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이 지다 (228/304)

별이 지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수안은 익숙한 얼굴의 상주들과 맞절을 하고 일어났다.

옆에는 강운모 회장도 함께하고 있었다.

“어찌 이리 급하게 가신단 말인가.”

이미 작년에 건강을 이유로 명예 회장직마저 내려놓았던 정택주 회장의 장례식이었다.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셨지. 우리도 예상치 못한 일이네.”

“저런. 다들 상심이 크겠어. 정 회장도 일 보시게. 손님들은 내가 상대하지.”

아버지는 본래 정택주 회장과 그리 왕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리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오늘 장례식장에 온 것도 고인을 생각했다기보다 장례식장에서 만날 정·재계 인사들을 위함이었다.

재계의 거목이 쓰러졌기 때문인지 오는 사람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았다. 수안은 아버지와 함께 자리에 앉아 여럿을 만나 인사하고 아버지와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손님들을 만나고 조용한 자리에 부자(父子)가 남았다.

“정 회장이 앞으로 할 말이 많겠어.”

“어떤 정 회장 말입니까. 저들이 전부 회장입니다.”

대현 자동차 그룹 회장이자 대현 그룹 공동 회장 정영수, 대현 건설 회장이자 대현 그룹 공동 회장인 정영호, 대현 중공업 회장 정영준, 대현 백화점 그룹 회장 정영근 등. 정택주 회장의 자식들은 전부 회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누구든. 그래서 더 문제지.”

“예. 공동 회장 자리에 둘이나 있으니….”

정택주 회장이 임명한 대현 그룹 회장이 둘이다. 정영수와 정영호 외에도 다른 자식들은 자신들의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네가 보기에 그는 어떠냐.”

수안과 자주 얼굴을 보는 정영수 회장을 말함이다.

“상대하기 좋습니다. 재미는 없어도 강운의 미래를 위해선 그가 낫습니다.”

정영호 회장보다는 정영수 회장이 상대하기 편했다. 그는 딱 예측된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수안이 예상치 못할 혁신은 감히 시도하지도 못할 상대. 실로 쉬운 상대였다.

“그럼 우린 누굴 밀어줄까.”

“회장들 전부를 밀어줘야죠.”

거대할수록 상대하기 어려워진다. 게다가 강운 그룹과 겹치는 부분이 많으니 미리 갈라놓고 상대하면 쉽게 먹어 치울 수 있었다.

“내 생각과 같구나.”

“하지만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형제는 아버지가 상을 당했음에도 서로 반목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형님. 강운 그룹은 좀 멀리했으면 좋겠어.”

“뭐 인마?”

“저들은 승냥이야. 아버지까지 없으니 우릴 언제 공격할지 모른다고.”

“이젠 내가 있다. 대현은 내가 지켜.”

“…우리가 공동 회장이라는 걸 기억해 줬으면 좋겠는데?”

예전 수안이 일러 줬던 방법은 정택주 회장이 죽으며 쓸모없어졌다. 이젠 강한 놈이 모든 것을 차지할 때였다.

“이제 단독 회장이 필요해졌어. 아버지가 안 계시니 구심점이 있어야 해. 긴급 경영자 협의회를 소집해야 할 것 같다.”

“동감이야. 다음 경영자 협의회에서 날 밀어줬으면 좋겠어.”

“…영호야. 괜히 손님들께 이상한 모습 보이지 말자. 지금은 아니다.”

“형님.”

“내가 오랜만에 큰 소리를 내야 조용하겠어?”

“…….”

예전 그 표정 그대로의 영수가 영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동자 속에서 불길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다.

“형이 많이 참고 있다. 그러니 더는 긁지 마라.”

“…손님께 가 볼게.”

둘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강운모 회장도 수안에게 말했다.

“손도 안 대고 코를 풀겠구나.”

“대현 건설이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곧 부도를 맞고 채권단으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저런. 이렇게 아쉬울 데가.”

강운모 회장은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아쉽다고 말하는 중이다.

“아버지. 여기 상갓집입니다. 표정 관리 좀….”

“흠흠.”

“건설은 못 먹는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노릴 회사는 건설이나 금융이 아닙니다. GL 반도체가 빅딜로 챙겼어야 할 대현 전자였는데 오히려 먹혀버렸죠.”

“구 회장이 전경련 회관에 오지도 않겠다고 하더군. 단단히 마음이 상했지. 장례식장에도 안 올 거야.”

대현이 이번 정권에 많은 지원을 한 만큼 보답을 받은 것이다.

GL 그룹 입장에선 당연히 화가 머리끝까지 날 일이었다.

