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공장
도착한 제안서를 출력해 읽어 본 스티브는 바로 이방효에게 연락했다.
“이건 해도 너무한 조건이잖습니까!”
-…어떤 부분이 너무합니까?
“우리 제품을 왜 강운 전자에서 검토하고 출시를 결정한단 말입니까. 애플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같은 디자인을 공유하게 될 텐데 서로 품질이 다르면 안 되지 않습니까. 만약 한쪽이 너무 기울게 되면 디자인 공유는 오히려 독이 될 겁니다.
“강운에선 품질에 자신이 없다는 소리로 들어도 됩니까?”
-오히려 그 반대죠. 강운은 내년 초 제품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벌써 출시한단 말입니까! 그건….”
출시가 늦어지면 그만큼 시장의 파이는 작아지기 마련이다. 애플의 제품은 아직 제대로 설계도 되지 않은 상태. 출시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강운 전자의 모든 제품은 테스트를 끝냈고 안정성을 확보했습니다. 애플의 제품에 문제가 생긴다면 애플 혼자만 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애플의 문제가 강운 전자 제품까지 여파를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애플의 제품을 검사하겠다는 겁니다.
아직 애플의 제품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스티브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 제품은 확실합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건 스티브 당신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다시 서로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그리고 책정한 사용료가 과다합니다. 고작 디자인으로 이렇게 많은 사용료를 책정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애플이 판매하는 제품 가격의 5%가 디자인 사용료로 책정되어 있었다. 단 1원의 원가라도 줄이려 노력하는 중인데, 추가로 5%의 디자인 사용료로 책정된다면 이는 기업의 이익에 악영향을 주는 수준이 아니라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강운 전자가 미국 시장을 애플에 양보한 것과 같은데, 고작 이 정도 사용료로 낮춰 준 것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애플 제품 강점은 성능이 아니라 마케팅과 디자인에 있었습니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이번 기기의 디자인은 애플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줄 테죠. 이 부분이 협의되지 않으면 우린 애플의 주식을 시장에 처분하고 다른 투자처를 찾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마음이 맞는 위원들과 합심해 경영자를 밀어내고 새로운 경영자를 내세울 수도 있겠죠.
“…….”
지분을 정리하는 것이든 지분의 힘으로 경영자를 밀어내는 것이든 BE 인베스트먼트가 원하는 대로 진행될 것이다.
애플 제품이 마케팅과 디자인에서 강점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사용료가 비싸다는 말은 조금이라도 깎아 보려 해 본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티브. 난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회장님께 디자인 공유를 건의했습니다. 디자인 공유를 원하지 않았던 회장님을 설득하려고 애썼고 애플이 최소한의 사용료를 낼 수 있도록 저렴한 비율을 이끌어 냈죠. 그런데도 당신은 불만만 가득하군요. 난 누굴 위해서 이 일을 했단 말입니까.
“리. 그건 충분히 감사한 마음을….”
-이제 와서 감사 인사는 됐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스티브의 몫이죠. 일주일만 기다리겠습니다. 그 안에 답신이 오지 않으면 애플과의 디자인 공유는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리 대표!”
-끊겠습니다. 스티브. 굿럭.
“잠깐! 리 대표!”
뚝. 뚜우뚜우.
전화 연결이 끊어졌지만, 스티브는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아….”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변명할 말이 없군.’
BE 인베스트먼트에서 지분에 투자한 덕분에 애플은 유동성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애플은 유동성 위기를 넘어선 다음 지분을 다시 돌려받으며 BE 인베스트먼트의 등에 칼을 꽂았다. 문제는 이번에 블록딜로 지분을 BE 인베스트먼트에 넘기면서 엄청난 돈을 다시 투자받았다는 점이다.
‘멍청한 짓도 정도껏 했어야지….’
세 번이나 시류를 예측하지 못한 애플도 멍청하지만, 신뢰하지 못할 애플에 몇 번이고 기회를 주는 BE 인베스트먼트야말로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나 같으면 경영자부터 갈아치우고 흡수해 버릴…!!’
스티브는 예전 스티븐 회장이 처음 투자금을 결정하며 지시한 일과 그 결과를 떠올렸다. 6개월에 한 번씩 자신의 건강 검진을 지시하면서까지 자신을 최고 경영자 자리에 두려고 했던 사람이다.
