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확보한 지분
최근 영수는 기화 자동차의 K-5를 구입했다. 회사 내 직급에 차를 정한 것이다. 직접 타 보기 전엔 너무 작지 않을까 싶었지만, 사서 몰아 보니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실내는 보기보다 더 넓었고, 내 외부 디자인은 세련됐으며, 최신기술이 잔뜩 적용된 편의 사양까지 완벽했다.
덕분에 K-5는 차를 모르는 사람도 차를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영수는 차를 애지중지 아끼며 타는 중이었다. 먼지라도 떨어졌을까 매일 차를 살피고 집에서도 차량 커버를 씌워 두고 살았다.
“응? 어쩐 일로 흰둥이를 끌고 왔어?”
햇빛 받으면 색이 바랜다고 평소 차를 밖에 내놓지도 않는다고 들었다. 지난번에 차를 탔을 때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자신이 탄 좌석 아래에 신문지까지 깔았다. 차를 흰둥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당연히 자기랑 데이트하려고 가져왔지.”
“…….”
당연한 대답인데도 문득 의심이 들었다.
“차보다 내가 좋은 거 맞지?”
“당연하지!”
“대답이 1초만 늦었어도 못 믿었을 거야. 통과.”
“…….”
영수는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본능이 날 살렸구나.’
솔직히 속으론 갈등하고 있었다. 정희가 좋지만 차도 너무 아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사에 주차할 공간도 없잖아. 출근하고 주차는 어디에 했는데?”
“회사에서 몇 블록 떨어진 유료 주차장에 월 정기권 끊었어. 조금 거리가 있기는 한데 그래도 차 가져오니까 편하더라.”
“회사에 흰둥이 몸을 누일 주차 공간 하나가 없다니….”
“어쩔 수 있나 뭐.”
정희는 부회장님이 제안했던 화장품 사업이 문득 다시 떠올랐다.
‘오빠가 사장이 되면 마음대로 차도 살 수 있고, 주차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회사의 부족한 주차공간 덕분에 사업을 시작할 마음이 들었다.
“오빠. 우리 같이해 보자.”
“아이참. 정희야. 그렇게 크게 말하면 어떻게 해. 항상 같이했는데 뭘 또….”
같이하자는 말을 엉뚱하게 해석했다. 지금 영수의 머리는 이런 방향으로밖에 돌아가지 않는다. 짝짓기 기간의 수컷에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 그게 아니라 부회장님이 말씀하신 사업 말이야. 화장품 사업.”
“큼. 아. 그, 그거?”
“내가 앞으로 관련 자료 조사하고 어떻게 사업을 시작할지 파악해 볼게. 오빠는 화장품 관련 수출입 거래처를 알아보는 거야. 어때?”
“진짜 사업을 시작하려고? 사업에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
영수의 말에 정희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사업 자금 없으면 오빠가 망해? 사업 한번 말아먹었다고 오빠가 무일푼이 되기라도 하겠어?”
“…어림도 없지. 한 100번 정도 말아 먹어도 끄떡없을 테니까.”
수안이 준 10억 달러는 대부분 영수 명의로 BE 펀드에 재투자되어 있었다. 지금도 BE는 영수의 자금을 불려 나가고 있었고, 국내에 위치한 BE 지점을 통해 일부는 꺼내 쓸 수 있었다. 사업을 일으키는 데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 겁날 거 없잖아. 화장품 사업 시작했다가 말아먹으면 다른 사업을 또 해 보지 뭐. 우리가 무역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까 해외 중개 무역을 해 봐도 좋을 것 같아.”
정희에게 1조 원이라는 돈은 숫자일 뿐이었고, 그건 영수도 마찬가지였다. 50억, 100억은 엄청난 돈으로 느껴지지만, 1조 원이라는 돈은 너무 비상식적으로 들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껴서 써야 한다는 인식조차 할 수 없는 돈이다.
“오오. 그건 좀 솔깃한데?”
