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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씨들 (248/304)

호박씨들

“나이 찼는데 결혼 안 하는 것도 불효잖냐. 요즘 만나는 여자가 있는데 빨리 결혼해서 손주 안겨 드리고 싶다. 게다가 내가 첫째이니 더 서둘러야지.”

박수겸 사장의 말을 듣고 더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한 창수다. 한참이나 사람 구실을 못 한 것도 죄스러운데, 아버지 나이가 칠순을 바라보고 있는데 둘이나 있는 아들은 전부 노총각 신세였다. 결혼이야말로 진정한 효도 아니겠는가.

“이야. 축하해 형. 언제 장가가나 했는데 이제 가는구나?”

“바쁜 와중에 여자는 또 언제 만났담?”

“너도 누구 만나는 모양이던데? 아냐?”

“…눈치도 좋아.”

창식이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말도 사실인 모양이다.

“너도 빨리 결혼할 생각해. 아버지도 내년이면 칠순이다.”

“…노친네는 언제 그렇게 나이를 먹었어.”

“노친네라니!”

“아. 미안. 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했지. 나도 자꾸 잊어버리네. 입에 익었어.”

“근데 여자는 뭐 하는 사람이야? 백부님이 허락하실 것 같아?”

수안은 창수가 만난다는 여자가 궁금했다. 한송 그룹도 범 강운 그룹으로 묶인 대기업이고 이제 SK 텔레콤까지 인수하며 재계 순위가 훌쩍 뛰어오른 재벌가였다. 한송 그룹 며느리로 허락하려면 최소한의 기준은 따질 분이셨다.

“안 하면 어쩔 건데? 창식이랑 내 나이가 벌써 삼십 중반이야. 게다가 넌 애가 셋이잖아. 아버지도 마음이 급하실 거야.”

“그래서 뭐 하는 분이시냐고요. 얘길 하시라니까? 왜 말을 빙빙 돌려?”

“…승마 클럽에서 만났는데, 애가 순진해. 그래도 기업가 영애라 집안 허락은 문제없을 것 같다.”

“오오.”

“와씨. 나 몰래 호박씨 까고 있었네. 승마 클럽 같이 가자니까 맨날 따로 간다고 하더니 여자 만나러 간 거였어?”

“그러는 넌 어디서 만난 여자야?”

“…나도 형하고 따로 다니면서 승마 클럽에서 만났지. 얘도 집에 돈이 좀 있어서 승마 클럽 다니거든? 얘도 허락은 문제없을 거야.”

창식도 다르지 않았다. 결국 같은 곳에서 만났으면서 왜 타박이란 말인가.

“에라이! 나만 호박씨 깠냐? 너도 깠네!”

결국 둘이 예전에 즐기던 승마 덕분에 여자가 생긴 모양이다. 둘은 용산에서 일을 하면서부터 다시 승마를 시작했었다.

“잠깐. 둘이 같은 승마 클럽 다녀?”

“그렇지?”

“뭐…. 좋은 일이긴 한데….”

같은 승마 클럽에 다니는데 둘 다 거기서 여자를 만났다고 하니, 수안은 괜히 쓸데없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한 여자가 두 남자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건 아닐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지만, 설마….’

자꾸 설마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괜히 걱정을 키우고 있었다.

“이름.”

“뭐?”

“두 사람이 만나는 여자 이름을 말해 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야. 얘는 뒷조사 필요 없어. 나이도 어리고….”

“그래. 애가 순진해서 그런 건….”

둘 다 만나는 여자가 순수하단다. 게다가 둘 다 잘 사는 집 딸이란다. 의심의 싹이 무럭무럭 덩치를 불려간다.

“이름!”

“구….”

“구….”

둘은 동시에 같은 성을 말했다.

‘젠장. 특이 성씨인데도 같아?’

자칫 족보가 꼬일 것 같았다. 족보 문제 이전에 형제 사이의 문제였다.

“너 뭐야?”

“그러는 형은?”

“이름이나 빨리 마저 말해. 다른 사람이겠지.”

“구수….”

“구수….”

“뭐야!”

이번엔 수안이다. 설마가 사람을 잡는 수가 많았다.

“자, 잠깐 이거 무슨 상황인데?”

“나도 황당하네.”

“설마 너 수정이 만나냐?”

“설마 형 수민이 만나?”

“엥?”

