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자 하나 (246/304)

각자 하나

SK 텔레콤이 한송 텔레콤으로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GL 전자까지 보이콧에 합류했으니 SK 텔레콤 최 회장도 더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적대적 인수 합병 발표 3일 만에 백기 든 SK 텔레콤.]

[담합으로 무리수를 뒀던 SK 텔레콤의 당연한 말로.]

[주인이 바뀌자 돌아오는 K폰!]

[삼디와 GL. 보이콧 풀고 공급 의사 밝혀.]

[한송 텔레콤 거대 통신사로 발돋움, 시장 점유율 30% 육박.]

누군가는 속이 쓰리다 못해 부글부글 끓겠지만, 한송 텔레콤 강 회장은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다 박 사장이 중간에 잘했으니, 일이 잘 풀렸지. 암.”

“감사합니다. 회장님.”

대답하는 박수겸 사장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창수와 창식은 아버지의 호출에 불려와 웃음소리만 듣다가 박 사장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단번에 SK 텔레콤 인수에 성공할 줄은 몰랐습니다. 축하합니다. 회장님. 박 사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

두 아들의 칭찬에 기분은 좋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너희 둘은 따로 감사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이 있다.”

“…….”

SK 텔레콤 인수에 어떤 협의가 있었는지 둘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박 사장. 설명 좀 부탁함세.”

“예. 회장님.”

박수겸 사장은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우선 앉죠.”

“네. 사장님.”

회사 안에서는 무조건 직급이 우선하기로 했다. 박수겸 사장은 창수, 창식 형제의 까마득한 상급자였다.

“회장님. 지금부터 할 얘기는 회사 업무와 약간 동떨어진 것 같습니다. 호칭을 바꿔도 되겠습니까?”

상석에 앉아 있던 강병모 회장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두 분 도련님은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오랜만에 들으니까 어색합니다. 사장님.”

“저도 그렇습니다. 사장님.”

예전 둘이 군대 가기 전에 듣고는 처음이었다.

“집안일이라 호칭을 바꿨습니다. 조금 전에 회장님께서 따로 감사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한 말 때문입니다.”

창수는 번뜩 떠오른 대로 물었다.

“혹시… SK 텔레콤 인수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도움이 아닙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 착각 때문에 말을 끊었네요. 계속하십시오. 사장님.”

“도움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 계획대로 진행된 일입니다. 그래서 회장님도 두 분 도련님 칭찬에 크게 웃지 못하셨습니다.”

창수와 창식이 아버지를 돌아봤고, 강병모 회장은 눈을 감고 입도 굳게 다물었다.

“누구십니까. 누가 우리 한송 그룹에 그렇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까.”

“강운 그룹 강 회장입니다.”

“아! 숙부님이….”

“그래서 집안일이라고 하셨군요!”

창수, 창식의 착각에 박수겸 사장이 얼른 정정했다.

“아, 아닙니다. 강운모 전 회장님은 이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계시잖습니까. 의원 자리에 계시는데, 친형제에게 사사로운 일로 도움을 주면 큰일이지요.”

그럼 강운 그룹 회장이라고 칭할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럼…. 수안이가?”

“수안이가 계획한 일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강 회장님이 저희에게 SK 텔레콤 인수 가능성을 알리시고 논의가 끝난 다음 K폰 보이콧을 시작하셨습니다. 이후 삼디 전자의 보이콧과 GL 전자의 보이콧도 강 회장님이 힘쓰신 결과입니다. 회장님이 일전에 사재를 회사에 투자하신 것도 땅과 건물을 사 주신 강 회장님 덕분입니다. 결국 한송은 적절한 차입과 유동성이 확보되어 손쉽게 SK 텔레콤을 인수했습니다.”

“하하. 이거 참.”

“수안이가 솔직히 좀 잘나긴 했죠. 걔는 머리가 너무 좋아요.”

사촌 동생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들으면 무슨 말이 나올까.

“강수안 회장님은 두 사촌 형이 사이좋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네?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사이가 안 좋기라도 하답니까? 왜 걔는 우릴 보고서도 그런 착각을 하지?”

