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 거래
아버지는 지금까지 쌓았던 인맥과 자금을 무기로 훌륭하게 정치권에 안착했다. 여당에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던 검찰도 강운 그룹 전 총수의 존재감에 무딘 칼로 무기를 바꿨으며, 여당을 공격하는 일에 앞장섰던 언론사는 이제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몰라 건강에 관련한 기사나 지방의 사건 사고를 알리는 기사나 올리는 중이다.
야당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다. 한신당에서 강운 그룹의 돈을 받아 보지 않은 놈이 없었다. 여태 대통령과 여당을 잔인하게 후벼파던 그들도 강운모의 등장 후 공격의 고삐를 헐겁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당할 공격은 다 당한 기업이 있었으니 바로 대현 그룹이다.
“…형님.”
정영수 대현 그룹 총괄회장은 동생 정영호를 앞에 두고 있었다. 대북 송금과 정치자금을 뿌린 일로 구속되어 형이 확정되었고, 지금 정영수 회장은 동생을 면회 온 참이다.
“버텨라. 오래 걸리지 않아. 여당이든 야당이든 특별 사면이 되도록 노력해 보마.”
수안의 말대로 형제들을 대했던 탓일까. 동생들을 챙길 줄 아는 형처럼 보인다.
“이제 회사는 걱정하지 마. 네 아내를 그룹 회장으로 추대하마. 나는 대현 자동차로 만족이다.”
“그건 안 됩니다! 형님이 대현을 이끌어야죠.”
“난 내 능력을 알아. 비록 아버지가 계시던 때에 비해서 대현이 쪼그라들었어도 대현 그룹은 거대한 기업이다.”
IMF 이후 사업 분야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대현은 거대한 공룡이다. 정영수는 이제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는 듯했다.
“난 힘들어. 그렇다고 네가 돌아와야 할 대현 그룹의 회장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있으면 괜히 그룹이 혼란할 수 있다. 제수씨가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그룹을 단단하게 이끌어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미래를 봐야 해.”
“…….”
사실 정영수 회장은 대현 건설이 거느린 중심 그룹에서 미래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회장 자리마저 내던지는 것이다. 겉보기에만 우애 좋은 형제 보였을 뿐이다.
‘네가 없이 쪼그라든 대현 그룹은 나중에 내 차지가 되겠지.’
이미 자동차 사업부는 분리가 거의 끝나가는 참이었다. 기화 자동차와 대운 자동차에 밀려 큰 이익을 내진 못하지만, 해외에 눈을 돌린 덕분에 외형은 확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거기다 다른 형제들도 저마다 저들의 회사를 요구하고 있었기에 정영수가 나서지 않아도 그룹은 사분오열될 것이다.
“형님!!”
정영호도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 자신의 아내가 회장을 맡아 봤자 대현 그룹의 미래에 하등 도움이 되질 않는다. 형제들에게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큰 형님이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어야 그나마 대현이 쪼개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허. 큰 소리 내지 말고.”
“형님! 형님이 맡아 주셔야 한단 말입니다!”
“내가 네 사람을 모두 쳐 내도 말이냐? 난 시작하면 끝을 본다. 네가 돌아왔을 때 널 반길 사람이 없을지도 몰라.”
“…….”
정영호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다.
“거봐라. 그건 또 싫잖아. 네가 없는 사이에 네 사람을 잘 챙겨 주고 그룹까지 성장시켜서 한입에 털어 넣을 수 있게 만들어 달라는 소리냐? 네가 생각해도 참 웃기는 소리인 건 알지?”
“하지만 형님! 이렇게 가다간 대현 그룹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대현이 망할 수도 있어요!”
“아버지도 자식 보는 눈은 없었나 보다.”
“형님. 아버지 얘기까진 너무 하신 거 아니오!”
“멍청아. 아버지는 맨손으로 대현을 일으키셨다. 그런데 우린 각자 거대한 기업까지 갖고 있어. 우리가 다 같이 성장하고 나서 결합하면 대현 그룹은 더 커지지 않겠느냐!”
얼핏 듣기엔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기업을 일으키던 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 흩어지면 대현의 기업들은 그저 그런 기업의 하나가 될 뿐이란 말입니다!”
영호의 외침에도 영수는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난 이만 가 보마. 내가 교도소에서 몇 년 살아 봤는데, 별거 아니다. 시간 금방 지나가.”
“…대현은 이제 끝장날 겁니다.”
“대현 중공업과 대현 자동차가? 아니면 대현 상선? 아니지. 아니야. 대현 건설만 조금 힘들겠지.”
