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에 걸맞는 소비
아현이 배영성에게 보내 준 최근 사진 중 하나였다. 바로 캠프 데이비드에서 현장 학습을 한다며 돌아다니다가 찍은 사진이다. 정원이와 경호원들이 도둑과 경찰처럼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경호팀 관리자인 케인이 손가락으로 총을 만들고 활짝 웃고 있었고, 정원이는 앞에서 엉뚱한 방향을 보며 경계하는 모습이다.
┗야 너두? 나두!
┗외국 사람이 동양인 얼굴을 구분 못 하듯이 우리도 쟤들 구분 못 함. 니들이 쟤를 어떻게 암?
┗어라? 나 저 사람 기사 사진에서 봤어! 김대준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뉴욕에서 정상 회담했다고 기사 나왔잖아. 선글라스 쓴 미국 측 경호원이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미국 대통령 경호원이 왜 정원이를 경호하고 있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강수안 부회장 아들이 미국 대통령이라도 됐다니?
┗정원이 사진 뒤에 작게 보이는 건물이 되게 독특함. 어딘지 아는 사람 있나? 국내는 아닌 듯.
┗위에 클린턴 대통령 경호원이라고 하니까 어딘지 생각났다. 저기 캠프 데이비드. 가끔 국제 뉴스에 사진으로 나오는 곳. 평소 미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 지도자 초청해서 정상회담 하는 장소임. 미국 대통령이 휴가용 별장으로 사용하기도 함. 거의 확실해.
┗그럼…. 강수안 부회장이 클린턴 대통령 만나러 간 거?
┗100%다. 그러니까 정원이를 미국 대통령 경호원이 경호하지. 클린턴 대통령하고 강수안 부회장은 무슨 얘기를 했을까?
┗노력하는 천재가 운동도 잘하고 집은 재벌이고 노래도 잘 부르는 데다가 아내는 최고 인기의 여배우, 자식은 당연히 잘났고, 아버지가 의인이고 미국 대통령하고 친하면 강수안.
논란을 잠재우려 내보낸 특별 인터뷰가 오히려 논란을 키우고 있었다.
* * *
수안은 호주 시드니에서 성화 봉송에 잠시 참여하고 개막식에서도 자리를 지켰다. 자신을 주시하는 기자들이 많았기에 표정 관리를 하며 초청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진지하게 개막식을 지켜봤다.
주머니 안에 휴대 전화가 짧게 진동하며 문자가 왔음을 알렸다. 수안은 잠시 몸을 돌려 휴대 전화 화면을 확인했다.
배영성이 밖에서 연락을 받고 문자를 남긴 것이다.
[SBS 특별 인터뷰에 캠프 데이비드 노출. 포털사이트에 퍼지고 있음.]
“…….”
수안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BE를 밝히려면 떡밥을 남겨 둬야지.’
[대응하지 말고 그냥 둬. 어차피 BE도 밝혀야 하니까 그때 대응하기로 해.]
[예.]
수안은 개막식에 집중했다.
* * *
호주에서 돌아온 수안은 이현창에게 먼저 연락했다.
“장 비서가 선배님께 연락드리라고 난리네요?”
-요즘 자네 덕분에 시끄러워서 말이야. 캠프 데이비드 건은 이쪽에서 정리할까 해.
이현창은 수안이 BE 인베스트먼트의 실소유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장 비서를 통해 이번 캠프 데이비드 방문도 알고 있었다. 국내 포털사이트에서 수안의 캠프 데이비드가 알려지고 있어 배려 차원에서 제안하는 것이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냥 두셔도 됩니다. 어차피 BE 인베스트먼트 때문에라도 미국과의 일을 미리 알리고 싶었는데 잘됐죠.”
-그래? 이제 공개할 생각이야?
미국 정부에서 감춰 주고 있었고 한국의 국정원에서도 BE의 소유주를 숨겨 주고 있었다.
“좀 시끄러울 겁니다. 올해 대선 끝나고 나면 관련 정보가 풀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약간의 여유를 주겠다고 했던 클린턴이다.
-그래서 후배가 일을 키우고 있었구만. 어쨌든 캠프 데이비드로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항상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선배님도 이제 정계 복귀 시점을 가늠하시겠네요?”
-내후년에 서울시장 출마하려면 내년엔 복귀해야지. 내가 자리 비웠다고 요즘 한신당 꼴이 말이 아니야.
원래대로라면 김대준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강경하게 비판하고 발목을 잡고 늘어졌을 한신당이다. 지금은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 야당으로서의 존재감이 여당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겠으나, 그 외에는 존재감을 보일 만한 일이 많지 않은 것도 문제다.
“그래도 양당이 시끄럽지 않아 좋더군요.”