강운 무역에서 해외 무역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으니 무역이라는 말에 영수의 귀가 쫑긋했다. 화장품 사업이라고 했을 때는 사업이 멀게 느껴졌는데, 무역이 더해지자 급격하게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다움하고 네이보에서 보니까 부동산을 중개하는 사이트도 괜찮아 보이던데? 앞으론 IT가 유망하다고 하잖아. 요즘 주변에 친구들이 다 거기서 집 알아본다고 하더라고. 무엇보다 발품을 안 팔아도 돼서 좋대.”
“…그거 부회장님 동생이 하는 사업인데? 사돈총각이 사장이야. 한남동 집도 사돈총각이 알아봐 줬어. 사돈총각이 부동산 일은 정말 잘하더라. 프로야 프로.”
“…….”
부회장님의 동생이면 강운 그룹 강 회장님의 막내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런 상대와 사업으로 대결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감히 비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동산은 패스. 중개 사이트 할 거리가 부동산만 있나 뭐? 지금은 뭐든 만들기만 하면 돈이 될 거야. 인터넷이 크게 활성화되고 있잖아.”
“우선은 화장품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으니까 사이트를 만들어도 화장품을 중심으로 해 보는 게 어때? 해외에서 유명 화장품을 들여와서 대리점과 인터넷에서 판매하면 둘 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가격 비교도 제공하고 말이야.”
“오오. 역시 오빠는 머리가 좋아. 오빠는 무조건 사장해야겠다.”
“푸흐흐. 그럼 자기는 뭐 하려고?”
“난 오빠 비서? 우~ 사장님~ 오늘은 따뜻한 우유 한 잔 드릴까요?”
“이렇게 예쁘고 섹시하고 귀여운 비서가 옆에 있으면 내가 일에 집중할 수 있을까? 난 불가능하다고 본다. 으르르. 자기가 짐승을 깨우고 있어.”
“아잉. 오빵.”
정희가 품에 안기며 아양을 떨자 영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가자. 아무래도 더는 안 되겠어.”
“…으응.”
한 쌍의 남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가게를 나섰고 자꾸만 어둡고 구석진 곳을 찾아다녔다.
바퀴벌레의 습성과 놀랍도록 일치했다.
* * *
이방효는 맡겨진 업무와 일부 요청 사항을 건의하기 위해 전화를 들었다.
-여. 이 사장.
“예. 회장님. 이방효입니다.”
-보고는 전자 메일로 해도 된다니까. 거긴 저녁이잖아? 퇴근하셔야지.
뉴욕 월 스트리트는 오후 8시가 넘어 퇴근을 한참 넘긴 시간이고 서울은 업무를 시작하는 오전 9시였다.
“가끔 회장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말입니다. 하하하.”
-푸흐. 나도 이방효 사장 목소리 듣고 싶을 때가 있긴 해. 그래도 자주는 말고 가끔씩만 연락하자고.
“조만간 미국 정부가 정보를 오픈하면 더 자주 연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미국 대선은 아직도 개표 중이지?
11월 7일 미국 대통령의 선거가 치러졌고 개표가 주마다 따로 나오기에 엎치락뒤치락하며 혼란스러웠다. 내일도 확정될 수 없는 선거였다. 플로리다주의 상황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주의 법 규정에 따라 자동 재검표를 진행해야 했다.
“윤곽이 나오고 있습니다. 공화당은 축배들 준비를 하고 있고 민주당 측에선 패배를 직감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가 봐야 알겠지만, 나도 비슷한 예측을 하고 있어.
민주당에 뼈아픈 현실은 플로리다주의 주지사가 조지 워커 부시의 동생인 젭 부시라는 점이다.
플로리다주에서 전면 재검표를 하지 않는 한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한다 해도 뒤집힐지 확신할 수 없는 일. 내년에 취임할 미합중국의 43대 대통령은 조지 워커 부시가 확실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대선이 정리되면 바로 BE 인베스트먼트의 정보가 흘러나올 것이다.
“다행인 점은 두 정당 모두와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점이지요.”
-불행인 점은 그래봤자 내 정보는 알려진다는 점이겠지.
“그나마 미국은 신흥 부호를 바라보는 인식이 나쁘지 않지만, 한국은 걱정스럽습니다.”
-일부러 충격 요법을 썼으니까 이번 일에도 충격이 덜할 거야.