“그 반도체를 저희가 먹어야 합니다.”

“하이닉스?”

이미 주가가 액면가 밑으로 떨어진 회사였다.

“잘 주워 담고 있죠.”

“수안아. 움직이면 움직인다고 말을 하고 움직여야지.”

“BE가 움직이고 있거든요. 물밑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어서 아무도 모릅니다.”

“저 치는 팔라고 하면 팔겠지?”

“예. 이미 하이디스도 우리 품에 들어왔습니다. 하이닉스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반도체는 우리가 먹어야 합니다. 그는 적당한 당근을 제시하면 넘어올 사람이죠.”

“큼큼.”

강운모 회장은 얼굴을 주무르며 웃는 얼굴을 감췄다.

“이제 가자. 있을 만큼 있었다.”

“예. 아버지.”

강운모 회장은 수안과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정영수 회장에게 줄 당근을 받았다.

“대북 송금 자료?”

“…예. 정택주 회장님이 돌아가셨다지만, 정영호 회장이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원장님이 따로 챙겨 주셨습니다.”

이현창이 국정원에서 파악해 챙겨 준 자료였다. 이번 정권의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는 정보였지만, 직접 쓸 수는 없었다. 자신이 국정원에서 일하면서 연루된 것도 있었고, 차차기를 노리는 이현창에겐 관련되지 않을수록 좋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시점에 맞춰 이현창이 국정원에서 나온다고 했다.

“허! …대현 상선이 연루되어 있었어. 이걸 한신당에 가져가면 형제 등에 칼을 꽂는 일이 될 텐데….”

“대현은 강운과 다릅니다. 저는 제 형제들 등에 칼이 날아오면 몸으로 막겠지만, 저들은 형제를 방패막이로 사용하고도 남습니다.”

“그럼 이걸 왜 내게 주는 거야? 네가 써먹어도 되잖아.”

“굿캅 배드캅 전략입니다. 아버지는 한껏 흔들어 주시고 저는 살랑살랑 부채질하겠습니다. 물론 저는 그 정보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죠.”

정영수 회장이라면 어찌해야 할지 감도 못 잡고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 자명했다.

“이러다 정영수가 그룹을 차지하진 않을까?”

“지분도 없는데 무슨 수로요. 절대로 못 합니다.”

“네 입에서 절대가 나왔으니 확실하겠지. 좋다. 조만간에 내가 만나 보지.”

“예. 저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래 걸릴 일입니다. 하이닉스를 조금 더 적자에 허덕이게 두시면 가격은 알아서 떨어집니다.”

“…하여튼 너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야.”

아들의 성정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가족에겐 적도의 햇볕처럼 뜨겁고 남에겐 북극의 바람처럼 차가웠다.

“싸게 사면 좋잖습니까. 사서 적자부터 시작하면 꼴 보기 싫기도 하고요.”

“네 마음대로 해. 나는 이 자료를 적당하게 넘겨줄게.”

“예. 아버지.”

정택주 회장의 발인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자료를 넘기며 훗날 하이닉스를 인수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고, 정영수 회장은 어차피 자신이 관리하지도 않는 하이닉스를 선심 쓰듯 넘기겠다고 말했단다. 그렇다고 말로 넘어가실 아버지가 아니다. 구두 계약이 아닌 서류 계약, 사전 인수 계약에 사인까지 받아 오셨단다.

그리고 수안의 예상대로 정영수 회장이 만남을 요청했다.

“강 부회장.”

“예. 정 회장님.”

“저기…. 그….”

동생의 범죄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보기 좋게 포장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회장님. 제가 지금까지 회장님과 나눈 시간이 있는데,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뭐가 있습니까.”

“혹시 강운모 회장이 따로 얘기한 거 없었어?”

“아버지께서요? 음…. 앞으로 정영수 회장님을 잘 밀어줘야 한다고 하셨던 거요?”

“흠흠. 그게 전부야?”

“예. 지난번 장례식장에서 나오면서 말씀하셨어요. 그 이후엔 별말 없으셨고요. 아버지와 따로 만나셨습니까?”

“대북 사업과 관련해서 영호 녀석이 일을 저지른 것 같다.”

“…일을 저질러요?”

“정부와 같이 진행하는 것 같아. 산업 은행이 왜 대출을 쉽게 해 주나 했더니….”

북한에 보낼 정책 지원금을 대현이 마련해 보내 줬다고 한다. 마련한 방법은 당연히 외압을 통한 대출이었다.

“회장님 모르게 진행한 모양이네요?”

