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한 마음
아현은 TV를 틀기만 하면 나오는 김승철의 새 뮤직비디오를 보며 감동하고 있었다.
“어쩜 어쩜….”
오빠가 저렇게 멋지게 보일 줄은 몰랐다. 집에서도 난리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알아본 친지들의 반응에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아들이 잘생겼다는 말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현 가족만의 일이 아니었다. 김승철의 새 노래는 나오자마자 국내 가요 차트를 휩쓸고 있었다. 벌써 2주째 1위를 고수하는 중이고 인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짐작할 수 없다는 평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좋지는 않았다.
이번 김승철의 뮤직비디오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진 만큼, 남성들에겐 곤란함을 안겨 줬다. 여성이 바라는 프러포즈의 기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뮤직비디오와 같은 수준의 환상적인 프러포즈를 원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해야 한다는 점이 난관이다. 남자들은 제대로 된 프러포즈의 기준을 알 수 없었다.
“오빠는 언제 저런 걸 신청한 거야?”
“…….”
방금 씻고 나온 수안은 아내가 보던 뮤직비디오를 확인하고 말했다.
“신청은 무슨 신청. 형님이 그럴 사람인가?”
“신청을 받았겠지. 아니면 김승철이 오빠를 찾아갔겠어요?”
“방법이 그것만 있겠어? 이런 일은 대중이 모르는 뒷얘기가 있는 법이야.”
“당신 뭐 알아요?”
“저거 내가 기획했거든.”
“어엉? 김승철은 우리 기획사 소속이 아닌데?”
“형님이 프러포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해서 노래 한 곡 썼지. 가수는 아무래도 김승철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부탁했고.”
“저, 저 노래를 당신이 썼어요?”
“뮤비도 내가 만들라는 대로 만들었어. 형님이 어찌나 고마워하는지 매일 전화야. 옆에서 한 비서까지 거들고 있나 봐.”
“허! 내가 옆에 작곡가를 두고도 몰랐네요.”
수안은 아현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는 우리 10주년 이벤트로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형님이 더 필요하겠다 싶더라고. 미안 여보. 아쉽지?”
“하하…. 쪼금?”
자신이 저런 이벤트의 주인공이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싶다가도 사랑하는 남편을 떠올리면 과도한 욕심이라고 생각됐다.
“그래도 잘했어요. 올케언니는 당신 덕분에 인생에 잊지 못할 기억을 얻었네요.”
“당신을 위한 노래는 내가 또 만들어 볼게.”
이번엔 진짜 창작해 볼 생각이다.
“당신이 말도 안 되는 사람인 거는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이번엔 좀 심했어요. 노래에 뮤직비디오까지…. 이러다 영화도 찍는 거 아녜요?”
“에이. 내가 영화까지는 좀….”
찍자면 못 찍을 것도 아니지만, 남의 창작물을 빼먹는 짓도 그만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특히 원작자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긴 노래나 영상은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 차량의 디자인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특허를 등록한 디자인까지만 활용하고 나머지는 회사 디자이너들에게 일임할 생각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들의 능력으로 회사를 이끌어야 했다. 그게 나중을 위해서도 올바른 방향이었다.
‘그래도 애플의 디자인까지는 써먹어야지.’
MP3와 휴대 전화는 이미 생산 준비를 마쳤다. 내년 초 발매가 시작되고 이후 다음 모델이 나와도 유사한 디자인이 계속될 것이다. 이는 창작물이긴 하지만 개인의 권리를 갖지 못한 회사의 소유물이라 부담감이 덜했다.
“당신은 못 하는 걸 찾는 게 빠를 것 같아요. 수영도 강사가 선수 하라고 난리잖아요.”
“내가 피지컬이 좀 되잖아. 기본 바탕이 국가 대표 육상 선수인데 수영이야 뭐….”
초반엔 물을 조금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잘 이겨냈다. 한번 배우기 시작하자 빠른 속도로 수영을 배울 수 있었고, 지금은 프로 수영 선수의 기록에 근접해 있었다. 말이 근접이지 수안이 힘을 온전히 사용한다면 세계 신기록 경신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또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지.’
육상으로 충분했다. 앞으로의 영광은 피땀 흘려 훈련을 이겨내고 있는 선수들이 차지해야 했다.
