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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없는 기대 (243/304)

부질없는 기대

이후 강병모 회장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전대미문의 ‘관습 헌법’이라는 논리가 등장해 행정 수도 법률을 위헌으로 결정 내리는 헌법 재판소였다.

[…수도 이전에 관한 의사 결정을 국민투표에 부치지 아니하는 것은 합리성을 결하였음이 객관적으로 명백하여 자의 금지 원칙에 반하고, 또 국민들은 수도 이전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리라는 신뢰와 대의기관이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여 행동하지 않으리라는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추인할 수 있어 신뢰 보호 원칙에도 반하므로, 이를 국민투표에 부치지 아니하는 것은 재량권을 일탈·남용하는 것이다.]

“X발. 이게 뭐야?”

저도 모르게 쌍욕이 튀어나오는 헌법 재판소의 주문이다.

이미 상당한 땅과 건물을 더블 스타에 넘겼고, 헌법 재판소 판결에 따라 조카에게 줄 용돈(?) 수준을 정하려고 했다. 신행정 수도가 위헌으로 판결되어 버렸으니 싸게 넘겼다고 해도 보상이 될 수 없었다.

이제 나머지 보답을 무조건 현금으로 채워야 했다.

강 회장에게 불려와 앉아 있는 박수겸 사장도 굳은 얼굴로 강 회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행정 수도 이전하겠다고 공약을 들고나온 후보를 국민이 뽑았으면 결국 국민 투표를 한 것이나 다름없잖아! 헌재 이 새끼들은 국민을 개 X으로 보는 거야 뭐야?”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판결은 저도 처음입니다.”

화가 나지만, 헌법 재판소 판결까지 끝난 일이다.

“에효. 이미 판결 난 것을 어쩔 수도 없고….”

“회장님. 현금을 조금 많이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준비한 현금으로는 어림도 없게 느껴진다.

“싹싹 긁어 모아 봐.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어쩔 수 없잖아.”

“다행히 SK 텔레콤 주가가 바닥을 치고 있어서 지분 확보가 수월했습니다. 추가 자금은 필요 없을 듯합니다.”

지금까지 확보한 지분으로 조만간 적대적 인수 합병을 선언할 예정이다. SK 텔레콤을 무리 없이 인수할 수준으로 여러 기업과 개별 명의로 분산해 지분을 확보한 상태였다. 적대적 인수 합병이 시작되면 블록딜이 난무할 것이다.

* * *

한송 그룹에서 SK 텔레콤 지분 확보에 열을 올리고 현금을 마련하는 동안 수안은 방문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전무님. 혹을 달고 오셨네요?”

“강 회장님. 혹이라니요….”

삼디 전자 이정용 전무와 약속을 잡았는데, 함께 온 사람이 SK 텔레콤 최형진 회장이었다. 그간 아무리 약속을 잡으려 해도 안 됐기에 이정용을 통해 꼼수를 쓴 것이다.

수안은 이정용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불편함을 대놓고 표현했다.

“이 전무님. 스마트폰 기술 협약에 관해 논의하겠다고 하시더니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

진짜 곤란한 사람은 수안이 아니라 SK 텔레콤 최형진 회장이다. 공정위 결정으로 신규 가입자를 받지 못하는 와중에 K폰 공급 중단이 기름을 부어 주가는 바닥을 치고 있었고, 가입자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6개월 신규 가입이 중단된 시기엔 K폰을 공급받아도 기존 가입자만 기기를 변경할 수 있었으니 크게 영향이 없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신규 가입을 재개할 수 있는 다음 달부터는 무조건 K폰을 공급받아야 했다.

‘K폰이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킬 줄 어떻게 알았겠어.’

기존 휴대 전화와 같이 K폰을 만만하게 생각했던 최 회장은 출시 이후 세계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K폰의 위상을 매일 확인해야 했다.

비교할 만한 타 기업의 기종도 없는 K폰의 독무대였다.

