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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 (222/304)

건물주

“…좀 이상한가?”

“조금? 조금이 아니지. 당신도 예전에 말했잖아. 부회장님이 날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고.”

비행기 안에서 수안이 내민 손을 잡은 배영성은 이후 더 열성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중요 의사결정을 제외한 나머지를 맡는 것만으로 조금 버겁지만, 그 버거움조차 즐거움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끌어 주는 대로 따라가면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주인공이라 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되어야 하니까. 난 무대에 올라야 하니까.’

인생에 대한 열의를 회사에서 터트리고 주말이 되면 번 아웃과 비슷한 후폭풍을 겪기도 했다. 꼼짝없이 이틀을 자리에 누워 쉬고 다시 월요일 새벽에 벌떡 일어나 회사로 향한 날도 몇 번 있었다.

아내는 자신의 그런 피곤한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렇긴 했지만…. 우리도 이제 돈을 더 벌 필요가 없어. 이거 봐.”

수애가 120억으로 불어난 펀드 계좌 수익을 보여 주고 있었지만, 배영성은 펀드 계좌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약부터 꺼냈다.

“이거나 먹지?”

“청심환? 이걸 왜? 나 별로 충격 안 받았어. 난 아까 다 봤는데? 그리고 우리 돈은 이게 전부가 아니잖아. 일전에 보험수익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돈이 이것보다 더 많아.”

수애는 펀드 수익률로 인해 자신이 충격을 받을까 청심환을 먹으라는 줄 알았다.

“우선 드셔. 나야말로 충격적인 소식이 있으니까.”

충격적인 소식이라는 말에 수애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좋은 소식?”

“너무 좋은 소식이야.”

“내가 너무 좋아서 충격받을까 봐? 나 기대한다?”

“얼마든지.”

수애가 청심환을 먹고 약효가 발휘된다 싶을 때 수애의 계좌 위에 다른 계좌를 올려놨다.

“당신 계좌보다 이게 10배는 중요해.”

“뭐? 이게 뭔데….”

“이번 연말에 나만 추가로 받은 상여금이야. 부회장님이 날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데 회사에 사직서를 내라고?”

“이, 이게 얼마지? 일, 십, 백, 천….”

“천억.”

“힉!”

기존 300억 펀드의 수익에 이방효와 차진호가 추가로 넣은 1천억을 더하고 수안이 추가한 2천억까지 포함하면 4천억이 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수안의 말대로 대부분 자금을 다시 펀드로 분리하며 천억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난 강운 그룹에서 강 부회장님의 핵심 참모로 인정받고 있어. 대체할 사람도 없는 상황이지. 그리고 내가 핵심 참모가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그간 은혜를 입어 놓고 어떻게 회사를 나가? 난 절대로 그렇게 못 해.”

“미쳤다 정말….”

천억은 지금까지 악착같이 모은 거액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돈이었다.

“내년에 더블 스타 부회장으로 올려주신다고 하는데 지금 회사에 사직서를 내라고? 아서라.”

수안은 배영성을 더블 스타 부회장으로 명하는 인사 서류에 사인을 끝냈다. 김현성 사장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 사실을 알려줬고, 당장 내년 초부터 부회장 타이틀을 달게 된다. 이후 이사회와 주총에서 안건으로 통과될 예정이었다.

“헐. 부회장? 사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승진이야?”

“나 생각해 주는 당신은 참 고마워. 하지만 사회에서 나의 위치는 고작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회사에서 오래 남아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어. 여보.”

더블 스타에선 부회장이고 강운 그룹에서는 전무이사를 달게 된다. 직급은 전무이사지만 본사 전무이사는 계열사 사장보다 높은 위치라고 할 수 있었다.

‘수애는 말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전무이사면 사장보다 낮아지는 거라며 실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지.’

아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 강운 그룹의 일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 여보.”

“뭐든.”

“당신은 회사 생활이 즐거워?”

회사에 다녀보지 못한 수애는 남편의 마음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당신만 좋다면….’

일이 힘들어도 남편이 보람되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 너무 즐거워. 바쁘고 힘들어도 내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아. 그렇다고 회사가 가족과의 시간을 빼앗을 만큼 날 부려 먹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 아이들도 아빠가 건물주인 것보다는 회사의 부회장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지 않겠어?”

