 느낄 만한 상대였다.
그래도 상준은 자신의 처지가 조금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난 거시기 잘린다는 말은 안 들었어.’
자신은 알아서 조심하고 있을 뿐이지만, 진태는 직접 경고까지 들었다 하지 않는가.
“싹둑?”
“억!! 깜짝 놀랐잖아!”
“헤헤. 뭘 놀라고 그래? 싹둑싹둑?”
진태는 이빨을 꽉 깨물고 말했다.
“흐지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