-내가 대선이 아니라 고작 서울시장 선거로 간다고 하면 또 난리 날 거야.
“민국당 인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대선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것도 자네 말대로 되질 않았겠나.
본래 16대 대통령 선거는 가까스로 민국당이 승리한다. 하지만 한신당이 희미한 존재감을 보이고 김대준의 정책 방향이 그대로 추진되는 중이라 민국당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었다. 향후 대선은 어렵지 않게 민국당의 박재문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현창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안의 말대로 서울시장을 시작으로 인기를 올리고 대선을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조용히 뒤에서 응원하겠습니다. 선배님.”
-자네는 너무 많이 응원해. 그새 또 늘었잖는가.
응원한다는 말은 선거 자금 비축을 이르는 말이었다. 일전에 800억이 넘게 모였다는 장세진의 보고를 받은 이후에도 10억, 20억씩 계속 늘어가고 있었다. 국내 비자금 계좌는 900억을 돌파했고 만들어 달라던 해외 계좌에도 천만 달러가 들어와 있었다. 잠깐 사이 200억이 늘어난 것이다.
“정치인이 충분한 자산을 소유하게 되면 자잘한 물욕이 사라집니다. 돈에 대한 욕심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을 수 있으니 좋은 일이죠. 당 내에서 영향력도 행사하실 수 있을 테고요.”
-하여간 말은 잘해.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년에 퇴임하시면 제대로 회포를 풀 어보죠.”
-크흐흐. 알았네. 부탁할 일 생기면 언제든 장 보좌관 불러서 시켜.
“예. 선배님.”
통화를 마친 수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인터폰으로 장 비서를 찾았다.
삐익.
-예. 부회장님. 장세진입니다.
“잠깐 들어와 봐.”
-예.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소파에 앉은 수안은 쌍화차를 마시며 물었다.
“장 비서는 돈 많이 모았어? 결혼도 생각할 나이 아닌가?”
“일전에 저축한 돈을 BE 펀드에 넣었는데 상당히 불어났습니다.”
“BE 펀드라면 선택 잘했는데? 그래서 지금은 얼마야?”
“평가금액이 5억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오오. 초기 자본금이 상당했네?”
장 비서의 펀드 금액은 사전에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앞으로 던질 질문을 위해 정보를 주고받는 단계였다.
“원장님이 따로 주시는 용돈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줘야지.’
이현창의 수백억 비자금을 관리하는 장세진이다. 충성심만으로는 신뢰가 부족하니 돈으로 나머지를 채워줘야 했다.
이현창은 돈을 줌으로써 장세진을 신뢰할 수 있었다. 장세진도 돈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따르는 사람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내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장 비서를 불렀어.”
“예. 말씀하십시오.”
“지금 장 비서에겐 5억이라는 큰돈이 있어. 집도 사고 차도 살 수 있는 돈이지. 그런데 100억이 또 생겼다고 생각해 보자.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야. 장 비서는 뭘 사고 싶어?”
“…상당히 불편한 상상입니다.”
“불편해?”
“사실 처음 여유 자금을 펀드에 넣은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여유 자금을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개인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돈보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하는 일로 인해서 업무가 완벽하게 돌아가면 성취감을 느낍니다. 돈은 부수적일 뿐이죠.”
‘…지독한 워커홀릭. 질문 상대를 잘못 골랐네.’
수안은 강운모 회장에게 돈을 쓰는 법을 배우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소비를 들어 보며 배울 생각이었다. 물론 수안과 비슷한 재벌가 자제들을 만나 물어볼 수 있겠으나, 그들의 소비 행태는 따르고 싶지 않았다.
술과 여자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여기에 100억이 또 생긴다는 상상만으로 가슴에 돌덩이가 올라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돈이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부회장님이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따로 관리하겠습니다.”
“아. 장 비서에게 준다는 말은 아니야. 그냥 다른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뭘 갖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어.”
“다행입니다.”
“더블 스타로 가자. 김현성 사장과 차라도 한잔해야겠다.”
“예. 운전기사 준비시키겠습니다.”
* * *
김현성 사장은 수안의 질문에 생각에 잠겼다. 돈을 벌기만 하고 쓰지 못해 앞으로 소비를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
“좀 이상하지? 돈은 많은데 쓸 곳을 모르겠다니 말이야.”
“좋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무분별한 소비는 지탄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내가 쓰면 다 무분별한 소비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한 번 쓰면 억 단위로 쓸 텐데?”
“…그야 그렇지만, 회장님이 소비하는 걸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리고 회장님은 합리적인 소비를 하실 분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 허투루 돈 쓰는 거 질색하잖아.”
