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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쇼핑을 끝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영수 씨. 나 회사 밖이에요.”
-오늘 일찍 끝날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
“매번 보는 커피숍으로 와요.”
-오~ 케이!
.
.
.
영수는 정희 곁에 놓인 쇼핑백 더미가 눈에 띄었다.
“오늘은 간만에 쇼핑했나 보네? 잘했다.”
“사모님도 만났어요.”
아현을 만났다는 말에 영수는 괜히 심술이 났다.
“얘는 걸핏하면 올케언니를 오라 가라야? 다음에 부르면 못 간다고 해.”
“덕분에 일찍 끝나고 쉬었으니 잘됐죠. 사장님한테 연락해 줘서 오후는 프리 패스했어요.”
“그래? 그건 잘했네.”
정희는 가득한 쇼핑백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나 너무 많이 사지 않았어요? 과소비하는 여자 별로죠?”
“괜찮아. 사고 싶은 거 많으면 좋지.”
“…….”
정희는 뾰족한 눈으로 영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 천만 원 넘어가는 롤렉스시계도 있는데?”
“와아. 우리 정희 손이 크네.”
“손이 크다는 반응이 전부?”
“그럼?”
이제 영수도 자신의 자금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1조 원이 있는데, 천만 원은 대수롭지 않았다.
“당신 월급하고 내 월급 더해도 이 정도 지출을 감당할 수 없잖아요. 내가 매달 이렇게 쓰면 어쩔 건데요?”
“그야….”
아직 10억 달러가 들어 있는 계좌를 보여 주지 못했다. 결혼 후에나 알려 줄 생각이었다.
“아. 나중에 알려 주려고 했는데….”
“말해 봐요. 뭔데요?”
“당신한테 얘기 안 한 돈이 조금 더 있어.”
“조오금? 지금 조금이라고 했어요?”
정희가 바짝 독이 올라서 묻자 영수는 기겁했다.
“어….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휴우. 화낼 일은 아니잖아. 아직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했어.’
다시 마음을 가라앉힌 정희는 얼른 말을 돌렸다.
“이거 다 오늘 선물 받았어요. 부회장님한테요.”
“매제가 줬어? 아현이만 따로 만난 게 아니구나? 그럼 그렇지. 정희 씨가 함부로 돈 쓸 사람이 아니지.”
“그리고 부회장님이 저한테 사업하라고 하던데요?”
“사업?”
“화장품 사업이요. 앞으로 미래를 위해서는 사업을 하는 편이 좋다고 하셨어요.”
영수는 정희가 전해 주는 말을 종합해 결론 내렸다.
“매제가 하라면 해야지. 매제는 사업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믿어도 되거든.”
정희는 다 알면서도 확인 차원에서 다시 물었다.
“영수 씨가 숨겨 둔 돈 얼만데요? 정확하게 말해요. 그래야 우리가 같이 사업을 시작하죠.”
“…한 10억….”
“달러요? 허! 기가 막혀서 정말.”
“어? 어떻게 알았어?”
“하아…. 지금 그게 중요해요? 말해 봐요! 어디서 났어요?”
“그,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매제가 가족들에게 그냥 뿌린 돈이라…. 정말이라니까. 매제가 그냥 줬어. 나 달라고 안 했다. 정말이야!”
“부, 부회장님이 주셨다고요? 그것도 그냥?”
정희도 이 얘긴 듣지 못했다.
지금까지 영수가 자기 몰래 다른 사업을 해서 번 돈인 줄로만 알았다. 화장품 사업 얘기나 회사 경영에 관한 얘기도 영수의 다른 신분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꺼냈다고 착각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영수에게 화가 나 있었다. 회사와 사업을 병행하면서 이 여자 저 여자 다 만나 봤을 거라 추측했고, 자신도 그중의 하나가 된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래. 달라고 한 적 없었는데, 해외 계좌를 만들어서 줘 버리더라고. 나도 얼마나 황당했나 몰라.”
“…정말 감당도 안 되는 분이셨네요.”
정희는 영수가 사업을 일으킨 적이 없다는 말에 안도하면서도 걱정이 들었다.
오늘 쇼핑한 물건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생활 수준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처음 영수의 집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저택에 놀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예비 시누이가 사 준 집이라고 했었다.