덕분에 자신은 발견하기 어렵다는 췌장의 질환을 미리 발견했다. 나중에 발견했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던 질환이라고 했다. 노리고 검사하지 않는 한 검사가 어렵기에 보통 최종단계에 이르러 발견되는 편이고, 그마저도 예후가 좋지 않은 질병이었다.
호의는 이번 일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방효 대표는 투정이나 다름없을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스티븐 회장의 입김이 리에게 영향을 줬을 거야. 경영자를 갈아치우는 건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BE가 지금까지 지분을 취득한 회사 중에 경영자가 갈려 나가지 않은 회사가 어디 있던가. 대부분의 기업 경영자들은 BE가 회사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인수에 문제가 없도록 자신의 사직서를 써 두고 퇴직금을 포기한다는 서약서를 작성해서 BE에 보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퇴직금을 포기하는 편이 남은 생을 감옥에서 썩는 선택지보다 좋겠지.’
스티브도 CEO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던 이들이 결국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었다. 모두 검찰에 고발되어 법정에 서야 했고, 그들의 죄목은 일목요연하게 드러났었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 주는 것은 애플의 이사회가 아니라 BE 인베스트먼트였다.
자신을 신뢰하는 건 애플이 아니라 스티븐 회장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받은 호의를 생각하면 너무 늦은 깨달음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
‘BE 인베스트먼트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줘야겠군.’
딸깍.
이제야 수화기를 내려놓은 스티브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 당신의 결정은 빠르군요. 우리의 관계가 이대로 끝이라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행운을 빕니다. 스티브. 새로운 디자인은 찾으면 그만이죠. 당신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방효는 강운 전자와 수안을 위해 애플이 떨어져 나가길 바라고 있었다. 그저 애플의 스티브 대표가 좋아하라고 하는 말이었다. 곧 애플의 주식을 정리할 것이고 강운 전자는 전 세계에 독점적으로 제품을 공급하게 될 것이다. 강운이 세계 일류가 되고 강수안 회장은 세계 최고의 기업가가 될 것이다.
‘미국 시장이 조금 늦어지면 어때? 어차피 나중엔 다 먹을 텐데.’
마음 한가득 착각을 담아둔 스티브는 이방효의 말에 다시 크게 감동했다.
‘내가 거절한다고 가정한 대답조차 상대를 향한 걱정이 한가득 들어 있어.’
“하아…. 당신들은 정말 날 미치게 하는군요.”
-당신들이라니요?
‘누군가와 또 통화를 했던가?’
만약 디자인 특허에 소송을 걸기 위해 로펌을 먼저 만났다면 어쩌나 싶었다.
한번 법정 분쟁이 시작되면 길게는 몇 년 이상을 끌기도 했고 그동안에 제품을 제대로 판매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애플은 BE 인베스트먼트의 조건을 100% 수용합니다. 매출액의 5%를 디자인 사용료로 지급할 것이며, 출시 전 애플 제품의 검수를 수용하겠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우리 제품은 내년 말에도 출시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강운 전자가 기술에 우위를 가진다면 출시 전 제품의 사전 검사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
이방효는 실로 난감한 처지였다.
‘이러면 애플을 강운 전자의 생산공장으로 쓰려고 준비해 둔 협상 테이블이….’
이번 디자인 사용료 협상이 길어질 것임은 자명했고 비율을 낮추고자 끊임없이 논의를 이어 간다고 예상했다. 그 논의 중에 수안이 등장해 제품이 곧 출시되는 강운 전자의 MP3를 애플에 생산 외주를 주는 방식과 유사하게 진행하려고 했는데,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게 생겼다.
‘더 깎아 달라고 강짜를 부려야지 인마!’
스티브의 마음 속에 들어갈 수 없으니 지금은 답답할 뿐이다.
“미안합니다. 제가 거짓말을 해서 크게 실망하셨겠죠. 나오지도 않은 제품으로 블러핑을 했으니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 내년 중반까지는 무조건 제품 개발을 완료하고 연말 생산이 가능하도록….”
이방효는 스티브의 답변에 생각이 미쳤다.
-잠깐 멈춰 봅시다. 스티브.
“…리. 우리 쪽 문제가 조금 심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우선 편안하게 내 물음부터 답해 주십시오. 지금 애플의 생산 공장은 준비가 완료되어 있죠. 제가 알기로 준비가 끝나고 1개월 정도 지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맞습니까?