“…….”
이번에도 정영호는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위험한 회사는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현 건설이었다. 대현 건설은 영호가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한 회사였다. 나머지는 자립만 하면 스스로 얼마든지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넌 정말 끝까지 이기적인 모습만 보여 주는구나. 그래서 아버지가 경영자에 어울린다고 하셨는지도 모르겠어. 넌 네가 있을 곳에 있어. 난 밖에서 내 회사를 경영할 테니까.”
“살려 주십시오. 형님.”
“…….”
사람을 한참 잘못짚었다.
정영호가 수감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바로 정영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강운모 회장에게서 받은 자료를 한신당에 전해 준 사람이 바로 정영수 회장이었다. 덕분에 정영호는 완벽한 증거 자료와 함께 대북 송금의 주범으로 특정되었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느냐. 경제 사범은 특사로 나오기 쉬워. 그러니 기다려봐. 잘하면 이번 대통령 임기 끝에는 가능하겠지.”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 대통령에게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길어지면 언제까지 길어진다는 말인가.
“그래도 그룹이 휘청거리면 내가 돕겠다.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있어. 진짜 간다.”
“형님. 부탁하오! 그룹을 부탁하오!”
뒤돌아선 정영수는 비틀린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빵에서 푹 썩고 나와라. 그 안에 내가 알아서 한다.’
그룹이 휘청거리면 돕겠다는 말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팔아먹어야 할 사업 분야부터 정리하고 유동 자금을 대현 자동차로 가져와야 했다.
‘우선 4년 연속 적자를 낸 하이닉스부터 정리해야겠군.’
일전에 강운 그룹 강운모 회장이 원했던 물건이었다.
.
.
.
며칠 뒤 정영수 회장은 수안과 따로 만났다. 인수 의향을 묻기 위함이다.
“하이닉스…. 얼마에 가져갈 생각인가.”
정영수 회장은 잔뜩 무게를 잡고 목소리를 깔았다.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적자투성이에 미래도 안 보이는 하이닉스를 팔고 싶다면서 얼마요? 차라리 저한테 돈을 주고 가져가라고 하셔야죠.”
“뭐, 뭐?”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지금까지 하이닉스에 쌓인 결손금이 얼만지나 아십니까? 12조라고요! 거기다 작년 매출 3조 6천억에 손실만 2조 3천억이 넘는 회사 아닙니까. 그런데도 하이닉스를 돈 받고 팔겠다고요? 나니까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욕하고 나갔어요!”
“이, 이봐. 강 회장.”
“그리고 하이닉스를 왜 대현 그룹에서 팔아요? 지분은 은행권에서 40%가 넘게 들고 있는데.”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거지! 은행은 적당한 시기에 다 팔아먹고 내뺄 놈들이고. 진짜는 대현이잖아. 그건 강 회장도 잘 알고 있었잖아. 이제 와서 왜 그래?”
“상징은 무슨….”
“강 회장. 정말 어렵겠어?”
“하이닉스를 가져다 어디다 써요. 우리가 반도체를 안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몇 프로 되지도 않아. 대현 그룹이 보유한 지분을 전부 넘겨주면…. 부탁 좀 하세.”
“왜 그러시는데요? 동생분도 없으니 이제 정 회장님 세상이잖아요?”
“나만 내 세상이겠어? 다른 형제들도 난리야. 아버지도 없지, 거기다 중심 잡던 녀석은 교도소로 들어갔지, 나는 만만하지…. 아. 이 얘긴 빼자.”
조금 늦은 대현가 형제들의 반란이다. 정택주 회장이 생전이라면 모를까 이번 반란은 막을 사람이 없었다.
“중공업이고 상선이고 다 들고 튀려고 해. 나도 자동차 들고 분리할 생각이니 다른 놈들에게 뭐라고 할 일은 아니야.”
“그 와중에 하이닉스를 팔아서 한몫 잡고 나가시겠다?”
“큼큼.”
“…….”
그룹이 공중에서 분해되는 중인데도 자신의 몫을 찾는 정영수 회장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지분을 들고 있으면서?”
“아까도 말했지만, 대현이 지분을 넘기면 상징적인 의미가….”
“축 늘어진 정 회장님 상징은 집에 가서 목욕하실 때 거울로 보시고요.”
“아직 안 늘어졌어! 나 쌩쌩해!”
“정 회장님이 제 아버지뻘이거든요? 늘어져도 누가 뭐라고 안 해요.”
