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내놔
“폰카는 디카를 잡아먹을 거야.”
이후 스마트폰에 달려 나오는 폰카 성능이 디지털 카메라 성능과 유사할 정도로 높아지면서 디카 시장은 필름 카메라 시장과 유사하게 무너진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사람들은 앞으로 사진을 인화하지도 않는다. 사진을 찍는 목적이 SNS에 올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디카로 찍으면 컴퓨터로 옮겼다가 다시 SNS로 올리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곧장 SNS로 올릴 수 있었다. 아직 출시되고 오래 지나지 않은 디지털 카메라는 초반 약간 인기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K폰 성능이 향상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수요가 남는 것은 전문가들이 사용할 고성능 카메라였다.
“산 넘어 산이네. 이 부분은 연구소 보고서를 받아 보고 나서 회장님과 협의하지.”
“빨리 진행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 조만간 애플에서 iPhone을 출시한다고 했거든.”
“……!!”
사실이었다.
수안이 애플에 스마트폰 개발을 허락한다고 하자마자 스티브는 스마트폰 개발에 매달리고 있었다. 대부분 기존 강운 전자 K폰에 들어간 기능을 활용해야 했지만,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기술 공유 기업인 만큼 애플의 정보도 수안의 손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까지 애플은 염려할 단계가 아니었다.
“GL 전자도 서두를 것 같고….”
“……!!!!”
GL 전자 쪽은 아직 추측일 뿐이다.
“최대한 빨리 결정해서 전달하마. 나오지 마라. 나 간다!”
“늦으면 나도 몰라. 내가 형이라 허락하는 거란 말이야. 알았지?”
“알았다고! 재촉하지 마.”
수안이 삼디 전자를 재촉하는 이유가 있었다.
* * *
이정용이 돌아가고 며칠 뒤 GL 전자 구필현 사장이 도착했다.
“또 뵙습니다. 구 사장님. 하하.”
“…강 회장.”
삼디 전자 이정용과 만나기 전에 GL 전자와 만났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술 협약에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강운 전자가 허락한 상대는 오직 애플 하나였다. 그래서 이정용에게도 GL 전자와 만났다고만 했을 뿐이다.
또한 GL 전자가 서두르고 있다는 식으로 살짝 말을 흐린 것이 전부다.
‘착각은 자유니까.’
GL 전자는 애플이나 삼디 전자와 다른 상대였다.
‘냉철한 경영자.’
수안이 GL 전자 구 사장을 평가하는 말이다.
GL 전자도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텐데 수안 앞에서 끝까지 GL 전자의 이익을 대변했던 구 사장이다.
결국 지금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시간을 끌게 됐다.
‘오늘은 다를 겁니다. 구 사장님.’
그가 모르는 사이 상황이 바뀌었다.
“앉으시죠. 얘기가 또 길어질지도 모르니까요. 차는 뭘 드릴까요?”
“지난번 쌍화차 좋더군.”
“하하. 저도 좋아하죠.”
수안은 비서에게 쌍화차 두 잔을 부탁했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쌍화차를 마시며 한껏 여유를 즐겼다. 상대를 짓밟기 전의 여유였다.
‘뭐지? 강 회장의 태도가 전과 달라.’
수안은 GL 전자가 충분한 역량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스마트폰의 첫 개발사인 강운 전자의 뒤를 이어 GL 전자가 세계 시장에 등장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국내 업체를 애플 다음 스마트폰 생산자로 만들기 위해 몸이 달아 있었다는 말이다. 다른 해외 업체의 접촉을 거절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수안은 대한민국이 스마트폰 주도권을 갖기를 원하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마시는 쌍화차는 진짜 보약이죠.”
지금은 삼디 전자가 디지털 카메라 사업까지 내주며 강운과 손을 잡은 다음이다. GL 전자에서 강운의 제안을 거절해도 상관없었다.
‘벌써 국내 업체가 시작했단 말입니다. 느림보 거북 씨.’
“그사이 변화가 있었나?”
“무슨 말씀입니까?”
“강 회장이 여유가 있어 보여서 말일세.”
“티가 납니까? 하하. 여유가 조금 생겼습니다.”