“클레이 사격도 마찬가지였어요. 사격 선수들보다 잘한다고 하던데요?”
“그건 너무 쉽지 않아? 날아오면 보고, 겨누고, 쏘면 끝인데?”
“난 접시 두 개가 연달아 날아오면 정신없어서 하나도 못 맞춰요.”
“조금 더 연습하면 될 거야. 나랑 같으면 당신이 국가대표 했게?”
그 외에도 함께해 본 골프를 비롯해 여러 취미 활동에서 수안은 특출한 모습을 보여 주며 강사들의 관심을 받았다. 처음 강운 그룹 부회장이라는 타이틀에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던 강사들도 수안의 육체적 능력을 보고 적극적으로 선수의 길을 제안했다. 이미 선수로 활동했던 경력도 있지 않겠는가.
“당신은 무슨 종목으로 나가도 금메달을 따올 것 같아.”
“더 따면 뭐 해? 나 이제 올림픽 절대로 안 나가. 인생 즐기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금메달의 영광은 이미 충분했다. 다시 사는 인생 즐기면서 살아야지 않겠는가.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나저나 한 비서는 좋겠다. 저런 프러포즈도 받고.”
“크흐흐. 적당했으면 모를까 지금은 피가 마를걸?”
“호호.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실제로 한 비서는 상당히 시달리고 있었다.
* * *
“오빠. 우리 상견례 빨리 잡자고 안 했어?”
“어?”
“상견례를 잡아야 결혼식 날짜를 잡을 거 아냐. 내가 꼭 먼저 말을 꺼내야 해?”
“집에 얘기는 했어. 조만간 알려 주시겠지. 우리만 정한다고 되나? 서로 일정 조율을 해야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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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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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요즘 뮤직비디오로 인해 주변에서 엄청난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특히 회사 내 여직원들은 눈을 반짝이며 물어본다.
“정희 씨 언제 결혼해?”
“글쎄….”
“좋겠다. 그런 프러포즈도 받고….”
“어디 그런 사람 또 없나?”
“뮤비에서 보니까 임 대리님 되게 멋있더라? 정희 씨도 걱정이 많겠네.”
“요즘 골키퍼 있다고 볼 안 차는 사람도 있다니? 들이대고 보는 거지.”
“맞아. 그런 남자면 누가 채가도 이상하지 않지.”
“…….”
회사 내에서뿐일까. 밖에 나가도 심심치 않게 사람들이 알아본다. 특히 길 가다가 마주치는 여성들의 눈빛은 부러움보단 질투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10억 달러는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뮤직비디오가 제대로 터지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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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마음이 급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초조한 마음이다.
‘어디서 미스코리아처럼 생긴 애가 좋다고 들이대면 어쩔 건데?’
“일정은 오빠가 말씀드리고 정해 줘. 우리 집은 내가 책임지고 맞출게.”
“…….”
요즘 진짜 연애의 맛을 알아가고 있는 영수였다. 프러포즈 사건 이후로 정희는 살갑기 그지없게 영수를 대했고, 영수도 달달한 연애 감정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 프러포즈를 받고 누가 그렇게 변하지 않겠는가. 감동의 바다에 푹 빠졌던 정희는 여전히 그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특히 회사 일이 끝나고 잠깐씩 어딘가에서(?) 쉬었다 오는 날이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뿌듯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래서 결혼을 서둘렀던 태도를 버리고 뭉그적거리는 중이다.
‘연애가 이렇게 행복할 줄은 나도 몰랐지.’
“오빠 왜 대답이 없어?”
“부모님보다는 아현이 스케줄을 먼저 따져 봐야….”
“요즘 활동 안 하고 쉬신다고 하던데?”
“…아버님 요즘 바쁘지 않으셔? 고교 기말고사 시즌이잖아.”
“시험을 학생들이 치르지. 교사는 시험지만 배포하고 채점하면 끝이거든? 그리고 아빠는 이제 곧 교감으로 승진이야. 학교 때문에 바쁠 일 없어.”
“그리고….”
더는 핑곗거리가 없었다.
영수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은 정희도 눈치챌 수 있었다.
“뭐야…. 잠깐 사이 오빠 생각이 달라지기라도 했어?”
‘왜? 왜 결혼을 미루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생겼을까?’
