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출사표 (232/304)

출사표

현 정권을 공격하고 싶어 안달 난 수구 언론들의 천태만상을 가만히 두고볼 수 없었던 수안이다.

몇몇 언론의 경우 수안이 직접 힘을 발휘해도 전혀 들어먹질 않았다. 결국 네이보와 다움이 갖가지 이유를 들어 문제가 있는 기사가 대중에 알려지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또한 정부의 공로가 있는 일은 그때그때 알려지도록 손을 써왔다. 특히 외신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래도 거짓으로 기사를 꾸며내진 않았으니 사실적인 정보가 대중에게 전달된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예. 대통령님은 지금 전 방위로 공격받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막고 있는 댐이 절반 이상을 막아내고 있습니다. 언론이 무슨 말을 하건 일희일비하실 것 없습니다. 대통령님이 가는 방향이 맞습니다. 그러니 밀고 나가십시오. 상대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물어뜯고 찢어 버리십시오.”

“허…. 이거 전 대통령께서 대단한 우군을 물려주셨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믿음직한 우군을요.”

“불행하게도 내부의 적들도 같이 물려주셨죠.”

“끄응.”

동교동계로 대변되는 전 대통령의 세력들이 당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당과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는 세력이 박재문이 대통령에 등극하고 나서 신당을 창당해 기존 당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소수 정당과 다수 정당을 가리지 않고 모인 이들은 내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당 의장으로는 그 이상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

‘노인들은 투표하지 말라는 사람이 어딨어? 그들을 품에 안아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줄도 모르고….’

수안은 이들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 줄 사람도 알고 있었다.

“대북 송금 건은 적당히 마무리하십시오. 어차피 끝내야 할 시기는 한신당에서 정할 겁니다. 대통령께서는 나라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답하기 곤란한 일이라 박재문은 언론의 일을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언론이 너무 약하게 때린다 싶었더니…. 큰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조만간 저보다 더 든든한 분이 등장합니다. 대북 송금 건은 거기에 묻혀 버릴 겁니다.”

“누구를 말함입니까?”

“강 회장님이 출사표를 던지실 겁니다.”

“……!!”

강운모 회장이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었다. 하물며 정치에 직접 발을 담근다는 말이 전해질 리 없었다.

“어, 어느 당으로….”

“당연히 한신당은 아닙니다. 안 그래도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 한신당으로 가면 재벌 이미지를 탈피하기 어렵습니다. 창당한 신당으로 가실 겁니다.”

강운모 회장은 수안과 논의해 이번에 창당한 우리당으로 소속당을 결정했다. 조만간 회장직을 내려놓고 지분도 모두 정리할 예정이다.

“국내 최고 부자(父子)가 날 도와준다니 기운이 나는군요.”

“돕기야 하겠지만, 무작정 돕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분의 정치 신념에 맞는 일은 도울 것이고 아닌 것은 온 힘을 다해 반대하실 테니까요.”

“…….”

강운 그룹의 총수이고 BE 인베스트먼트를 주무르는 수안을 아들로 둔 인물이 온 힘을 다해 반대한다면 누가 감히 이겨낼 수 있겠는가. 앞으로 당내의 의견은 강운모 회장의 의중에 따라 방향을 정하게 될 것이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회장님은 합리적인 분입니다.”

“엄청난 소식이라 사람들도 쉽게 믿지 않겠습니다.”

“며칠 동안 언론에서 회장님 이름을 시끄럽게 불러 댈 겁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 국민을 위해 애써온 존경할 만한 행보, 국민을 위한 미래 비전까지 낱낱이 전해지겠죠.”

언론의 힘은 이럴 때 쓰려고 준비했다. 방송과 인터넷이 힘을 모으면 사람 하나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 게다가 없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낼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약간의 조미료를 첨가할 뿐이다. 개혁 정당에 신선한 얼굴, 거대 기업을 일궈낸 살아 있는 신화나 다름없는 강운모 회장은 언론의 마사지와 함께 대중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회장님은 내년 총선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실 겁니다.”