집에 있는 자식만 해도 K폰을 사용 중이었고 매일 “코톡!”이라는 메시지 알림음이 들려온다. 또한 여러 종류의 게임이 내장된 K폰은 일견 전화를 위한 용도가 아니라 게임기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기본 탑재된 애니멀팡, 런런쿠키, 앵그리피그 & 버드, 레이드 드래곤 등등의 게임으로 지금도 타 통신사는 가입자 수가 폭증하고 있었다. 이제는 K폰이 아니면 통신사 신규 가입이 전무하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은 K폰 공급이 재개되어도 회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K폰을 공급받을 수만 있다면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마케팅을 해야 했다. 그래야 가입자 수를 회복하고 회사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삼디 전자 이정용까지 앞세워 강운 그룹 회장실에 와야 했던 이유였다.

“회장님. 잠시만 접견을 허락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최형진 회장의 말에도 수안은 여전히 냉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강 회장님. SK 텔레콤이 강운에 크게 잘못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이정용의 말에 수안이 답했다.

“없어요? 잘못한 일이 없는데 공정위에서 그렇게 처분을 내렸습니까? 공정위에서 파악한 사실을 삼디 전자에선 아직 모르십니까? 삼디 전자 휴대 전화에 줬던 혜택의 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강운의 휴대 전화를 취급했잖습니까?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고 하지만, 난 맞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못 지나갑니다. 앞으로 SK 텔레콤에 우리 제품이 들어갈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 이 전무님이 SK 텔레콤에 공급하시면 되겠네요.”

“…….”

이정용도 당연히 알고 있었던 일이다. SK 텔레콤은 유독 강운 전자 제품을 등한시했었고 삼디 전자 제품을 앞장세워 마케팅을 진행했었다. 삼디 전자에서 강운 전자 제품보다 많은 이득을 챙겨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삼디 전자가 강운 전자 휴대 전화의 시장 점유율을 낮추려고 실행한 일이었다.

“여기까진 양반이었죠. K폰이 출시되기 전에 통신사가 모여 논의한 일은 아무래도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이 정도야 마음만 조금 넓게 먹으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어?”

“모르셨습니까? SK 텔레콤 주도 아래 KT와 GL 텔레콤이 모여서 K폰을 보이콧하려고 했습니다. 일정 수준의 이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

이것도 잘 아는 일이다. 자신이 최형진 회장에게 부탁한 일이었다. K폰이 출시되면 단 한 발짝도 따라잡지 못한 삼디 전자의 휴대 전화가 된서리를 맞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각 통신사에 K폰의 보조금을 트집 잡아 출시를 막아 보고자 했었다. 그마저도 공정위의 빠른 행동에 전혀 이득을 보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수안이 알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을 뿐이다.

수안의 반격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게다가 정치권에도 압력을 넣으셨죠?”

최 회장은 자신이 비빌 언덕인 공화국 실세들까지 동원한 다음이었다.

“그분들 연락은 잘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더군요.”

수안은 정치권에서 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둘 사이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오지랖 넓은 정치인도 있었고, 경고 섞인 제안도 있었다. 적과 분쟁 중에 중재를 자처하는 놈들. 그들이 바로 프락치였다. 아버지가 속한 당에서 온 연락은 파악해 뒀다가 아버지께 전달했다. 공화국 정치인과 연결되었다면 미리미리 쳐 내야 했다.

“하지만 노친네들이 강운 그룹 압박한다고 제가 수그릴 것 같습니까? 어디 끝까지 가 봅시다. SK 텔레콤 신규 영업 재개에 맞춰서 세기 통신과 한송 텔레콤은 대규모 신규 가입 이벤트를 진행하죠. 어디 살아남아 보세요. 솟아날 구멍이 생길지도 모르죠.”

“…….”

“…….”

삼디 전자 이정용 전무와 SK 텔레콤 최형진 회장은 서슬 퍼런 수안의 말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최 회장님. 제가 얼굴 안 보고 납품 중단으로 끝낼 것 같으면 그대로 계셨어야죠. 이 전무님까지 대동하고 오시면 그 불똥이 어디로 튀겠습니까?”

