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헌 or 합헌
“좋은 제안이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룹 총수나 돼서 이유 없이 날 만나자고 하진 않았겠다 싶었지.”
이번 공정위 일이 전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받은 도움이 적지 않았다.
그간 팬탁의 휴대 전화를 판매함에 있어서도 한송 텔레콤은 세기 통신과 비슷한 수준의 혜택을 받아 왔다. 덕분에 통신사 가입자 수가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었다. 수안이 또 좋은 제안이라 말하니 얼마나 더 도움을 주려나 싶은 강 회장이다.
“이전까지 드린 도움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지요. 한송과 강운은 피로 얽힌 가족 아닙니까.”
“하하하. 이전의 도움이 당연하다니 오늘 무슨 얘길 할지 더 기대되는구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걱정이 없을 정도로 좋은 일입니다.”
“호오. 네가 자신만만할 정도라면 기대해도 좋겠지?”
“백부님. 사업 확장 어떻습니까.”
“사업 확장? 그게 무슨 소리야?”
“형님들도 이제 본사로 불러들이시지 않았습니까. 나중을 생각하신다면 지금 이대로는 안 됩니다. 통신업을 확장해서 더 키워야죠.”
시간이 흘러 창수, 창식 형제를 본사로 불러들인 강 회장이다.
본사에 불러들였다고 해서 예전처럼 이사는 아니었다. 휴대 전화 제조사와 대리점을 상대하는 말단 영업 사원이었다. 둘이 그마저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예전과 다르다 할 것이다.
“누가 들으면 한송 텔레콤이 가만있는 줄 알겠구나.”
한송 텔레콤은 확장일로였다. 가입자 증가로 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케이블 사업도 시작하고 있었다.
“고작 그 수준으론 많이 부족하죠. 형들 사이에 재산으로 싸움 나면 백부님이 그 꼴을 어떻게 보십니까.”
“…….”
자식들이 한송 그룹을 두고 싸우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본인만 해도 동생과 상속 분쟁에서 밀려나지 않았던가.
‘욕심 많은 그놈들은….’
분쟁은 필연이었지만, 본인 죽기 전에 어떻게든 결말을 볼 생각이었다.
“아무리 너라도 한송 그룹 일에 참견하는 소릴 듣기는 참 거북하다만….”
“먼저 언짢게 해 드린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좋은 말씀을 드리려다 보니 제가 살짝 선을 넘었습니다. 사업 확장을 여쭤보셔서 당위성을 먼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과는 받지. 네가 한송 그룹 일에 참견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믿겠다.”
“감사합니다. 백부님. 그럼 사업 확장을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한송 그룹 여유 자금이 얼마나 있는지부터 알려 주시겠습니까?”
“한송 그룹의 여유 자금? 그걸 네가 왜 궁금해해?”
수안은 강병모 회장의 노기 섞인 말에도 함께 온 박수겸 사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박 사장님. 얼마나 됩니까? SK 텔레콤 지분을 인수하는 데 사용할 수준의 자금 여유가 있습니까?”
“……!!”
SK 텔레콤이라는 말에 정신이 혼미해진 강 회장 대신 박수겸 사장이 물어 왔다.
“회장님. 지금 SK 텔레콤을 우리가 인수하라고 하셨습니까?”
“네. 한송 텔레콤이 SK 텔레콤을 인수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강 회장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됐다.
“자, 잠깐. 아무리 SK 텔레콤이 6개월간 신규 가입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회사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문제가 되진 않아. 기껏해야 주가나 좀 빠지고 말겠지.”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리면요?”
박수겸 사장은 강운 그룹이 원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회장님. 강운 그룹에서 SK 텔레콤을 무너뜨릴 생각이십니까?”
“백부님이 결정하신다면 제가 기꺼이 돕지요.”
강병모 회장은 이제야 수안이 말한 사업 확장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원하면 강운 그룹이 나서겠다고?”
“아버지가 계시는 동안엔 가족의 일로 그룹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이젠 제가 그룹의 방향키를 잡고 있습니다. 가족이 잘사는 일인데 어떻게 나서지 않겠습니까.”
“…….”
“회장님. 강운 그룹이 도와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번 기회에 SK 텔레콤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수안아. 괜히 널 의심했구나.”
“아휴. 그룹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으시니 당연한 일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방법을 들을 수 있겠느냐.”
박수겸 사장도 수안의 말에 집중했다. 가능하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그 방법을 짐작할 수 없어 무척 궁금했다.