“지저분한 농담은 그만! 살 거야 말 거야!”
“에효. 돈이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내가 필요한 만큼 주려고?”
“제가 인수해도 정 회장님의 대현 자동차로 가져가기 어렵지 않습니까. 지분을 가진 지주 회사에서 아무리 빼내 봤자 얼마나 되겠어요? 차라리 저한테 따로 받고 대현이 가진 하이닉스 지분은 조금 더 가볍게 넘기세요. 그래야 회장님은 얻으려 했던 유동 자금을 확보할 수 있고 강운 그룹에서도 제가 배임으로 걸리지 않죠. 하이닉스를 비싸게 주고 사면 배임이지 뭐겠어요?”
“그럼 내가 제시를….”
“아! 참고로 하이닉스 자본이 2조 7천억입니다. 대현에서 지분 100%를 들고 있어도 저거 이상 못 줘요. 그리고 작년 순손실이 2조 3천억, 그 전년에는 1조 7천억 손실, 또 전에는 5조 손실…. 말하다 보니 이상하네. 이걸 나보고 사라고요?”
“왜 또 그래. 내가 제시를 한다니까 그러네.”
“됐고요. 보유 지분이 몇 프로든 1조 이상은 못 줍니다. 당연히 회장님께 드릴 몫은 여기서 차감해서 계산합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하세요.”
“그건 너무 하잖아!”
“안 사면 그만이죠.”
“강운모 회장이 산다고 했었단 말이야!”
“그건 전 회장님 말씀이고요. 현 회장인 저는 다릅니다.”
“이봐. 강 회장. 그러지 말고 딱 세 장만 더 쓰자. 그걸로 나 주면 되지.”
지금 이 대화는 시장통에서 물건값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아니라 대현 그룹 총괄 회장과 강운 그룹 총괄 회장의 대화였다.
“박박 긁어모아도 지분이 얼마 안 되는 모양이네요?”
“한 20% 되던가….”
실제로는 10%에서 조금 더 많은 수준일 것이다.
“지분값은 더 올릴 필요 없겠네요. 당장 시중에서 작업 좀 치면서 사 모아도 뭐….”
똥 씹은 얼굴을 한 정영수 회장의 심정과 달리 수안은 상당히 많이 쳐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 깎은 게 어디냐고!’
“앞으로 몇 년이나 적자를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데 이 정도면 많이 쳐줬죠. 잠깐. 그런데 아까 세 장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대현 자동차에서 원하는 자금이 세 장? 3천억? 사~ 암~ 천억?!!”
“아, 아니. 사실 2천억이 필요…. 아. 앉아. 앉아. 가긴 어딜 가려고 그래.”
수안이 벌떡 일어나 나가려고 하자 정영수 회장이 화들짝 놀라서 붙들고 있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죠! 저는 갈랍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천억. 좋다. 이거만 나한테 넘기면 내가 하이닉스 지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1조에 강 회장에게 넘기는 방향으로….”
“어허. 밑장은 왜 빼세요? 정 회장님 드릴 1천억 빼고 9천억.”
“그럼 진짜 1조 원만 쓰겠다고? 강운에 돈 많잖아?”
“누가 강운 그룹이 산다고 해요? 더블 스타에서 살 건데요?”
“…더블 스타에 그만한 돈이….”
‘있죠. 그것도 충분히.’
세기 통신도 있고 다움과 네이보도 상장한 회사다. 분리해서 강운 전자로 넘기긴 했지만, 팬탁도 더블 스타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 외에도 쟁쟁한 회사가 가득했다. 여력은 충분하고 넘치지만, 지금은 가격을 깎아야 할 때였다.
“어차피 강운 그룹엔 강운 전자가 있으니 하이닉스는 더블 스타에서 먹는 것이 보기에도 좋습니다. 더블 스타가 자금은 부족해도….”
강운 그룹은 비대하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물론 더블 스타에서 먹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겠으나 강운 그룹이 외형만 늘리고 있다는 비판에서는 조금 벗어날 수 있고, 사람들과 언론의 관심에서도 약간 멀어질 수 있었다.
“자금이 부족하면 무슨 소용이야? 그러지 말고 그냥 강운 그룹에서 사는 편이….”
“하! 회사가 돈이 부족하지 내가 부족합니까?”
강수안 앞에서 돈 많다고 이름을 내밀 만한 사람이 국내에 어디 있던가.
“…….”
“쿨 거래였어요. 아주 감사히 생각합니다. 오늘 식사는 제가 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