“아….”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와중에 튀는 불똥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오늘 이 전무님과 논의하기로 했던 한 스마트폰 기술 협약은 없었던 일로 하죠. 삼디 전자는 훌륭한 기술을 가진 회사이니 자체 스마트폰 개발도 어렵지 않을 겁니다.”

“자, 잠시만!”

“두 분은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미국에서 중요한 전화가 걸려오기로 해서 멀리 못 나갑니다.”

때마침 들어온 경호실 직원들이 둘을 밖으로 안내했다.

“밖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

삼디 전자는 스마트폰을 시작할 수 있을 기술 협약 기회를 날려 먹었고, SK 텔레콤은 K폰 공급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다.

* * *

“최 회장님 때문에 나까지 이게 무슨 꼴입니까?!”

이정용은 밖으로 나와서 애먼 최 회장에게 화풀이했다.

“허!”

모든 일의 원인이 본인에게 있었음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정용에게 최 회장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앞으로 SK 텔레콤 일에 관여치 않을 테니 회장님 회사의 일은 본인이 직접 처리하십시오.”

“이봐 이 전무! 지금까지 SK 텔레콤이 벌인 일 중에 우리가 자체적으로 벌인 일이 있었던가!”

지금까지 SK 텔레콤에서 벌인 일들의 시작점은 모두 삼디 전자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덕분에 삼디 전자는 휴대 전화 시장에서 상당한 수준으로 점유율을 높였고 SK 텔레콤은 가입자 수를 늘리며 이익까지 발생하지 않았겠는가.

“그럼 누가 시켰습니까?”

“하!”

오리발도 이런 오리발이 없다.

“강운 그룹 회장 만날 생각은 마시고 돌아가서 회사 정상화 노력이나 하십시오. 삼디 전자라도 살아야겠습니다.”

“이 전무!”

기업과 기업의 관계에서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

.

.

[SK 텔레콤 보이콧에 삼디 전자도 동참]

-강운 전자 K폰이 SK 텔레콤을 보이콧하며 지난 공정위 결정에 힘을 실어 주는 가운데, 삼디 전자 또한 SK 텔레콤에 제품을 납품하지 않겠다고 나서며 시장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가입자 수가 전체 가입자 대비 15% 수준까지 내려간 SK 텔레콤은 향후 기업의 존속까지 염려되는 상황….

와락!

조간신문을 손아귀에서 구겨 버린 최 회장은 장 시작과 함께 하한가로 직행하는 SK 텔레콤 주가를 확인해야 했다.

“더 떨어질 데가 어디 있다고 떨어져!”

바닥을 뚫고 지하로 향하는 주가는 하한가에서도 매수자가 없었다.

* * *

“삼디 전자는 왜 그딴 통신사와 협력을 하셨을까요.”

“담당자를 파악해서 당장 잘라 버릴 생각입니다.”

한껏 자신을 낮춘 이정용은 다시 수안과 마주하고 있었다. SK 텔레콤을 손절했기에 다시 얻을 수 있었던 기회다.

‘스마트폰 기술을 확보해야 해.’

스마트폰 기술을 확보하려면 지금은 강운 전자밖에 답이 없었다.

‘후발 주자라도 되어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스마트폰이라는 시장은 아직 블루오션이다. 오직 단 하나의 회사만이 그 시장을 선도하고 있었다. 여기에 삼디 전자가 따라붙는다면 훗날 역전의 가능성도 있었다. 반대로 너무 늦게 시작한다면 도태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형님. 이제 최 회장도 없으니 편하게 합시다.”

“휴우.”

수안이 형님이라고 불러 주자 그제야 마음을 놓는 정용이다.

“형님을 괜히 불안하게 만들었나 보네. 지난번엔 내가 실례가 많았지.”

“어휴. 실례라니. 아니야. 충분히 이해해. 그럴 수 있지.”

수안은 손사래를 치는 정용을 보며 미소를 보였다.

“삼디 전자에서 동참해 준 덕분에 나도 정치권에 고개를 들 수 있겠어. 나 혼자 SK 텔레콤 망하게 한다고 들고 일어날 기세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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