오늘 일도 정희는 처음 겪는 일이다. 백화점 VIP들이 어떻게 쇼핑하는지 처음 알게 됐다. 낑낑거리면서 쇼핑백을 들고 다니지 않고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가며 물건을 고르지도 않았다. 앉아 있으면 직원들이 알아서 상품을 들고 왔다가 들고 나갔고, 손가락으로 “이거, 저거.” 선택만 하면 차에 실어 줬다. 직원들은 물론이고 백화점 사장까지 가는 길을 배웅해 줬다. 귀족이 된 기분이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손에 가득 들린 쇼핑백은 무거웠고, 돌아가야 할 길은 너무나 멀었다.
그 먼 길이 마치 영수와 자신의 차이처럼 느껴졌다.
10억 달러는 정희와 부모님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돈이다.
“…내가 신혼집이라도 사야 할까요? 요즘 아파트값 막 오르던데 큰일이네.”
이런 집에 시집가려면 최소한의 혼수로 집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부모님은 살고 계신 집을 팔아서라도 마련해 주겠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결혼을 꼭 해야 하나….’
부쩍 마음이 약해졌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바라보다가 목만 부러지는 건 아닐까?’
“벌써 내 명의로 집은 갖고 있지. 마당 딸린 2층 단독 주택이야. 우리 집이 한남동으로 이사 가면서 기존 집은 내 명의로 돌렸어.”
“…….”
“지은 지 좀 됐지만, 얼마 전에 리모델링해서 깔끔해. 안에 살림살이도 그대로 있어서 우리는 그냥 들어가서 살면 돼.”
영수는 다 준비된 사람이었다. 정희의 절망감이 더해졌다.
“나는 몸만 와라?”
생각 없이 친구들에게 고민을 말했다간 몰매를 맞을 수도 있었다. 남편 될 사람은 거액의 자산가에 집안은 강운 그룹 로열 패밀리, 결혼에 혼수도 필요 없이 몸만 오라는 집안이다. 이런 애길 고민이라고 꺼냈다간 몰매로 끝이 아니라 절연까지도 각오해야 했다. 이런 친구는 곁에 있기만 해도 주변을 비교의 불행에 빠트리기 때문이다.
“그럼 안 되나?”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해요?”
“왜? 아현이도 매제랑 결혼할 때 아무것도 안 했어. 괜찮아.”
“…….”
‘강운 그룹 맏며느리가 되면서도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게 말이 되나?’
자신을 위해 영수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거나 받아요.”
정희는 받아 온 선물 중에 영수 몫의 물건들을 건네줬다. 지독하게 무거웠던 쇼핑백이다.
“헐. 이걸 다?”
시계는 하나가 아니었다. 롤렉스 시계가 가장 하위 브랜드였고, 그 윗줄로 쳐 주는 브랜드의 시계들이 몇 개 더 있었다.
“블랑팡? 피아제? 브레게도 있었어?”
“당신 시계는 잘 아네?”
영수는 평소 꿈만 꾸던 시계들을 소유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차는 직장 때문에라도 낮은 등급을 타겠지만, 시계만큼은 마음대로 사고 싶었다.
“조만간에 사 볼까 생각하긴 했거든.”
차마 엄두가 나지 않기는 했다. 시계가 집과 차보다 비쌀 수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신 혼수에서 시계는 빼도 되겠다. 비싼 시계만 잔뜩이네. 역시 매제가 눈이 높아.”
“내 혼수라고 말하면서 왜 영수 씨가 사려고 했어요?”
“당신이 해 줬다고 하면 되잖아. 그걸로 혼수 퉁 치려고 했지.”
“…….”
그래도 언제나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었다. 절망 속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보였다.
‘언제 혼수까지 다 따져 봤담…. 이렇게 날 많이 생각해 주는 당신인데….’
평소 정희와의 미래를 생각하며 자식을 몇 낳을지까지 상상하는 영수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큼. 그래서 우리 결혼은 언제 할까?”
영수는 얘기가 나온 참에 한발 더 나아갔다. 결혼은 서로가 당연하게 한다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시기는 결정하지 않고 있었다.
“무, 무슨 소리예요? 결혼이라니? 나 아직 청혼도 못 받았거든요?”