“지금 우애가 나중에도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당장 상속이 시작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분 중에 누가 한송 텔레콤을 포기하시겠습니까.”

“……!”

“……!”

둘은 서로 반짝이는 눈을 마주쳤고 울컥 올라오는 화를 애써 눌렀다. 아버지가 보고 계셨다. 그리고 이제 한송 그룹은 두 개의 통신사를 갖고 있었다. 싸울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중에 수안이 둘 중 하나를 불러 준다고도 하지 않았겠는가.

“이래서 SK 텔레콤 인수를 바라셨습니다. 제대로 된 기업은 통신사가 전부인 한송 그룹입니다. 만약 두 개의 통신사를 갖게 되면 두 분이 유산으로 다툴 일이 없다고 하셨지요.”

“…….”

“…….”

자신의 입으로 상속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두 아들의 표정을 보고 싶지도 않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박수겸 사장이 대강의 설명을 끝내고서야 눈을 떴다.

“박 사장 설명은 이해했겠지?”

“…예.”

“예.”

“수안이가 그런 놈이다. 가족 일이라면 회사가 손해 보는 일도 아랑곳하지 않아. 야심 차게 준비한 K폰을 공급하지 않으면서까지 한송 그룹을 도왔어. 쓸모없는 땅까지 전부 사들여 줬고 최근엔 삼디 전자와 GL 전자를 압박해 보이콧을 끌어내기도 했지. 그게 쉬운 일이었을까?”

SK 텔레콤을 망하게 하려다 일이 이렇게 흘러갔을 뿐이다. 공주시와 연기군의 땅은 그로 인한 부수입이었고, 삼디 전자와 GL 전자의 동참은 스마트폰 기술 제휴를 위한 충성 맹세의 일환이었다.

사실 수안은 한송 그룹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쉽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죠.”

“앞으로 너희도 수안이를 위해 그래야 한다. 수안이 일이라면 불물 가리지 말고 뛰어들어.”

“알겠습니다.”

“예.”

“수안이가 너희를 위해 이렇게까지 애썼는데, 너희가 모르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불렀다. 이제 SK 텔레콤 인수도 성공했고 감사 인사를 전할 때도 됐지. 너희 둘이 가서 성심성의껏 인사하고 와라.”

“예. 저희가 가 봐야죠.”

“다녀오겠습니다.”

“빈손으로 가려고?”

“최고급 한우 세트로 사가겠습니다.”

“한우는 무슨 얼어 죽을…. 박 사장.”

“예. 회장님. 여기 있습니다.”

강병모 회장이 손을 내밀자 그 위에 얼른 키를 올려놓는 박 사장이다.

“이거 몰고 가서 놓고 와.”

“…이건 자동차 열쇠 아닙니까?”

기화 마크가 선명한 차량 열쇠였다.

“한우보다는 이게 더 “얼어 죽을” 인 것 같은데요? 기화 차 사장한테 기화 차를 가져다주면서 선물이라고요?”

“멍청한 놈. 그게 그냥 열쇠로 끝이겠냐? 1톤 탑차니까 안은 절대로 열어보지 말고 그냥 내 선물이라고 해.”

“저희도 뭔지는 알아야죠.”

“맞습니다. 저희가 차를 험하게 몰았다가 상하는 물건이면….”

조심성 없는 두 아들이 걱정이라 결국 말을 하고 말았다.

“수안이 녀석 용돈 좀 넣었다.”

“…탑차에 용돈을 넣어서 주신다고요?”

“설마 가득?”

“…….”

강병모는 긍정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결국 긍정이라는 뜻이다.

“히익!”

“우아. 우리 회장님 통이 크셨네.”

1톤 탑차에 가득 들어간 현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양도성 예금 증서도 몇 장 들었다. 그러니 차 조심해서 몰아라. 가다가 전복이라도 되는 날엔 끝장이다.”

“…경호차라도 붙여 주시죠?”

“안 그래도 비서실에서 차량 세 대가 따라갈 거야.”

“그런데 탑차 가득히는 너무 많지 않습니까?”

