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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란 (254/304)

결혼이란

수현은 오랜만에 언니 수진의 집에 찾아갔다.

“넌 언니 보러 올 시간도 없니? 내가 언제 오라고 했는데 이제 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어쩔 수 없었어.”

연애하면서 사업까지 하려니 얼마나 바쁘겠는가. 지방에 오가며 새로운 숍 오픈을 직접 관리했지만, 요즘은 회사 담당 직원에게 관련 업무를 인계하는 중이었다. 사실 이제 그럴 때도 됐다. 언제까지 대표가 직접 나설 수 있겠는가.

그래도 대표가 할 일은 많았다. 새롭게 개발한 메뉴를 검토하고 해외 원두를 수급하는 일에도 나서야 했다. 회사의 각 부처 보고를 받고 결재하는 업무도 날마다 발생하기에 연애에 시간을 내려면 회사 업무부터 끝내야 했다.

그 와중에 언니가 보러 오라고 했다고 달려갈 시간을 내긴 어려웠다. 오늘은 마침 진태가 일정이 생겨 여유가 있었기에 보러올 수 있었다.

“네가 이제야 오는 바람에 다 틀어졌어. 그날 남편한테 하린이 맡기고 너 만나서 좀 쉴까 했는데….”

“그래서 내가 선물 사 왔어. 미안해서.”

쇼핑백에는 조카 하린이가 계절별로 입을 내복과 외출복이 가득했다.

“아휴. 꼼꼼하게도 챙겨왔네.”

“언니는 결혼하니까 뭐가 좋아? 결혼하면 세상이 만사 걱정이 덜어지고 마음이 푸근해지나? 둘이 결혼했으니까 서로를 의심할 일도 없겠지?”

“갑자기 결혼은 왜? 너 누구 만나?”

누굴 만나지 않고서야 물어보지 않을 질문이었다.

“…응.”

“뭐?! 설마 오빠 몰래?”

혹시 동생이 몰래 연애를 즐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한 수진이다.

“아니. 나도 언니처럼 선봤어. 내가 연애할 시간이 있었겠어?”

수진은 예쁜 자신의 동생도 결국 선을 보고 결혼할 상대를 찾았다는 말에 동질감이 들었다.

“푸흐흐. 결국 너도 오빠 손에서 못 벗어나는구나. 잘했다. 우리 수현이.”

“벗어날 방법이 없었어. 그 사람을 데려왔으면 끝장을 보자는 거지.”

“오빠가 누굴 데려와서 그런 소리를 해?”

“…….”

수현은 언니 수진에게 괜히 자랑하는 기분이라 순간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진태.”

“야. 이름만 말하면 내가 아니? 이진태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우리나라에 한둘….”

하지만 이름만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이진태? 설마 그 이진태? 인기 배우 이진태?”

“응. 그 이진태 맞아.”

“어머! 어머! 어머. 얘가 미쳤어! 미쳤어! 오빠가 미쳤다고 그 사람을 소개해 줬겠니? 중간에 맞선남이 바뀐 게 틀림없어!”

배우 이진태가 맞선으로 만날 수 있는 상대던가. 평범한(?) 재벌가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오빠 강수안과 아버지가 허락할 상대가 아니었다.

“…아빠도 알고 오빠도 알아. 둘이서 합의한 다음에야 진태 씨를 내 앞에 데려왔어.”

“정말? 아빠랑 오빠가 이진태를 네 앞에 데려왔다고? 너 맞선 보라고 이진태를?”

무엇보다 오빠가 허락했다는 점이 믿기지 않는다.

“그 사람도 최근에 결혼할 생각이 있었다나 봐. 그래서 한번 나와 봤다고 하네?”

“…와아. 와아.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네. 이진태가 내 동생을 만나고 있다고?”

“언니는 주변에 아직 말조심해 줘. 진태 씨 스캔들 터지면 이미지에 타격이 있어서 곤란하거든.”

“나도 맞선 볼 때 튕겨 볼걸. 그러면 네 형부 말고 연예인 데려오지 않았겠어?”

“나도 내가 맞선 몇 번 펑크 냈다고 연예인까지 데려올 줄은 몰랐지.”

“흐흐. 그래서 진태 씨는 그리 잘생겼어? 소문대로 국내 최고 미남이야?”

“언니가 TV로 봐 온 진태 씨 얼굴은 전부 거짓말이야.”

“어머! 다 화면발로 잘 나왔던 거야? 아니면 화장발인가?”

“아니. 실물은 화면에 반도 안 담겨. 농담 아니고 진심.”

“에이~ 설마. 화면에 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나오는데 그게 말이 되니?”

“조만간 언니 집으로 같이 쳐들어올 생각임. 그때 직접 봐.”

“언제 데려올 건데? 네가 이진태 데려오면 나 밖에 못 나가도 안 서운하다.”

“진태 씨 일정 확인해서 최대한 빨리 데려올게.”

“잠깐! 그런데 너 언니한테 방금 결혼 물어봤잖아. 그 사람이랑 결혼하려고?”