“…얘기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데, 한신당은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기도 힘들군요.”

강운모 회장이 같은 당으로 출마한다고 하는데도 그 반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온다. 한신당 입장에서는 암울하다 못해 절망적인 소식일 것이다.

이전 정택주 회장의 출마와는 결이 다르다. 그는 정치권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차라리 자신이 해 보겠다며 정치에 뛰어들었던 사람이었다. 대현 그룹의 직원들과 가족들을 믿고 당선을 자신할 정도로 감각이 무딘 사람이기도 했다.

지금 강운의 힘은 당시 대현과 비기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고, 그 충성도 또한 대현과 비교하기 어렵다. 실제 강운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들과 그 가족이라면 강운 그룹에서 강요하지 않아도 강운모 회장을 선택할 것이다. 강운모 회장이 선택한 정당이라면 강운 그룹 계열사가 위치한 지역에서 몰표를 받을 수도 있었다.

“괜찮을 겁니다. 미리 얘기해 뒀거든요.”

“한신당에 미리 통보했다는 말입니까?”

“한신당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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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서울시장에 당선되어 서울을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는 이현창에게 통보했다. 청계천을 갈아엎고 있었고, 대중교통체계를 전면 개편하고 있었으며 시민들이 쉴 수 있는 숲을 조성하는 중이다. 거기다 곳곳에 광장을 만들고 그린벨트를 해제해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었다. 당연히 역점 사업 대부분은 강운 건설에서 도맡아 처리하는 중이다.

‘그 양반이 어찌나 화를 내던지….’

아직도 귀에 까랑까랑한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다 퍼줬는데 한신당에 안 오고 우리당으로 간다며 핏대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화도 오래가지 않았다.

“차기 대선. 우리당에 강 회장님이 계시면 확실하게 밀어드릴 수 있어요.”

“아….”

“회장님이 신당에서 의장을 차지하지 못할 것 같습니까? 거기 의원들치고 회장님이나 제 돈 안 받아 본 의원이 없는데? 돈을 빼고라도 회장님 인기면 불가능이 없어요. 다음 대선에 엉뚱한 사람을 대선으로 보내 주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선배님을 봉황좌에 앉히는데 이런 수고까지 하는 사람이에요. 선배님은 이런 내 맘도 모르고….”

“허허. 후배. 많이 화났나?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후배 말은 끝까지 들어 봤어야 하는데 말이야.”

“의심을 하덜 마시라고요. 의심을!”

“아하하. 미안함세. 오늘은 내가 막걸리라도 살까?”

“서울시청 근처에 맛집이 많다면서요? 앞장 서봐요.”

“흐흐흐. 가자.”

둘은 한산했던 길도 복잡하게 만들었다. 서울시장을 보좌하는 인물이 가득, 강운 그룹 부회장이자 BE 인베스트먼트 회장인 수안을 경호하는 직원들도 길가에 가득했다. 그래도 맛집을 포기할 순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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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파전 참 괜찮았는데….’

지금은 막걸리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던 파전 맛을 기억할 때가 아니었다.

“한신당은 아니고 일부에만 알렸습니다. 어쨌든, 지금 대통령께서 한신당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상대 당을 사람으로 취급하시면 당하기만 하실 겁니다. 인격체로 대우해 주는 건 상대가 사람일 때나 가능한 겁니다.”

“그래도…. 나름 똑똑한 사람들 아닙니까. 다들 나라를 위해서….”

“누가요? 누가 나라를 위해서 일합니까? 국회의원이 나라를 위해서 일합니까? 그런 의원은 극소수라고 말씀드리죠. 아주 확실하게 답을 드릴 수 있거든요.”

지금까지 강운 그룹과 수안의 돈을 받아먹지 않은 정치인이 있었던가?