정희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물었지만, 영수는 기회다 싶어서 말을 꺼냈다.
“우리 조금 천천히 결혼하면 안 될까?”
“……!!”
“아직 정희는 젊은데 벌써 결혼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건….”
영수의 말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직장 동료들이 걱정이랍시고 해 줬던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요즘 골키퍼 있다고 볼 안 차는 사람도 있다니?’
“어떤 년이야….”
정희는 으르렁대며 말했다.
“뭐?”
“어떤 년이 오빠한테 꼬리 쳤냐고!! 확 그냥!”
“야야. 사람들이 다 본다. 목소리 좀 낮춰.”
“지금 그게 문제야? 내 서방을 여우 같은 년에게 뺏기게 생겼는데?”
“푸흐. 꼬리치긴 누가 꼬리 쳐. 나한테는 정희밖에 없는데.”
“…정말? 진심? 나 믿어 말어?”
“믿어라 좀. 내 동선은 회사랑 집이 전부야. 요즘은 자기와 데이트 하는 시간이 추가되긴 했지만….”
영수는 정희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참이나 입을 털어야 했다.
“…의심할 사람을 의심해야지. 나 일편단심 영수라고.”
“흠흠. 알았어. 요즘 당신 괜찮다는 사람이 많아서 걱정했단 말이야.”
“에이. 우리가 연인 사이인 걸 온 국민이 알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건 그렇고! 오빠는 왜 결혼을 천천히 하자는 건데? 얼토당토않은 핑계 대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이번에도 딴소리하면 나 진짜 울 거야.”
영수는 괜히 다른 이유를 들어 애인의 화를 돋우기보다 진심을 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 자기랑 연애하는 요즘이 너무 행복해.”
“아이참. 나도 좋기야 좋지. 히힛.”
“그래서 결혼을 자꾸 미루고 싶어지더라고. 결혼하면 우리 둘이 전부가 아니게 되잖아. 그럼 서로의 집안일도 신경 써야 하고…. 나보단 자기가 더하지 않겠어? 결혼을 뒤로 미루고 자기랑 알콩달콩 연애만 하고 싶었어.”
“흠흠… 참 좋은 생각이긴 한데, 오빠는 내 걱정도 안 해? 그렇게 느긋하게 생각하다 딴 놈이 나타나서 날 채가면 어쩔 건데?”
“연애하면서 도망갈 사람이라면 결혼한다고 다를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연애하면서 바람을 피운다면 언제든 그 버릇이 도지게 되어 있다. 차라리 연애 중에 일이 생겨서 정리할 수 있다면 조상님이 도왔다고 생각해야 했다.
“오빠. 지금 날 뭘로 보고….”
“어허. 그만큼 자기를 믿는다는 말이야. 내 믿음이 틀렸다면 그건 내가 감당할 몫이니 당신 잘못도 아니지.”
“…….”
영수의 말이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정희는 자신이 아니라 영수가 다른 여자를 만나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의심만 가득했었다. 믿음의 크기가 사랑의 크기처럼 느껴졌다.
“…오빠는 어쩜 마음도 그렇게 넓어? 난 한참 부족하잖아? 쳇.”
“마음이 넓은 게 아니라 정희에게 너무 깊이 빠진 탓이지. 다른 건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어. 내 눈엔 너만 보이거든.”
오글거리는 멘트도 서슴없이 던지는 이들은 연애 초기의 바퀴벌레 한 쌍이다.
“헤.”
정희는 달콤한 사랑의 말에 흠뻑 빠졌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에잇! 난 아무래도 안 되겠어. 도장 쾅쾅 찍고 부부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빨리 날 잡자.”
“돌고 돌아 결국 결혼이야?”
“내 꺼라고 침 발라 놓을 거야. 아주 확실하게.”
“흐응. 아직 덜 발랐나? 그럼… 오늘도?”
아까는 남들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정희가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자 오빠. 아직 사람들이 우릴 보는 것 같아.”
소곤거리는 정희를 따라 영수도 조그맣게 말했다.
“오늘은 좀 멀리 가자. 이쪽 근방에 회사 사람들이 많더라고.”
“그래? 근데 멀리 가려면 지하철 타고 가야 하나?”
“근처에 차 대 놨어.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