“…뭐. 조금 생각해 보는 중? 결혼이 소문대로 재미있는지 확인해 보고 나서 결정해 보려고.”

“아서라. 겨우 그 정도 마음가짐으로 결혼해? 얘가 아직 뭘 몰라.”

수진은 이미 결혼에 통달했다는 듯이 말했다. 겨우 한 살 차이의 자매였다.

“왜? 결혼하면 뭐가 달라? 오빠랑 올케언니도 잘살고 있고, 언니도 형부랑 잘 살잖아.”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 열심히 발을 놀리고 있으니까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결혼 생활도 그래. 네가 겉에서 보면 모르지만, 오빠가 얼마나 올케언니 비위 맞춰 주는지 알아? 네 형부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연예인을 데려와 봐라. 네 형부만큼 나한테 잘해 주는 사람 없을걸?”

“나도 진태 씨가 잘해 주거든? 세상에 나만 있는 것처럼 아껴준다고.”

“부부는 한쪽만 잘해 준다고 끝이 아닙니다요. 올케언니는 언니대로 오빠와 애들에게 지극정성이야. 그리고 나? 나도 당연히 우리 남편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챙겨 주고,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며 밤에 잠도 못 자고 돌보는 거야.”

“언니가?”

“결혼은 그래. 서로서로 위해 주고 희생하면서도 즐거워야 한다니까? 지금 너 보면 그냥 결혼만으로 사람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거로 착각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언니 결혼하더니 뭔가 달라졌네? 갑자기 으른이라도 됐냐?”

“애 낳으니까 자꾸 생각이 많아져서 그래. 매일 잠도 부족하고, 밖에 못 나가 답답하고, 애 아빠한테 짜증도 잔뜩 부려보고…. 그러다 산후 우울증도 살짝 오더라?”

“어머. 그랬어? 내가 빨리 왔어야 하는데….”

사업과 연애에 바빠 언니를 보러오지 못한 것이 더 미안해진 수현이다.

“그래도 기댈 건 가족밖에 없더라. 남편이 얼마나 날 생각해 주는지 몰라. 덕분에 우울증이 좀 가셨어. 출산 초기보다는 요즘에서야 애 키우는 맛이 나. 하린이가 엄마 보고 방긋방긋 웃으면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몰라. 남편도 집에 오자마자 돕겠다고 난리야. 솔직히 나도 결혼 전엔 몰랐지. 솔직히 애 낳기 전에도 몰랐어.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실제로 경험해 봐야 아는 것 같아.”

“경험하기 전엔 모른다 그 말이네?”

“응. 하지만 결혼이 생각만큼 판타지가 아니라는 건 확실해. 내가 또 몇 년 뒤에 이럴지도 몰라. “애 셋은 낳아봐야 아는 거야. 하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땐 내가 뭣도 모를 때 한 말이지. 결혼이 장난이니? 다 때려치워. 혼자 살아! 그게 제일 속 편한 거야!” 크크. 이러고도 남지 않겠냐?”

“흐음…. 언니랑 얘기했더니 괜히 걱정만 늘어. 언니는 이제 동네 아줌마가 다 됐네.”

“뭐.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네가 결정해야지. 난 하린이 걸음마 떼면 사람 써서 맡기고 바로 복귀해서 일 시작할 거야. 강운 패션이 날 기다리는데 집에서 애만 보는 것도 좀이 쑤셔.”

“아예 포기한 거 아니었구나?”

“미쳤니? 내가 강운 패션에서 벌인 사업이 얼마나 많은데 포기해? 그리고 그동안 내가 괜히 미국까지 가서 코피 터지라고 공부했니? 그걸 다 포기하고 엄마만 하라고? 내 인생이 아까워서라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

애 낳고는 쉬고 있지만, 패션 사업에 관한 열정은 그대로였다.

“큭. 그럼 하린이만 낳고 더 안 낳으려고? 일하려면 애 낳기 쉽지 않잖아.”

“힘닿는 대로 더 낳아야지. 어차피 강운 패션 내 거야. 어디 도망 안 가.”

예전에 발행했던 전환 사채를 전환하며 본사 주요 지분을 취득했고, 이후 강운 패션 지분과 맞교환을 진행해 상당한 강운 패션 지분을 취득한 상태였다. 수안이 줬던 현금까지 일부 사용해 지분을 매집한 지금은 수진이 강운 패션을 “내 것”이라 표현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였다. 지금도 뉴월드 강지수 고모처럼 계열 분리가 가능하지만, 계열 분리는 폭망의 지름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빠가 있는 한 언제까지고 강운 그룹에 붙어 있어야 했다.

“나도 강운 패션은 안 건드리니까 걱정하지 마셔.”

“나도 뉴월드 호텔엔 얼씬도 안 할 생각임.”

수현도 수진과 마찬가지였다. 상당한 뉴월드 호텔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휴직계를 내도 복귀를 걱정하진 않고 있었다.

“하하하. 어쨌든 조금은 의문이 풀렸어.”

“결혼은 하든지 말든지 간에 이진태는 꼭 데려와야 한다. 알았지?”