“강운 전자 & 팬탁의 모든 휴대 전화 기종은 앞으로 SK 텔레콤을 통해 가입할 수 없습니다.”
“……!!”
“3개월 후부터 6개월간 가입자를 받지 못하는 SK 텔레콤에 치명적인 일격이죠. 기존 가입자가 대부분 빠져나갈 겁니다. K폰 출시는 벌써 다음 주로 다가왔으니까요. K폰 출시와 맞물려 SK 텔레콤 보이콧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SK 텔레콤 보이콧의 표면적인 이유는 지금까지 담합으로 인한 신뢰 상실이 될 겁니다. 대중들도 충분히 이해할 일이죠.”
대중의 이해와 상관없이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는 공격이 될 것이다. 다섯 개 통신사를 통해 판매해야 할 K폰이 네 개의 통신사로 줄어들게 되니 손해는 확실했다.
“회사 입장에선 상당한 모험이죠. 하지만 이렇게 해서 한송 텔레콤이 거대한 통신사로 성장할 수 있다면 감수할 수 있습니다. 이게 가족이죠.”
사실 K폰의 정상적인 수급이 어려운 상태라 입을 하나라도 줄이면 그만큼 수급이 원활해진다. 여기에 SK 텔레콤까지 잡을 수 있으며 한송 텔레콤 강 회장에겐 보답까지 받을 수 있었다. 수안에겐 이번 일이 일석삼조의 수였다.
“…허.”
강 회장의 눈에도 SK 텔레콤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 사장. 지금 우리 그룹 여유 자금이 얼마나 되지?”
“회사 내 유보자금을 활용하고 나머지를 금융권에서 차입하면 인수 여력은 있습니다. 휴대 전화 가입자 수는 날로 증가하고 꾸준히 통신 수익이 들어옵니다. SK 텔레콤을 완벽하게 흡수하면 금융권 차입을 더 빨리 상환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형님들이 싸우지 않고 오순도순 살 수 있겠어요.”
“응?”
“한송 텔레콤은 이대로 두시고 SK 텔레콤을 계열사로 만드시면 형제가 하나씩 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백부님이 걱정하실 일은 없겠습니다. 아들들이 회사를 하나씩 맡아 경영하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허허. 녀석. 그래서….”
처음 아들들의 재산 싸움을 얘기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회사를 하나 더 사서 확장하면 말끔하게 해결이다.
“수안아.”
“예. 백부님.”
“이런 선물을 그냥 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한 그룹을 책임지는 사람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룹을 움직이면 안 되는 거야. 마땅한 보상이 필요해.”
이 말을 듣기 위해 지금까지 강병모 회장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준 수안이다.
“저도 그냥 해 드리고 싶지만, 그룹에서 보는 시선이 많아 부담스럽긴 했습니다.”
“뭐가 좋을까….”
수안은 보상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말을 돌렸다.
“그룹 유보 자금 대부분이 이번에 사용되어야 할 겁니다. 금융권 차입도 좋지만, 부족한 부분을 사재로 채울 생각도 하셔야 합니다. 괜히 무리하다가 그룹이 휘청거리면 큰일이죠.”
“사재?”
수안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강 회장의 사재에 있었다.
“총수가 사재를 털어서 사업 확장에 투자한다는데 누가 반대할까요? 정치권에서도 환영할 만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박수겸 사장이 적절하게 추임새를 넣어줬다.
“오. 안 그래도 그 부분이 염려됐는데, 회장님이 사재를 출연하시면 SK 텔레콤을 무리하게 인수한다는 소리도 할 수 없겠습니다. 차입을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건물? 땅? 뭐가 좋을까.”
“건물 살 사람 찾다가 언제 자금을 융통하겠습니까. 땅으로 하시죠.”
“땅? 건물보다 땅이 더 오래 걸리지 않을까?”
“제가 사 드리면요?”
“여기까지 도와주려고?”
“적당한 값에 넘겨주시면 백부님이 보상을 주셨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허허. 녀석.”
“공주시와 연기군에 상당한 땅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행정 중심 복합 도시 세종특별자치시.
훗날 정부 청사들이 들어서고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설 황금의 땅이다. 강병모 회장은 예전부터 이곳에 많은 땅을 갖고 있었다. 상속받은 땅이 대부분이지만, 행정 수도 이전에 관해 파악하고 추가로 매입한 토지도 상당했다.