주려고 한 사람은 무조건 받았고 아예 줄 생각도 없었던 의원들은 기회조차 없었으니 성공 확률은 100%라고 해야 했다.

“강 부회장이 정치인에 맺힌 게 많은 모양입니다. 그려. 허허허.”

“대통령께서 손해만 보고 사실까 걱정이라 그랬습니다. 무례하게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

내년 한신당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제출되고 국회에서 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낸 다음 표결을 통과시킨다. 헌법재판소는 기각결정을 내리겠지만, 그사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은 직무가 정지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물론 이 문제로 인해서 내년 총선에 우리당이 좋은 결과를 얻게 되지만,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에게 탄핵은 과도한 처사였다.

‘덕분에 국민이 좋은 걸 알았지.’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 소득이 있긴 했다. 불과 13년 뒤 다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이후 헌법 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탄핵이 가결되었다.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이번 생에는 그런 일이 없을 테지만….’

이미 해당 정치인은 이현창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졌다. 향후 정치인으로 얼굴을 드러낼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기억해 주십시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아는 법입니다. 게다가 대통령의 호의를 약해서 굽혔다고 판단하는 상대라면 봐줄 필요 없습니다.”

주요 정치인이 이현창에 의해서 가지치기를 당했지만, 여전히 적폐라고 불릴만한 정치인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렵다. 상대가 꼼수를 쓴다면 이쪽에서도 꼼수로 상대해 줘야 맞다.

“…똑똑한 강 부회장의 말이니 꼭 기억하겠습니다.”

“회장님이 정치권 출사표를 던지기 전에 제가 회장에 올라설 겁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통령님.”

아버지 강운모 회장이 직을 내려놓고 지분을 던지면 그 후임은 당연히 수안이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강 회장.”

“돈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 주십시오.”

미국 정부에 배당으로만 1천억 달러를 뜯겼는데, 한국 정부에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소한 미국에 준 돈의 절반은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박재문 대통령이 전투기만 얘기했음에도 잠수함, 이지스함에 탱크와 미사일까지 언급한 것이다. 그래야 대충 5백억 달러가 될까 싶었다.

‘더 필요하면 더 내놓고.’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국내외 재단에 막대한 기부를 집행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에 지원하는 돈도 그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대한민국에 강 회장이 있다는 게 정말 든든합니다.”

“저야말로 대통령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수안은 박재문과 악수하고 안내에 따라 청와대 지하 벙커를 나왔다.

‘여기는 앞으로 걱정 없겠어.’

* * *

기자들을 만나기 전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강운모 회장 앞에는 수안이 있었다.

“아버지 최고로 멋있습니다. 뉴스에 아버지 얼굴 나오면 사람들이 다 찍어 줄 겁니다.”

“풋. 웃기지 마. 인마.”

“제가 언제 헛소리하던가요? 기자들 기다립니다. 아부지 출동!”

“어쭈? 이제 회장 아니라 이거냐?”

회사 지분을 정리하고 수안에게 회장직을 물려준 강운모 회장이다.

“아버지는 회장님 자리에 너무 오래 계셨어요. 이제 제 아버지로 돌아오실 때입니다. 흐흐.”

수안은 요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왜 진작 정치인이 되지 않으셨나 싶을 정도였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면 걱정될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이 없었다. 법률을 포함 정치적 언어와 각국의 외교 관계까지 두루 공부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모습이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배움과 도전을 즐기고 계신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얼씨구? 애비 떨어지라고 고사 지내냐? 회장 자리 받았다 이거야?”

“절씨구라고 대답해 드리면 됩니까? 얼른 나가세요. 이러다 늦겠어요.”

“다녀오마.”

“옙! 의원님.”

“김칫국은 마시지 말고!”

“하하하.”

아버지는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아버지. 잘되실 겁니다.”

오늘 아버지의 뒷모습은 완벽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멋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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