“나도 같이 좀 아세.”
“배가 조금 아프실 수도 있는데요?”
“내가?”
“그럼 제 배가 아프겠습니까? 저한테는 좋은 소식이지만, 구 사장님께는 나쁜 소식이니까요.”
“…….”
“궁금하신 것 같으니 말을 아낄 수가 없네요. 하하하.”
갑자기 듣고 싶지 않아졌지만, 수안의 말에 귀가 기울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삼디 그룹에서 디지털 카메라 사업을 내줬습니다. 너무 싸게 받아와서 미안할 정도였죠.”
“오. 삼디에서 디카를 포기해? 그거 축하할 일이군.”
디지털 카메라를 포기한다고 하니 GL 전자엔 기회였다.
‘마침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 진출할 생각이었는데….’
헛된 기대는 헛되이 사라지는 법이다.
“축하 감사합니다. 구 사장님. 삼디 디지털 카메라 합류로 인해 K폰에서 폰카 성능 향상은 기정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 축하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계 디지털 카메라 시장은 당장에 쪼그라들고 디카는 설 자리를 잃겠죠. 디지털 카메라 사업을 영위하는 업체는 앞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겠습니다.”
‘폰카가 디카를 넘어서면 디카 시장은 끝장이로군. 게다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K폰에 고성능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간다면….’
“그, 그래 그거 잘됐군.”
아직 기술 협약은 진행도 못 했는데, 상대는 자꾸만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축하할 일은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구 사장님께 드렸던 제안을 삼디 전자에서 모두 수락했답니다. 이제 삼디 전자는 강운, 애플에 이어 세 번째 스마트폰 제조사가 될 겁니다.”
“……!!!!”
수안의 말에 코너에 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구 사장이다.
“구 사장님께는 참 안타까운 일이죠. 디카 사업까지 내주면서 달라는데 안 줄 수가 있어야죠.”
“가, 강 회장.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고. 저 아직 젊습니다. 귀 안 먹었어요.”
“GL 전자가 협상을 진행하고 있지 않았나! 아직 우리 협상은 끝나지 않았어!”
“하루가 다르게 시장이 변하는데 한 달 이상 제 시간을 사용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사전 계약이라도 진행했답니까? 저와 말싸움만 하시다 가셔놓고 이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실 참입니까?”
“사전 계약은 아니었어도 상도의가 있지 않나!”
“상도를 말씀하시니 저도 이 얘길 꺼내지 않을 수 없군요. SK 텔레콤과 합작해서 강운 전자 휴대 전화에 불이익을 줬던 GL 텔레콤까지 용서하고 마음을 열었는데, 구 사장님은 고집불통이셨죠. 제가 왜 더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
SK 텔레콤 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K폰의 국내 출시를 막으려고 담합을 시도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삼디 전자는 SK 텔레콤과 손잡았던 과거를 반성하고 이번 K폰 보이콧에 합류했습니다. GL 전자는 여전히 SK 텔레콤에 납품 중이죠? 그런데 누가 상도의를 입에 올립니까?”
“…우리도 SK 텔레콤 보이콧에 합류하겠네.”
SK 텔레콤의 추락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당연한 일을 이제야 하시는데 제가 감사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겠죠? 지금까지 고민하신 대답이나 들려주시죠. 삼디 전자는 이미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수안이 제안했던 것은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 사용, 정전식 터치패널과 TFT LCD, 핵심 반도체 사용, 불합리한 기술 협약까지였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스마트폰 제조 기술을 이전해 준다고 했었다.
“삼디 전자는 다 받아들였단 말인가?”
GL 전자 구 사장은 디스플레이와 기술 협약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협상으로 풀어내고자 했었다.
“삼디 전자는 이 회장님이 디카 사업까지 내주면서 기술 협약을 요청했다니까요. 삼디 그룹 이 회장님이 통이 크세요. 사업을 내주면서도 어찌나 고맙다고 하시던지, 제가 민망할 지경이었습니다.”
“…….”
이 상태로는 협상할 수 없었다.
‘상대는 아쉬울 게 없고 이쪽은 아쉬운 일만 잔뜩이야.’