“그야 당연하지.”

“당연하긴 뭐가 당연합니까? 정 회장님도 그룹 공동 회장이란 말입니다. 공동의 책임이라고요!”

“…나도 책임이 있다?”

“휴. 여기서 책임 소재를 가릴 일은 아니니 넘어가고요. 그래서 어쩌시려고요?”

“너한테 물어보려고 말을 꺼냈잖아?!”

“…자아. 정리합시다. 확실한 대북 송금 자료가 있고 이 자료를 이번 정권의 반대파인 한신당에 넘기면 정 회장님은 손도 안 대고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이게 포인트죠?”

“…어. 그렇지.”

여기까지 시나리오를 짜지도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정 회장님은 그래도 동생인 정영호 회장을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일 테고요.”

“그, 그렇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얼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같은 경우엔 말이죠…. 동생이 그런 일을 저질렀고, 관련 증거가 내 손에 있다. 당장에 그 증거를 없애 버릴 겁니다.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태워서 어디에도 남지 않게 만들 겁니다.”

“그, 그래야겠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사업하다가 돈을 썼다는데 대체 뭐가 잘못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그 돈이 북으로 들어가서 굶어 죽는 북한 동포를 먹여 살린다? 이게 가능한 소리입니까?”

“어림도 없나?”

“아마도 북한 뚱땡이 변태는 핵 미사일이나 만들려고 폼 잡고 있을 겁니다. 우린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북한에 가장 위협적인 미사일을 만들 기반을 마련해 주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지? 막아야 하지?”

이제 이유는 충분히 만들어줬다.

“동생과의 관계는 어쩌시고요.”

“국민이 먼저지 이 사람아.”

“아차. 국민.”

“내 동생도 국민의 한 사람이잖아.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그걸 두고 볼 수야 없지.”

“하지만 지금 정권을 누가 잡았는지 잊으신 건 아니죠?”

이현창과 당장 터뜨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이현창은 올여름에 국정원을 나선다고 했으니 아직 석 달 정도는 지나야 일을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

“당연히 대통령이 연루됐겠지.”

“레임덕이 약하게 오긴 했지만, 그래도 끝물입니다. 조금 기다리면서 던질 준비를 하세요. 던진다고 해서 바로 시작할 수도 없습니다. 한신당에서도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면 칼을 갈아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자네를 만나러 오길 잘했군.”

“식사나 든든하게 하십시오. 왕 회장님 그렇게 가시고 마음이 많이 상하신 모양입니다. 얼굴이 핼쑥해지셨네요.”

“…어휴. 영호 녀석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고 있어.”

“어차피 정 회장님의 대현 자동차만큼 대단한 계열사는 없습니다. 건설도 워크 아웃 초읽기 아닙니까?”

“반도체도 간당간당하지.”

“대현 그룹의 큰 위기 상황입니다.”

하지만 남의 위기였다. 수안은 가만히 앉아서 위기를 지켜보고 적당한 계열사를 주워 담고 싶을 뿐이다.

“괜히 이 자료 때문에 일이 커질까 싶어.”

“…고름을 묵히면 병이 커집니다. 아버지도 대현이 위기를 기회로 이겨내길 바라시며 자료를 주셨겠죠. 선택은 정 회장님 몫입니다.”

“흠. 어차피 시간이 필요할 일이니 이 얘긴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세. 그나저나…. BE는 강 회장님이 관리하시는 거 맞지?”

아직도 BE를 강운 그룹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정영수 회장이다.

‘이러니 내가 상대하기 얼마나 편해.’

단순한 데다 자신이 믿은 걸 끝까지 밀고 나가는 우직함. 자신의 밑에 두고 싶진 않지만, 반대편에 서 있다면 정말로 듬직한 사람이다.

“TV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었는데 아직도 의심하십니까?”

“그럼 정말로 자네가 일으킨 투자 회사란 말이야?”

“알아서 생각하시고요.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요.”

당장 할 일도 많은데 이런 자리에서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강 부회장. 말은 해 주고 가야지!”

“미국 포브스지나 사서 보세요. 거기 자세히 나올 겁니다.”

향후 20년 뒤에도 쉽게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BE 보유 지분 75%의 평가액은 무려 1조 2천억 달러. 이번에만 특별히 비상장 기업인 BE의 지분을 평가해 부호 1순위에 올려둔다고 들었다. 이후엔 넣지 않겠다고 해서 이번에만 특별히 허락(?)했다.

75%는 수안의 개인 지분, 나머지 25%는 미국 정부의 지분.

여기에 의심할 구석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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