“맞아. 우리 아이들이 커서 아빠가 회사 임원이라고 하면 어딜 가서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거야.”

배영성은 이제 회사 얘기는 그만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용돈이나 올려주지? 남편이 이렇게 돈을 많이 벌어왔는데 용돈이 너무 짜다?”

수애는 한참 고민하다 결심했다.

“…알았어. 월 100! 인심 썼다.”

“큭. 당신은 천억이 더 생겨도 여전하네.”

배영성에게 용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따로 챙겨둔 거액의 비상금을 제외해도 회사에서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돈은 법인 카드로 해결하고 있고 차도 법인 차량을 사용한다. 경영진의 품위 유지비까지 따로 나오고 있으니 아내에게 용돈을 받아도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그저 거액이 생긴 아내가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쳇. 난 건물 알아봐야 한단 말이야. 당신이 회사 안 그만둬도 건물은 살 거야.”

“아서라. 괜히 건물 알아본다고 돌아다니다가 사기나 당하지.”

“사기 안 당하거든?”

“…건물은 내가 알아볼게. 회사 다니면서 건물주 못하겠어?”

“오오! 역시 당신은 날 지지해 줄 것 같았어.”

“그런데 당신은 당신 남편이 무슨 회사에 다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니? 내가 괜히 건물을 알아본다고 하겠어?”

더블 스타는 초기에 부동산 투자로 시작한 회사였다. 국내 부동산 초고수인 김현성 사장이 있는데, 누굴 통해서 건물을 알아본단 말인가.

“…더블 스타는 엔터테인먼트가 중심인 회사 아닌가?”

“아이고. 이 사람아.”

배영성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여기에 SJ 컴퓨터와 팬탁, 한컴, 안랩, 더블 엔터와 SN 엔터, 다움과 네이보, 기타의 게임개발 회사들과 벤처 기업들을 계열사로 두고 있었다. 여기에 팬탁을 강운 전자로 넘기고 세기 통신을 인수해 통신 중심의 회사로 거듭나고 있었는데, 아내는 하위권 계열사에 속하는 엔터테인먼트 사업만 기억한 모양이다.

“어차피 당신이 다 알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우리 회사에 부동산 전문가만 수십 명이야. 당신은 괜히 고생하지 말고 금액이나 정해. 얼마짜리 살 건데?”

“…얼만데?”

“…….”

“대충이라도 기본적인 건물값을 알아야 정하잖아.”

배영성은 툭 튀어나오는 핏대를 꾹꾹 눌렀다.

“자아~ 여보?”

“응?”

“보통 빌딩이라고 해도 위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야. 음…. 우선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따져 보자. 그래야 적당한 투자금을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우리 수중에 얼마가 있지?”

“그건 알려 줄 수 없어. 비밀이야.”

“끄읍.”

잠깐 목덜미를 잡은 배영성이 숨을 몰아쉬며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후우. 후우. 그래. 우선 나도 대충은 아니까 이어서 얘기하자. 내 월급은 아예 제외하고 롱텀 보험에서 120억 수입. 이번에 얻은 추가 수익 90억을 더하면 210억. 내가 가져온 1천억까지 생각하면 1천 210억이야. 여기서 100억을 투자해서 건물을 사면 어떻게 될까? 당신은 어떤 건물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굉장한 건물을 사겠지? 그거 하나만 있어도 마음이 뿌듯할 것 같아.”

“하나?”

“100억도 넘어? 조, 좋아 120억까지 쓰겠어!”

“풋. 100억이면 목 좋은 곳에 위치한 빌딩 다섯 개도 살 수 있을 거야.”

“헉! 뭐가 그렇게 싸?”

“본래 건물 살 때는 내 돈으로만 사는 게 아니야. 나머지는 은행이 채워 주거든.”

“은행이 어떻게 채워 줘?”

“아파트 융자는 알지?”

“응. 아파트에서 아줌마들 하는 소리 많이 들었거든.”

배영성이 구입한 압구정 대현 아파트는 융자 한 푼 안 들어간 자가 소유의 아파트라 남들의 귀로 아파트 융자에 관해 들었다.