“자. 아직도 구 사장님께는 선택지가 있어요. 네 번째 스마트폰 제조사가 되실래요. 아니면 휴대 전화마저 빼앗기고 백색가전만 생산하는 전자 회사로 남으시겠어요?”
“…….”
이번에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마트폰 사업은 물 건너간다는 뜻이다. 또한 강운과 스마트폰 기술 협약을 맺지 않으면 기존 휴대 전화 판매도 어렵게 만들겠다는 경고였다. 최종 통보나 마찬가지였는데, 구필현 사장이 말이 없자 수안은 열불이 나서 말을 보탰다.
“우리 회사가 해외 기업이 아니라 대한민국 기업이라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제가 강운 전자를 놔두고 GL 전자를 잡아먹기라도 하겠습니까? 개발에 수천억이 들어간 모바일 운영 체제를 공짜로 쓰라고 넘겨주고, 각고의 노력 끝에 개발한 정전식 터치패널까지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지 않습니까. 게다가 스마트폰 핵심 기술이 들어간 부품까지 공급한다니까요? 도대체 이 좋은 조건을 왜 안 받아들입니까? 해외 기업이었으면 여기다 몇 개 불이익을 더해도 무조건 오케이란 말입니다.”
“애플도 그랬나?”
해외라는 말에 애플을 떠올린 구 사장이다.
“애플은 본래 강운 전자 제품을 생산하던 업체였습니다. 이미 대부분의 스마트폰 기술을 공유하는 회사였어요. 스마트폰 생산을 맡기지 않을 방도가 없었죠. 공유하지 않았다가 덜컥 자체 개발이랍시고 스마트폰을 내놓으면 오히려 손해 아니겠습니까. 저는 손아귀에 들어온 먹이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못 가진다면 부수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서요.”
GL 전자를 향한 협박성 발언이다. 만약 이번 제안까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GL 전자가 아니라 다른 기업을 키워서라도 국내 스마트폰 생산회사를 추가할 생각이다.
“휴.”
“그만 좀 고민하십시오. 이후 국내 기술 협약 회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삼디 전자와 GL 전자가 전부입니다. 저도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해외에 기술 넘기고 싶지 않아요.”
“…좋네.”
“참 오래도 걸립니다. 삼디 전자가 시작했다니까 이제야 수락하시네요.”
“삼디 전자와 협약했다는 말에 거짓은 없겠지?”
이정용이 이렇게 확인했다면 할 말이 없었겠지만, 삼디 전자는 진짜 기술 협약서에 사인을 끝냈다. 수안이 왜 서둘렀겠는가. GL 전자에 실제 성과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엊그제 이 회장님 오셔서 사인했습니다. 아직 GL 전자도 늦지 않았어요.”
“협약서 초안을 빨리 보내 주길 바라지. 삼디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싶어.”
구필현 사장은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구 사장을 수안이 다시 자리에 앉혔다.
“쌍화차나 다 마시고 가세요. 그거 남기면 벌금입니다.”
“…알았네.”
과묵한 구필현 사장은 진짜 차만 마셨다. 다 마셔가는 시점에 수안이 말을 붙였다.
“GL 전자에서 디지털 카메라 시작하려고 개발자들 모으지 않았습니까?”
“그건 또 어떻게….”
“필요 없어졌다고 자를 거면 이쪽으로 보내세요. 써 보고 괜찮으면 채용하죠.”
“강 회장. 도대체 그런 정보는 어떻게 얻는 거야?”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껏 데려온 개발진을 넘겨줄 일은 없었다.
“디지털 카메라 사업 안 한다고 그들이 필요 없겠나? 스마트폰에도 카메라는 들어가잖아.”
“기술 주도권은 갖고 싶으시다? 뭐 좋습니다. 어차피 약정하면 스마트폰 관련 특허는 5 대 5로 확정이니까요.”
예전에 한참 설명을 들었던 일이라 구 사장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끄응.”
“회사로 가셔서 스마트폰 기술 협정 고민하지 마시고 보이콧부터 성의를 보이시고요.”
“그러지.”
존대와 평대가 오가는 대화였지만, 대화의 주도권은 말을 높이는 수안에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