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핀
수안은 아들과 딸의 손을 붙잡고 캠프 데이비드를 쏘다니며 현장 학습을 열심히 수행했다.
“아빠! 이건 뭐야?”
“아빠도 같이 보자. 관찰!”
수안은 정원이와 잡초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있었고, 나현이는 엄마 손을 붙잡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 풀의 이름은 케인이라고 지을 거야.”
“케인?”
“여긴 미국이잖아. 미국식 이름을 지어 줘야지.”
“오오. 우리 정원이 똑똑한데?”
케인을 시작으로 알 수 없는 식물에 데이비드와 폴 등의 이름을 붙여 주며 돌아다녔다. 뒤따르던 경호처 직원들 얼굴이 오묘했다.
“…….”
“…….”
“…….”
그 경호원들의 이름이 바로 케인과 데이비드, 폴이었기 때문이다. 정원이 눈을 반짝이며 이름을 물어봐서 알려 줬더니 엉뚱한 식물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여 주고 있었다.
“오! 여기 하얀 꽃이 있어요. 이 꽃은 클린턴!”
“푸하하.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당신 곧 골프 간다고 안 했어요?”
“가야지. 좀 있으면 데리러 올 거야.”
수안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수안을 데리러 지미가 도착했다.
“지미! 무거운 엉덩이로 여기까지 왔어요?”
“헥 헥. 왜 이렇게 멀리 나왔습니까? 한참 왔잖아요.”
“돌아가는 길은 뛰어서 갑시다. 지미는 운동이 필요하니까요.”
“아악! 같이 갑시다!”
.
.
.
클린턴과의 골프에서 수안은 봐주는 것 없이 온 힘을 다했다.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왼쪽 어깨가 먼저 달려 나가는데요?”
아이언에서 자꾸 엎어 치는 스윙이 나오고 있었다.
“어깨?”
“자. 이렇게 해 보죠. 어드레스 상태에서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임팩트 시점에도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겁니다. 임팩트 시점 바로 다음에 스윙을 멈춘다고 가정하고 스윙을 해 보세요.”
수안의 조언을 그대로 수행한 클린턴은 훨씬 깨끗한 스윙과 임팩트를 보여 주며 공을 멀리 보냈다.
“오오.”
“굿 샷.”
“스윙이 짧았는데도 오히려 더 멀리 나갔어.”
“정타를 맞았으니까요. 이제 재미있어지겠네요.”
골프는 물론 재미있었다. 클린턴은 크게 지고 말았지만, 수안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졌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스티븐은 육상이 아니라 골프를 해도 잘했겠어.”
“다음엔 한국에 와서 설욕하시죠. 제가 특별 강연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내 부수입까지 챙겨 준단 말인가? 강연료는 톡톡히 받아 내겠네.”
“물론입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을 초청해 강연을 부탁하는데 몇억이 대수겠는가. 강운 그룹 직원들을 강당에 모아 강연을 보여 주고 SBS 특별 방송을 편성해서 뽕을 뽑아먹을 수도 있었다.
‘TV 광고 수입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플러스가 나겠는데?’
자리를 옮겨 잠시 쉬는 시간, 클린턴은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스티븐 회장의 향후 행보를 알려 줄 수 있겠나? 물론 민감하고 중요한 일은 제외하고 말일세.”
“…….”
알려 주지 못할 것도 없다. 이미 많은 돈을 벌었고 또 벌게 될 투자 회사였다. 하지만 클린턴의 의문은 고작 돈으로 측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 것이다.
“BE는 미국에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거대 투자 은행을 굴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영향력이 커지겠지만, 목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건 좋은 일이군.”
그 영향력을 미국이 대신 행사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기업이 영속성을 갖기 위해선 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주변 환경을 지켜야 하죠. 그래서 BE는 생명 공학과 환경을 중심으로 향후 투자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오랜 투자가 필요하겠지만, 인류의 존속, 국가와 기업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오. 스티븐 회장의 투자 철학을 이제야 듣는군. 감명 깊은 말이었네.”
“지금까지 BE의 행보는 이를 위한 준비 단계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 BE는 그렇게 이해하도록 하지. 하지만 강운 그룹도 궁금해지는군.”
클린턴의 질문은 BE가 아닌 수안이 중심이었다. 넓게 보면 강운 그룹까지 포함해야 했다.
“…….”
강운 그룹이 생산하는 제품들은 미국을 포함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특히 기화 자동차를 시작으로 저렴하고 좋은 성능을 가진 제품들을 해외 시장에 선보일 예정이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휴대 전화까지 이어지는 라인 업은 향후 강운 그룹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을 효자 상품들이다.
“설마 강운 그룹을 경계하고 계신 건 아니죠? 강운 그룹은 변방의 작은 기업일 뿐입니다. BE에 비해서도 그렇지만, 미국의 거대 기업에 비하면 아주 작죠.”
“자동차 산업은 미국의 핵심이야. 벌써 앓는 소리가 나오고 있어.”
“…저런.”