이름이 달랐다. 형 창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수정이고 동생 창식 입에서 나온 이름은 수민이다.

“수정이가 아니라 수민이?”

“수민이가 아니라 수정이?”

“조용히 해 봐! 가진 사진 있으면 꺼내. 내가 확인할 테니까.”

아무래도 얼굴까지 확인해야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수정이 예쁘거든?”

“우리 수민이도 예쁘거든?”

둘이 지갑을 꺼내 그 안에 고이 모셔둔 사진을 보여 줬다. 수안보다 둘이 먼저 확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억!!”

“억!!”

“너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형이야말로 뭔데?!”

우애 좋다던 둘이 멱살을 잡는 동안 수안도 사진을 확인했다.

“허.”

정말 같은 사람이었다.

“너 언제부터 우리 수정이 만났어?”

“형이야말로 언제부터 우리 수민이를 만났는데?”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일루와 새끼야.”

“내가 무서울 것 같아? 내가 수민이는 포기 못 해!”

“남의 사무실에서 뭐 하는 짓이야? 잠깐 둘이 떨어져 봐.”

그런다고 말을 듣겠는가.

“수민이 사진 내놔!”

“수정이 사진이거든!!”

“얘는 수정이 아니라 수민이거든?”

“수정이가 맞거든!”

“잠까안!! 다르다! 달라!”

계속 사진을 살펴보던 수안은 둘이 묘하게 닮았을 뿐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얼굴 생김새가 미세하게 다르잖아. 여기 한쪽은 작은 점도 있네. 쌍둥이거나 자매야. 형이 만난다는 수정 씨는 나이가 몇 살이야?”

“헉! 수정이 나이가 27살인데….”

“수민이 나이도 27살이야!”

“쌍둥이일 가능성이 커졌어. 지금 창수 형부터 전화 걸어봐. 그리고 이어서 창식이 형도 전화 걸고. 그럼 확실하게 알 수 있잖아.”

결국 전화까지 해 봐야 확인될 일이다.

“자, 잠깐만.”

창수는 얼른 휴대 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얘는 왜 이렇게 안 받…. 어. 수정아. 오빠다.”

-응. 오빠. 무슨 일이야?

“아 별일은 아닌데….”

그사이 창식도 수민에게 전화했다.

“어. 수민아. 나야.”

-응. 오빠. 왜?

둘이 같이 통화하는 사람 머리가 두 개가 아니라면 같은 사람일 수가 없었다.

“이제 쌍둥이 자매가 있는지 확인해야겠지?”

“아. 수정아 혹시 너 쌍둥이 자매가 있니? 내가 너랑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아서….”

-혹시 다른 날에 승마클럽 갔어? 강사님이 매번 쌍둥이 동생 수민이랑 나랑 헷갈려서 아예 날짜를 바꿨거든.

“오! 있었구나? 수민이? 맞네. 맞아.”

창수가 확인하는 동안 창식도 수민을 통해 언니 수정이 있음을 확인했다.

“어, 언니가 있었어? 이름이 수정이라고?”

쌍둥이 확정이다.

“지랄도 풍년이다.”

복잡한 심사를 표현한 수안의 말이 휴대 전화로도 전해진 모양이다.

-오빠. 옆에 누구 있어?

“아. 내 사촌 동생 수안이라고 있어.”

-수안? 이름이 되게 유명한 이름이다?

“큭. 강수안 맞아. 강운 그룹 회장. 내 사촌 동생.”

-와악!! 오빠 강운 그룹 사람이었어?

“아…. 그동안 말 안 해서 미안하다. 조만간 말하려고 했는데, 처음에 말을 안 했더니 할 기회가 없더라고.”

둘은 애인에게 집안도 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잠시 둘의 소란스러운 통화가 이어졌고 모두 전화를 품에 넣었을 때 수안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 달라 다행이긴 한데, 백부님이 겹사돈도 괜찮다고 하실까?”

“…….”

“…….”

난관에 봉착한 두 사람이다.

“형. 수정 씨가 어디 기업 딸이라고 했었어?”

창식은 자기도 집안을 알리지 않았고 상대에게도 못 들었던 모양이다.

“…GL 그룹에서 얼마 전 분리된 기업이라고 들었다.”

“그랬구나.”

쌍둥이로 판명되었으니 수민도 GL 그룹에서 분사된 기업 딸이다.