“솔직히 해외 부자들의 경우 외부 시선에서 자유로운 편입니다. 억만장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죠. 그들의 수준에 맞는 소비를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도 자신의 소비 패턴을 자산 규모에 맞춥니다. 수천억을 버는 이들은 수십억을 몇만 원 쓰듯이 소비합니다. 회장님의 경우엔….”
수안은 매년 수십조를 벌어들인다. 특히 올해는 지분을 매각하며 4천억 달러를 벌어들인 상태. 여기다 IT 닷컴 버블 사태로 추가 소득까지 올렸다.
“…….”
배당으로 2억 달러를 벌었다고 5백만 달러가 넘는 보석류와 스포츠카를 구입한 영국의 부호가 떠올랐다. 수안이 그와 같은 비율로 쓰려면 10조 원을 넘게 소비해야 맞았다.
“왜? 아니다 싶어?”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부호를 위한 맞춤 쇼핑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도 수준이 너무 낮습니다. 회장님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소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 단위 자산가의 소비는 다시 투자로 이어지곤 하죠. 기업과 땅, 권리에 투자하고 투자는 다시 이익으로 돌아옵니다.”
“악순환이네.”
“선순환이라고 해야 맞겠죠. 돈이 돈을 불러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결과입니다.”
“내가 바로 양극화의 주범이잖아. 돈을 벌면서 그에 걸맞은 소비는 못 하고 있으니까. 내가 소비를 했다 치자. 그 돈이 일반에 퍼질 수 있어? 식당에 가서 한 번에 100인분을 먹기라도 하나? 일반인은 내 돈의 냄새도 못 맡아. 귀중품을 파는 기업이나 부호를 전문으로 상대하는 중개업자들만 배가 터지도록 먹겠지. 낙수 효과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
“맞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비싼 술을 먹고 비싼 음식과 쇼핑을 즐겨도 회장님의 돈은 순환하지 않습니다. 그사이 이자가 더 불어나 있을 겁니다. 완벽하게 고여 있죠.”
“고여 있다라….”
“또한 회장님의 자금은 계속해서 재투자되겠죠.”
“고작 숫자일 뿐인데 이 숫자가 날 골치 아프게 하네.”
숫자가 주르륵 늘어서 있는 디지털화폐. 계좌의 잔액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숫자는 날마다 더해지며 불려 나가기만 하고 내려가질 않는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수안이 아무리 써 봤자 돌아서면 이자가 소비로 내려간 숫자를 복구할 것이다.
김현성은 엉뚱한 고민이 이어지지 않도록 대안을 제시했다.
“회장님. 회장님은 우선 흥미 있는 분야를 찾는 것이 우선일 것 같습니다.”
“…흥미?”
“부호들은 나름의 소비 패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과 경마에 깊이 빠져 있죠. 품종이 좋은 말을 사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당연히 말들이 뛰어놀 수 있는 거대한 초지를 확보하고 있죠. 좋아하는 분야에 돈을 쓰는 건 아깝지 않습니다.”
“흐음.”
“어떤 사람은 고성능 차량에 관심이 많고, 어떤 사람은 반짝이는 보석에 관심이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관심이 많죠. 예를 들면 정치인이 있겠습니다.”
“정치인은 돈과 권력 둘 다라고 해야 맞지.”
“그래서 회장님도 선호 분야를 먼저 파악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관심을 가졌던 부분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가족을 중시하는 회장님이지만, 그 부분은 제외하기로 하죠.”
“왜?”
“이미 많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젠 회장님 스스로를 위해 소비할 때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깊으셨던 거 아닙니까?”
“…맞지. 맞아.”
“그리고 앞으로 회장님이 사회 소외 계층을 위한 기부를 줄일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정답.”
“회장님이 가장 먼저 파악하셔야 하는 건 뭘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가 입니다. 취미로 삼을 만한 일들을 하나씩 경험해 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일전에 이방효 사장이 클레이 사격을 위한 명품 샷건을 준비해 뒀다고 들었습니다. 해 보셨습니까?”
“그럴 정신이 어딨어. 로버트 회장이나 이방효 사장이나 다 바쁘고 나도 바빠서 못 했지.”
“해 보십시오. 호화 요트도 타 보시고 새로운 스포츠도 즐겨 보십시오. 세상에 돈 쓸 구석이 한둘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회장님은 가족만 바라보셨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것뿐입니다.”
“역시 김 사장과 상의하길 잘했네.”
“그럼 뭐부터 준비할까요.”
“준비는 무슨. 같이 해야지.”
“네?”
“나 혼자 무슨 재미야?”
“…저도요?”
“배 사장이랑 김 사장 다 데리고 다닐 거야. 배 사장 들어오라고 해. 같이 할 것들을 추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