둘째 아들 창식의 말에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에 행정 수도 법률 위헌 결정 난 거 알지?”

“아. 예.”

‘우리 집 땅도 다 떨어졌겠네. 오를 때 팔아야 했는데….’

아버지 토지 대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던 창식이다.

“행정 수도 방면에 가지고 있던 땅. 수안이가 위헌 결정 나오기 전에 다 사 줬다.”

“아…. 땅값이 똥값 됐을 건데…. 그걸 다 사 줬다고요?”

“그거 아니라도 지금까지 받은 도움이면 하나도 안 아깝다. 너희 둘 하나씩 주라고 SK 텔레콤 인수하게 만든 놈이다. 난 너희가 나 죽고 안 싸우게 된 것만으로 만족이다.”

강병모 회장의 말에 자신을 돌아보게 된 창수였다. 자신들은 노친네라고 부르며 걱정하지도 않던 아버지였다. 사촌 동생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기업을 인수할 기회를 줬고, 그 결실은 자신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아. 나는 왜 이렇게 못났냐. 내 아버지를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겨.’

“…못나서 죄송합니다.”

창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자신을 돌보는 게 우선이었다. 누구는 잘나서 큰아버지까지 챙기는데 자신은 아버지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촌 동생에게 거액의 용돈을 준다고 해도 죄스러운 마음만 들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형님이 아니라 제가 못나서 그렇습니다.”

두 아들이 평소와 달리 기를 못 펴는 모습에 강병모 회장이 울컥해서 소리쳤다.

“너희가 못나긴 뭐가 못나? 수안이 녀석 때문에 그런 생각할 거 없다. 그런 놈이 어디 흔한 줄 알아? 내 아들 창수, 창식이도 잘났다. 함부로 고개 숙이고 자책하지 마. 알았어?! 너희 둘은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야!”

처음 듣는 아버지의 진심이었다. 두 형제는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막혀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그런 아들들의 마음을 아비가 왜 모를까.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다시 전해지고 돌아가고를 반복하며 서로 공명하고 있었다.

“박 사장이 나머지 처리하도록. 끄읍.”

강병모는 괜히 아들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까 싶어 얼른 자리를 피했다.

“예. 회장님.”

이 오묘한 분위기는 시간이 해결해 주는 법이다.

강병모 회장이 나가서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눈물을 툭툭 떨구던 두 형제는 잠시 뒤에 감정을 추슬렀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사장님.”

“정신 차리고 나면 항상 늦습니다. 나이 들어 자리잡고 제대로 효도하려고 마음먹었더니, 기회도 주지 않고 가시더이다. 두 분 도련님은 늦게라도 마음을 다잡으셨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미리 잘하십시오.”

일찍 부모님을 여읜 박수겸 사장의 말이라 진정성이 남달랐다.

“아…. 예.”

“예. 사장님. 잘하겠습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출발하죠. 강운 그룹 회장님과 만나는 일이라 미리 약속을 잡아 놨거든요.”

“예. 사장님. 임무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확실하게 전달하고 인사하겠습니다!”

“하하.”

이제 제법 믿음직한 모습으로 변화한 두 사람이다.

* * *

부르릉.

1톤 탑차가 강운 그룹 본사 빌딩 주차장에서 실랑이하고 있었다.

“…여길 왜 오셨다고요?”

“수안이, 아니 강수안 회장을 만나러 왔다니까요.”

“야. 회장님이라고 하자니까.”

“아. 우린 강수안 회장님 만나러….”

“뵈러 인마. 존댓말도 못 하냐?”

“썅. 그럼 형이 하든가.”

“네가 운전하고 있잖아. 너한테 물어봤으니까 네가 해야지.”

주차요원은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는 두 사람에게 올라오는 화를 억누르며 대화를 시도했다.

“…이 차를 지하 주차장에 대겠다는 말입니까?”

“그럼 차를 어디다 댑니까? 어쨌든 들어가도 되는 거죠?”

차가 다시 출발하려고 하자 주차요원이 소리쳤다.

“자, 잠까안! 스톱!”

“아! 왜요? 우리 급해요! 약속 시간 거의 다 됐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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