“휴우. 사실입니다. 제조 시설은 확보가 되어 있음에도 제품 개발이 미진한 상황이죠.”
-지금 스티브의 말대로라면 제품 생산 시작 시기를 긍정적으로 가늠해도 1년이 남았군요. 그렇죠?
“자금 유동성에 문제가 생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때문에 애플은 긴급 운영자금이 필요했습니다. 모든 여유 자금이 묶여 버렸습니다.”
스티브는 솔직하게 경영상의 문제점을 말해 줬다.
‘이거 추가 협상에 강 회장님이 등장할 필요도 없겠군.’
-스티브. 우리는 당신의 든든한 조력자입니다. 항상 애플에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죠.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BE는 애플의 친구입니다.”
-고맙습니다. 스티브. 그래서 좋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강운 전자에서 생산할 새로운 휴대용 음향 기기를 애플에서 생산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내년 초에 출시할 신제품을 말입니까?”
이방효가 단독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지만, 이미 수안과 협의하고 들어 둔 정보가 있었다. 이방효가 진행하고 사후보고를 통해도 될 정도로 알고 있었다.
-애플은 신제품 개발을 진행하면서 생산 중인 강운 전자 제품과 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제품마다 생산 공정이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니, 강운 전자 제품을 생산하며 숙련도를 높일 수도 있겠죠.
“그, 그건 너무 좋은 조건이 아닙니까.”
놀리며 돈을 까먹어야 하는 공장에 일거리를 주고 돈까지 주겠다는 말이다.
-스티브. 아까도 말했지만, BE는 당신의 든든한 조력자랍니다. BE가 15%가 넘는 지분을 쥐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 줘요. 지분 가치가 올라가길 원하는 건 현 애플의 이사회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회의장에서만 목소리가 큰 머저리들뿐이지만, BE는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진짜 친구입니다.”
-세부적인 조건은 조율해 나가도록 합시다. 스티브. 애플 생산 공장에 최대한의 물량을 확보해 최소한의 운영 자금을 벌어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소.
“이번에도 부탁합니다. 리.”
-…행운을 빌어 주시오. 스티븐 회장님도 당신을 좋게 생각하고 배려하는 분이지만, 북미 생산 공장 계약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모든 생산을 맡기는 방식이 된다면 기술 유출도 염려해야 합니다.
“그건….”
-물론 비교하는 차원에서나 살펴보겠거니 짐작하고 있소. 당신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기술 유출은 없을 겁니다. 만약 이미 강운 전자에서 사용 중인 기술이 있다면 우린 그 기술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면 됩니다.”
스티브의 말에 이방효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경쟁사 컴퓨터와 애플의 컴퓨터가 비슷하다고 다른 기술을 넣을 수 있습니까?
“…솔직히 그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강운 전자가 사용하는 부품이 아닌 다른 제품을 사용하면….”
-모델명이 바뀐다고 다른 기술이 되지 않아요. 게다가 이번 제품은 컴퓨터만큼 크지 않죠. 그 작은 제품에 들어가는 기술이야 전부 뻔하지 않습니까? 난 이해합니다. 대신 스티브가 회장님을 확실하게 이해시켜 주세요. 그래야 잡음 없이 애플의 제품이 출시될 수 있습니다.
“휴우. 애플의 출시가 늦어진 것이 큰 약점이 되어 버렸군요.”
-오히려 강점이죠. 경쟁사의 강력한 제품을 보고 득실을 파악할 기회가 될 테니까요. 강운 전자가 출시한 제품이 어떤 부분에서 부족했는가를 살펴보면 애플은 기회를 살릴 수 있죠.
이방효는 애플과 스티브에게 그런 기회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판매하는 제품 겉면에 애플의 이름을 달고 나오겠지만, 내용물은 전부 강운 전자의 부품으로 채워질 거야.’
앞으로 애플은 강운 전자의 간판 공장이 될 예정이다.
미국 시장은 애플이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쳐들어온 강운 전자의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애플에서 생산한 제품을 미국 시장에 출시하는데,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 모든 계획은 수안의 머리에서 출발했다.
‘회장님의 혜안은 정말….’
-그리고 MP3라는 확장자 특허도 결국 강운 전자의 품에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애플은 강운 전자와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해 주십시오. 스티븐 회장님과 논의 후에 결과를 전하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