지금은 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에 내놓았던 공약인 행정 수도 이전을 뒤집기 위해 헌법 재판소까지 등판한 때였다. 안 그래도 불안하던 차에 토지를 사겠다고 하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거긴 미래가 불투명한 땅이잖아.”
“묶인 돈이죠. 오래 기다리면 빛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될지 모르잖아. 한신당에서 제대로 물고 늘어졌어.”
한신당의 뒤집기는 헌법 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결실을 볼 수 있다.
강병모 회장의 말대로 현재는 향후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정리하셔야죠. 우선은 돈이 급하니 토지를 빨리 처리하시려면 더블 스타에 매각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다른 건물이나 땅도 매각하실 물건이 있으면 더블 스타에서 처리해 줄 겁니다. 더블 스타 김현성 사장에게 지시해 두겠습니다.”
핵심은 위헌 판결에도 밀어붙일 현 대통령의 뚝심을 수안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2003년 ‘신행정 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 법안’은 신행정 수도 이전이 아닌 ‘신행정 수도 후속 대책을 위한 연기, 공주지역 행정 중심 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으로 2005년 대체되어 추진된다.
“이러면 내가 운모 볼 낯이 없는데….”
이 상태라면 조카인 수안에게 너무 많은 혜택을 받는다. SK 텔레콤을 인수할 기회를 받고 그에 필요한 추가 자금까지 도움을 받게 된다.
정치권으로 뛰어든 동생 강운모에게 한 소리가 아니라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이 염려되는 강 회장이다.
“정 마음에 걸리시면 백부님이 따로 용돈이나 챙겨 주십시오. 아버지께는 제가 좋게 포장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족이 잘되는 일이니 아버지도 별말 없으실 겁니다.”
현재 평당 10만 원 안쪽으로 거래되는 토지는 15년 뒤에 평당 천만 원 이상으로 상승하게 된다. 게다가 수안은 세종시가 들어설 땅의 시세차익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는 아파트와 건물이지.’
보유한 땅에 아파트를 지어 놓기만 하면 두 배, 세 배로 올라 버리는 곳이다. 강운 건설은 세종에 가장 많은 땅을 확보해 가장 많은 아파트와 빌딩을 짓게 될 것이다.
“…….”
강병모 회장은 강운 그룹 회장에게 용돈을 주면 대체 얼마나 줘야 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BE 인베스트먼트로 인해 매년 포브스지 부호 순위 1위에 오르는 조카였다. 세계에서 가장 재산이 많다는 조카가 아닌가.
“부담 갖지 마세요. 백부님. 하하.”
“…….”
부담을 안 갖고 싶어도 심각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주시와 연기군에 있는 땅을 넘기고 나서 행정 수도 이전이 위헌으로 결정되어 버리면 더할 것이다.
“혹시 모르니 현금 부분은 이번 행정 수도 판결이 나오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자꾸나.”
행정 수도가 합헌으로 결정되면 부담이 덜하리라 예상했다.
“아직 SK 텔레콤이 무너지기까지 시간이 있으니 그때까지는 괜찮겠습니다.”
위헌 판결을 알고 있는 수안과 그 사실을 모르는 강병모 회장의 차이였다.
헌재에서 행정 수도 이전이 위헌으로 결정되면 부담감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박 사장님은 미리 지분을 확보하셔야겠습니다. 벌써 SK 텔레콤 주가가 쭉쭉 빠지고 있지만, SK 텔레콤만 K폰 공급에서 제외된다는 소식이 주식시장에 전해지면 저점은 더욱 내려갈 겁니다.”
“정확한 시기를 알면 사전에 준비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총알 확보가 급선무겠습니다.”
“그렇죠. 한송은 총수님의 유보 자금과 사재 출연으로….”
이후는 어떻게 SK 텔레콤을 잡아먹을 것인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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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과 헤어져 한송 그룹 회장실로 박 사장을 부른 강 회장은 말이 없었다.
“…….”
“염려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강운에서 도와주는 이상 SK 텔레콤은 한송 그룹에서 품게 될 겁니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이번 판결…. 헌재에서 어떻게 될까?”
“판단을 내리긴 어렵지만, 지금까지는 반반입니다. 저희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현금을 마련해야 합니다. 강 회장이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는데 부동산을 약간 저렴하게 넘기는 정도로는 보답이 되지 않습니다.”
“합헌으로 결정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부질없는 바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