청혼도 못 받고 결혼하는 건 좀 아니다 싶었지만, 받아 온 선물이 쥐약이다.
“에헤이. 동생 아현이를 시누이라고 부르고 매제에게 선물까지 받아 놓고 입을 씻으시겠다? 그리고 아까 신혼집을 혼수로 얘기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인가?”
“…….”
“빨리 상견례부터 잡자. 그래야 내년 봄에 결혼식을 올리지.”
“…난 몰라요.”
“흐흣. 얼른 하자. 응?”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걱정이 컸다.
‘빨리 청혼해야겠다. 이러다가 나중에 두고두고 책잡히지.’
회사 내에서 부장님과 차장님께 많이 들어 봤다. 청혼을 제대로 안 하면 평생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 * *
수안은 집무실에 일하던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
“어휴. 형님이 전화를 다 주시고요?”
-매제님. 선물이 너무 과하셨어요.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형님.”
정말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수안이다. 괜히 다 산다고 해서 집 안에 시계들이 차지하는 공간만 생기게 됐다. 백화점 사장이 시계 전용으로 맞춤 가구를 보내 준다고 했다.
-그래도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괜히 자리만 차지할 녀석들이라 전 오히려 홀가분합니다.”
-그래도 안 받으면 매제님 마음이 상할 테니 우선은 받겠습니다. 고맙게 잘 쓸게요.
“더 필요한 거 없어요? 이번에 생각 없이 사는 바람에 처치 곤란인 녀석들이 생겼거든요.”
-아휴. 아닙니다. 더 바라면 도둑놈이죠.
시계값만 2억을 넘었다. 정희가 받은 화장품과 액세서리까지 생각하면 최소한 3억 이상은 선물로 받았다. 여기서 더 바라면 진짜 도둑놈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도둑이 아니라 강도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
“형님. 어차피 뉴월드 백화점에서 사서 그 돈이 그 돈입니다.”
수안이 괜히 뉴월드 백화점으로 갔겠는가. 수안이 오늘 쇼핑으로 쓴 돈 대부분은 다시 강운 그룹으로 돌아온다.
-정희 씨 선물도 감사하긴 한데, 괜히 폐를 끼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네요.
“저는 형님이 잘사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두 분 잘 어울려요. 한 비서가 똑똑하고 지혜로운 직원이라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몰라요.”
일전에 2차 보고서를 받아 봤는데 사생활에서도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남동생 수용이 짝으로 고른다면 집안이 기울어 약간 걱정됐겠지만, 영수에겐 충분히 괜찮은 상대였다.
-저한테는 과분한 사람이죠.
“분하다니요. 형님과 정말 잘 어울립니다.”
-하하. 매제님께 들으니 더 기분이 좋습니다.
“결혼은 언제 하시려고요?”
-내년 초에 날 풀리면 할까 생각 중입니다. 아! 생각만입니다. 아직 상견례도 못 했으니까요.
“오오. 내년이면 금방이네요. 그럼 청혼은 끝내신 모양입니다?”
-그건 아직….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빨리해야 하는데….
“음….”
나중에 아내와의 10주년을 기념해 이벤트로 써먹으려 했었던 시나리오가 있었다.
“저한테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그 시나리오의 출처는 바로 과거의 기억.
일반인의 프러포즈와 유명 가수의 콜라보가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던 뮤직비디오였다. 수안은 당시의 노랫말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헙! 괜찮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해 주세요!
“원래 제가 써먹으려고 했는데, 형님께 드려야겠네요. 아내에게는 비밀입니다. 아셨죠?”
-알겠습니다. 절대로 말 안 하겠습니다.
아직 당시의 뮤비가 나오려면 10년도 넘게 남았고 그 곡은 아직 작곡 전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낼 곡을 가져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지금까지 사용한 디자인부터 다 문제였다.
“제가 더블 엔터를 통해서 프러포즈 이벤트를 기획하고 김기수 사장에게 일러두겠습니다.”
-더블 엔터를 통해서요? 규모가 너무 크지 않나요?
“크긴 뭐가 큽니까. 아주 작은 공간에서 진행할 생각입니다.”
-오오. 아기자기한 이벤트가 좋죠. 전 뭘 할까요?
“형님은 노래할 준비나 하세요.”
-노, 노래요?
<『재벌가에 끼어들었다』 11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