추가로 강운 그룹 비서실에서 다움과 네이보를 통해 수안의 일화들을 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뭐든 빨리 배운 일화들과 학창 시절의 일들을 비롯해 선수 생활, 기업인으로서 이뤄온 성과들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그래핀으로 인해 한 번의 충격이 있어서인지 새로운 떡밥도 재미있는 일화 정도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내가 BE를 일으켰다는 것도 해외에서 정보가 들어오기 전에 먼저 알릴 생각이야.
정보는 선점하는 자가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해외에서 금융 회사를 일으켜 IMF에 도움이 되었다는 식으로 정보를 풀어갈 생각이다. 외화 수급과 금 모으기 운동, 국내 부도 위기 회사들에 준 도움까지 더해지면 해외에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부정적인 여론은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한국은 강운 그룹의 세상이죠. 잘 풀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걱정을 내려놓은 이방효는 전화 건 목적을 꺼냈다.
“애플 주식 매집이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기존 보유 지분보다 약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애플은 속절없이 내려가는 주가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BE에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기존 10%를 약간 넘었던 지분을 이번에 15% 가깝게 확보했다. 애플 이사회의 지분보다는 못했기에 애플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네.
“문제는 스티브의 강짜입니다.”
-그 사람은 또 왜?
이방효 사장은 최근 애플의 스티브에게 걸려오는 연락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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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분명 얘기했잖소. 해당 디자인은 이미 강운 전자에서 제품으로 출시를 앞두고 있단 말입니다. 애플은 절대로 그 디자인 못 씁니다!”
애플에선 음향 기기의 디자인의 특허를 출원하려다가 수안의 선행 디자인으로 좌초된 일이 있었다. 스티브는 이방효에게 연락해 다시 그 일을 끄집어냈다.
-난 써야겠소. 이 디자인이 아니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적당히 했어야지! 유사 디자인까지 전부 특허를 등록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스티브는 아이팟에 적용할 디자인이 선점된 것을 확인하고 유사한 변형 디자인으로 우회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불가능했다. 변형 디자인조차 디자인 특허출원 중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스티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습니까? 유사 디자인을 사용하려고 한 것부터가 문제 아닙니까? 이미 다른 회사에서 디자인을 확보했으면 전혀 다른 디자인을 고안했어야죠.”
-그 부분은…. 어쨌든! 이제 BE는 애플의 주요 주주이기도 합니다. 애플을 망하게 만들 작정입니까? 지분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해당 디자인의 사용을 허가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티븐 회장님께 건의라도 해 주십시오.
비슷한 내용으로 통화한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수안에게 전하지 않고 넘겨왔지만, 스티브의 연락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마무리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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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효는 애플과 논의한 일들을 수안에게 설명하고 생각한 바를 풀어냈다.
“우리가 확보한 애플의 지분 가치도 고려해야 합니다. 지분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는 애플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한 미국 시장은 개방되어 있지만, 외부에 폐쇄적이기도 하죠. 애플을 통해서 미국 시장을 공략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습니다.”
-흐음.
국내에서 생산할 수량은 한정되어 있다. 해외로 출시하려면 추가 공장 건설이 필요한데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애플이 우리 디자인을 우회한다고 가정하면 법정까지 가야 합니다. 미국 특허 법원이 애플의 손을 들어줄 위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스티브의 말대로 우리가 애플의 주요 주주라는 점도 감안해야 하죠. 지분 가치 때문이 아니라 도의적인 부분입니다. 일각에서 저희가 애플을 망하게 만들 생각으로 지분을 취득했다고 볼 수도 있죠.”
-…….
애플이 디자인을 우회하는 것도 문제지만, 선점과 데이터 확보가 문제다. 몇 년 뒤에 출시할 스마트폰과 스마트폰 안에 설치될 프로그램의 활용을 위해서도 시장 선점은 필수적이다.
수안은 애플과 협의를 통해 새롭게 출시하는 대용량 MP3 장치를 전 세계에 보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협상이 필요하겠어.’
-애플과 협상을 시작하지. 관련 디자인 사용을 허가하는 대신 일부 사용료를 받고 추가 조건을 걸면 될 것 같아.
“스티브가 환영하겠군요.”
그리 환영할 만한 조건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