“그거랑 같아 100억짜리 건물을 산다면 은행에서 최소한 70억은 빌려줄 거야.”

“오오! 그래서 당신이 다섯 채를 살 수 있다고 했구나!”

“거기다 건물 임차인이 주는 보증금으로 나머지를 채우면 어떻게 될까? 내 돈이 그대로 남겠네?”

“…뭐야. 그럼 돈이 필요도 없었어?”

이런 방법으로 건물을 살 수 있지만, 여기엔 절대 명제가 필요했다.

“보통은 최소한의 자금은 들고 있어야 하지만, 건물 가치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일 리가 없어.”

건물의 가치가 무조건 오른다는 가정이다.

“건물이 올라? 많이 오를까?”

“서울 아파트와 같아. 해가 다르게 올라갈 거야. 그럼 융자를 받을 수 있는 돈은 더 늘어나. 100억 가치일 때 샀던 건물이 130억이 되면 나머지도 융자로 채워 버릴 수 있어. 그때는 진짜 내 돈이 한 푼도 안 들어간 상황이 만들어지겠지. 이런 식으로 하나씩 늘려나가면 내 돈 없이도 많은 건물을 확보할 수 있어.”

“아, 아무래도 난 건물 구입이 영 힘들겠다 싶네….”

남편의 말을 듣다 보니 건물주가 될 자신이 없어졌다. 건물 가치 상승이니 융자니 어렵기만 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돈만 결정해. 이 돈은 묵혀 두겠다 각오하고 건물에 투자하는 거야.”

“…130억으로 할게.”

“뭐. 나쁘지 않네. 건물은 전문 관리인을 두고 따로 관리하면 될 거야. 더 사고 싶은 건 없어?”

더블 스타의 회장이자 강운 그룹 부회장인 수안도 삶을 즐기며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내도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할 때였다.

“…난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너무 막막했어. 건물 말고는 생각이 안 나.”

“이제부터 고민해 보자. 아이들 교육이나 우리 노후 말고 지금 당신이 하고 싶은 걸 찾아봐.”

“…내가 하고 싶은 일?”

“부회장님 사모님은 연기자로 복귀하셨잖아. 여자의 삶은 결혼으로 끝이 아니야. 당신도 나와 아이들만 보면서 살지 말고 당신의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어. 당신 아직도 젊고 예쁘잖아. 아쉽지 않아? 아직도 이렇게 빛나는데.”

“당신 오늘 멋있네? 좋아. 150억! 더는 쓸 수 없어!”

“푸흐흐.”

갈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졌지만, 이런 아내라 더 믿음직한지도 모르겠다.

* * *

누군가는 돈이 넘쳐서 고민인 와중에 누군가는 말라가는 회사 자금으로 고민이 가득했다. 삭막한 분위기의 회의실에 앉아 있는 임원들의 입술은 바짝 말라가고 있었고, 누군가가 물꼬를 틔워 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총대를 메고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더는 버티기 힘듭니다. 부회장님.”

한 사람이 입을 열자 주위의 다른 임원들도 거들었다.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사업을 끌고 가면 제 살 깎아 먹기만 하는 꼴입니다.”

“자칫 그룹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악영향은 이미 주고 있다고 봐야 맞습니다. 지금은 빨리 발을 빼는 편이 그룹에 이롭습니다.”

“…….”

샤롯 마트는 생과 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사업을 접느냐 마느냐를 당장 결정해야 했다. 뉴월드 마트와 홈플러스라는 거대한 적은 상대하기 벅찬 수준을 넘어섰다. 지금까지 돌려막기로 어찌어찌 사업을 이끌어왔지만, 이 이상 마트 사업을 진행하면 진짜 그룹이 손해를 보면서 사업을 진행해야 했다.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 발을 빼야 조금이라도 손해를 줄일 수 있을 터였다.

“일본에 가 계신 회장님도 염려가 크십니다.”

“……!!”

아버지 눈 밖에 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여기까지 밀고 온 것부터가 문제였지만, 수습을 제대로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했다.

‘아니면 대신 매를 맞아 줄 놈이라도 찾아야겠지.’

신희태의 눈이 자리한 임원들을 훑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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