“언니는 내 결혼보다 진태 씨 보는 게 중요하냐?”

“네 평생에 결혼은 몇 번이나 할 수 있지만, 이진태를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어휴. 이젠 아주 악담을 하셔!”

“꼭 네 형부도 있을 때 데려와라. 우리 남편 얼마나 못생겨지나 구경 좀 하게. 푸흐흐흐. 진짜 오징어처럼 보이려나?”

“우리 오빠도 진태 씨 옆에 있으면 오징어야. 형부는 볼만할걸? 말미잘이나 아메바 수준까지 떨어질지도?”

“푸크킄. 그거 기대된다. 야.”

“진태 씨 오는 날엔 일하는 아주머니들도 쉬라고 해. 그래야 소문이 안 퍼지지.”

“그럼 집안일은 어떻게 해? 또 애는? 하린이 목욕도 시켜 줘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매일 아줌마들이 집안일하고 애도 봐주잖아? 언니가 힘들긴 뭐가 힘들어? 맨날 집에서 애만 봤다는 말도 다 거짓부렁이지?”

“에헷. 그래도 예전처럼 막 나돌아다니진 못하잖아.”

수안이 마련해 준 집은 넓은 잔디 정원이 있는 3층 집이다. 집에는 집안일을 맡아서 해 주는 아주머니들도 여럿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기본생활부터 큰 차이가 있었다.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다. 강운 그룹 총수의 첫째 딸과 금강 그룹 장남의 결혼이니 물질적으로 부족할 일도 없었다. 결혼 생활에서 물질적인 부분이 충족되면 부부 싸움의 원인이 있을 수가 없다.

“으이그. 어쨌든 진태 씨는 기대해도 좋아.”

“오기 전에 꼭 미리 얘기해. 그래야 상준 씨한테 빨리 들어오라고 하지.”

“알았어. 아. 형부는 회사에서 어떻대?”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는데 뭐 다르겠니? 우리가 강운 그룹 계열사에서 일하는 거나 같지.”

상준은 여전히 집안 기업인 금강 건설에서 일한다. 조만간 이사로 승진한다는 말도 들었다. 서른셋의 나이에 이사가 될 수 있는 것도 결국 재벌가 아들이라 가능한 일이다. 일개 사원이라면 감히 꿈도 꿀 수 없을 승진 속도였다.

그래도 수안에 비하면 양반이라 할 것이다. 수안은 서른셋에 무려 그룹 회장으로 올라섰으니 비교하기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중에 진태 씨는 뭐 하지?”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많은 돈을 벌고 있다지만, 강운 그룹의 다른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진 게 부족한 사람이었다.

“너 벌써 거기까지 생각해? 뭐가 걱정이야. 호텔 로비에서 얼굴만 보여 줘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올 텐데.”

“큭.”

“아니면 오빠한테 얘기해서 뭐라도 챙겨 달라고 하든가.”

오빠 수안에게 부탁하면 뭐라도 챙겨 주지 않겠는가.

“됐어. 오빠한테 뭐 하러 부탁해? 오빠한테 더 손 벌리면 염치없지 않아? 지금까지 받은 것도 과해.”

동생들 챙긴다며 아버지께 전환 사채를 허락받았고, 이후엔 용돈이라며 10억 달러를 안겨 준 오빠였다. 이후에도 뭐라도 더 챙겨 주고 싶어서 시시때때로 연락하는 오빠라서 그런지 또 손을 벌린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도 이제 내 사업을 하잖아. 연예인 일 그만둔다고 하면 커피 사업이라도 맡기지 뭐.”

“오오. 커피 프랜차이즈 잘나가?”

“벌써 전국에 250호점 돌파했지. 5년 내로 1,000호점까지 만들 예정.”

“네 커피숍 모델을 누구로 할지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얘.”

“그건 진태 씨 얘기도 들어 봐야 아는 거고.”

애인 얘기를 끝낸 수현은 언니 옆에서 잠든 조카를 보며 말했다.

“우리 하린이는 잘도 자네. 성격 순하지? 형부를 닮았을 거야.”

“맞아. 제 아빠 닮아서 순해.”

하린이는 둘이 얘기하는 중에도 곤히 잠에 빠져 있었다.

“하린이가 언니 닮았으면 맨날 자지러지게 울었을 텐데.”

“뭐? 너는 다른 줄 아냐? 엄마가 너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고 했어.”

“푸흐흐. 수용이도 엄마 힘들게 했다고 그랬지. 오빠만 별종이야.”

“다음엔 오빠 닮은 아들 낳았으면 좋겠다. 오빠만 닮으면 또 딸이어도 좋고.”

“엄마랑 아빠가 얘기 안 해? 두 분도 오빠는 대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수진도 들었던 바다. 그래도 수진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우리 유전자 어딘가에 오빠의 유전자가 숨어 있을 거야. 그걸 찾아내야지.”

“큭큭. 확률이 너무 극악하지 않나? 한 10명은 낳아 봐야….”

자매의 일상 대화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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