“나머지는 형들이 잘 해결해 봐. 좋은 사람이면 백부님이 마냥 반대하진 않으실 거야.”

“난관이 우리 집뿐이겠냐?”

상대 집안에서 겹사돈을 싫어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보다 수정 씨와 수민 씨 생각을 먼저 들어 봐야 하지 않아?”

“아.”

“맞네.”

서로 집안보다 먼저 쌍둥이 자매의 의향을 확인해야 맞다.

“다른 누가 나선다고 해결되겠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형들이 지지고 볶아야지.”

“에효. 결혼 좀 할라 했더니, 네가 말썽이다. 인마.”

“형보다 내가 먼저 만났을걸?”

“내가 먼저야 인마!”

“아냐! 난 승마 클럽 가자마자 얘부터 노리고 있었다고!”

“됐고. 한 사람이 양다리 걸친 거 아니면 됐어. 이제 좀 나가 주라. 나중에 형님들 결혼하면 축의는 내가 넉넉하게 해 줄게.”

“올 때는 마음이 그나마 가벼웠는데….”

“갈 때는 왜 이렇게 마음이 무겁냐.”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달려가 주차요원 버릇을 고치겠다는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당장 여자 문제가 생긴 판국이라 거기까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 * *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서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 집무실에 돌아온 수안은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창수, 창식 형제에게 말했던 중요한 일정이었다.

“아휴.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예. 정원이 아빠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정원이 담임. 오태흥입니다. 회장님과 통화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정원이의 학부모 정기 상담이었다. 아현이 촬영으로 바빠 수안이 대신 받기로 했었다.

정원의 담임 선생도 반 학생인 정원이 누구의 아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정원이는 학교에서 잘 지내죠?”

-예. 정원이는 학급에서 친구들과 잘 지내고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학습 태도도 바르고 숫자 감각도 뛰어납니다.

“하하하.”

자식이 학교생활을 잘한다는데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겠나.

-내년에 2학년이 되어도 잘 적응할 겁니다. 학교에서 각별하게 보호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우리 경호실 직원들이 학교에서 불편하게 하진 않죠?”

-예. 이제 아이들에게도 익숙합니다. 가끔 학교에 오는 학부모들도 경호 직원이 있다는 사실에 환영하는 눈치입니다. 불미스러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니까요.

학교에만 아들의 경호를 맡길 수 없었던 수안이다. 부호의 자식들은 언제 어디서든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네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비서실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예. 끝까지 긴장 놓지 않고 챙기겠습니다.

수안은 통화를 끝내고 본래 업무로 복귀하려다가 창수, 창식 형제의 일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아직 결혼하지 않고 노처녀 노총각으로 살아가는 수현과 수용이 떠올랐다.

“개차반으로 살던 형들도 여자 만나서 결혼을 하겠다는데, 얘들은 대체 뭘 하는 거야?”

다시 전화를 들었다. 막냇동생 수용과 통화하기 위함이다.

-강 회장님? 어쩐 일로 미천한 동생에게 전화를 다 주시고?

“야. 너 요즘 뭐 하냐?”

-뭐 하긴. 맨날 회사 일로 바쁘지.

“여자는 언제 만나고.”

-내가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딨어?

“짬을 내서라도 만나야지. 비서실에서 후보군 만들어 줬잖아.”

-나 올해 겨우 서른이거든요? 게다가 회사가 기틀을 잡아가는 중이야. 지금은 손을 놓을 수가 없다고.

녀석이 설립한 부동산 포털사이트는 다움과 네이보의 힘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전국의 원룸을 포함해 아파트를 중계하고 있었고, 공장용지 중개까지 확장하는 중이다.

“그래. 서른이면 아직 괜찮지. 알았다. 그래도 시간 내서 좀 만나 봐. 몇 년 만나면서 상대를 파악할 시간도 필요하잖아.”

-동생 결혼 못 할까 걱정돼서 전화한 거야? 하여튼. 형은 그룹 회장이 돼도 똑같네.

“됐어. 일만 하지 말고 좀 놀면서 해.”

-누가 할 소리를 해? 형이나 놀아. 아버지 대신 그룹 경영한다고 아주 회사에 붙어산다며?

“난 결혼해서 애라도 있지.”

수용은 자신이 막내라 변명할 말이 있었다.

-수현 누나 걱정이나 해. 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안 그래도 지금 전화할 생각이야. 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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