“미국과 한국의 FTA(Free Trade Agreement: 자유 무역 협정)는 일각에서 계속 논의 중이지. 아마도 다음 정부에서는 실질적인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가장 큰 혜택은 바로 자동차가 될 거야. 그러니 미국 내 자동차 업계가 미리부터 난리를 피우는 거야.”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차량의 관세가 낮아지면 경쟁력이 더욱 높아진다. 수안은 다음 정부의 대통령 인수위부터 한미FTA가 논의됨을 기억하고 있었다.
‘앞으로 2년 남았군.’
2003년부터 시작하는 정부의 FTA 협정은 진통 끝에 통과되었지만, 이후 다음 정권에서 광우병과 관련된 30개월 이상의 소에 관해서도 수입한다는 내용으로 다시 불붙는다. 한미FTA를 재추진하고자 하는 미국의 요청을 들어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기억해 주십시오. 강운 그룹이 더 많은 지분을 갖고 있고 제가 최고 경영자 자리를 맡았지만, 기화 자동차의 지분은 BE에서도 갖고 있답니다. 미국에도 기화 자동차 공장을 짓고 고용을 유발하겠습니다. 강운 그룹의 전자 제품 공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운이 미국에 판매할 제품은 미국에서 생산하고 소비합니다.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겁니다.”
“내주는 것이 있다면 양보도 받아야겠지?”
“그 부분은 정부와 협상하시죠. 저는 장사치일 뿐이니까요.”
“혜택은 국가에 미루겠다는 뜻인가?”
“제가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양보가 아닙니다. 미국 시장에 쉽게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일 뿐이죠. 조금 더 빡빡하게 계산해 주시죠. 너무 여유로워서 자꾸만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습니까.”
“스티븐과 대화하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야.”
물론 기분 좋은 방향으로 숨이 막힌다. 이렇게 호의적인 기업가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푸흐흐. 어차피 올해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 제 양보는 모두 공화당이 차지할 겁니다. 대가도 공화당에서 받기로 하죠.”
“그도 그렇군. 난 기분만 내면 되겠어.”
말년 병장이나 다름없는 말년 대통령이다. 대통령 대부분이 겪는다는 레임덕도 거의 없었다.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이 없었기 때문인지 지지율이 80%를 넘고 있었다. 편안하게 마지막 해를 보내고 내년 초 정권을 이양하는 것으로 클린턴의 정치 인생은 마지막이었다.
“아직 이렇게 젊으신데 아쉽지 않으십니까?”
“아쉽지. 올해로 겨우 54살이야. 남들은 정치에 막 뛰어들기도 할 나이인데 난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이잖나.”
수안은 클린턴이 과거를 회상할 수 있도록 예전의 일을 꺼냈다.
“임기 중에 힐러리 여사께서 주도했던 국민 의료보험 도입은 정말 아쉬웠습니다.”
“의료계와 보험사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거든. 그때는 말이지….”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향후 설립할 자선재단에 관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자선재단을 설립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군요?”
“아까 자네가 생명 공학과 환경을 얘기할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를 거야. 나와 정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꼈거든. 자네는 내가 설립할 재단에 기부해 주겠지?”
“당연하죠. 대신 재단을 설립하시고 가장 먼저 찾아와 주십시오. 다른 어떤 기업보다 많은 기부금을 집행하고 인류 생명과 환경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자네는 퇴임이 두렵지 않게 만들어 주는군. 좋아! 첫 자선 모임에 스티븐 회장을 꼭 초대하겠네.”
* * *
이후 2주간의 휴가는 정말 꿀 같은 시간이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스치고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도 여유를 가득 머금은 듯했다. 아내와 해변을 거니는 시간과 여유로운 낮잠 시간도 좋았다. 정원이와 나현이는 날마다 바닷가를 뛰어놀아 온몸이 새카맣게 타 버렸지만, 그래도 좋다고 웃어 댔다.
그런 꿈같은 휴가는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2주 휴가가 이렇게 짧게 느껴질 줄이야.”
“일찍 들어가셔도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업무가 산적해 있습니다.”
배 사장은 책상에 쌓인 결재 서류를 오늘 다 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더블 스타 결재는 김현성 사장과 제가 대신 처리했습니다.”
“굿.”
“기화 자동차는 직접 가 보셔야 합니다.”
“그건 배드.”
“휴가 전에 배터리 연구소에도 지시할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휴가 끝나면 꼭 다시 알려 달라고 하셨고요.”
“아. 그랬지.”
그래핀과 실리콘을 이용한 리튬이온 배터리의 성능 향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특히 그래핀이라는 용어가 생소할 터였다. 본래는 2004년에 영국의 학자가 발견하게 되겠지만, 이번엔 강운 그룹 연구소에서 실용 그래핀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는 부분이 중요했다. 그라파이트(흑연, Graphite)에서 그래핀을 추출하는 방법은 솔직히 너무 간단했다. 스카치테이프 한 장이면 충분했다. 이후 구리 호일에 그래핀을 합성하는 방법과 드라이아이스를 이용하는 방법, 대면적 성장을 위한 웨이퍼 공법과 세제와 믹서기를 이용하는 방법까지 개발되었다. 수안은 이 모든 것을 간단하게 정리해 둔 상태였다.
그 이후의 배터리 성능 향상의 자세한 원리까지는 수안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의 일은 연구소에서 처리해야 했다.
수안은 얼른 일전에 정리해 둔 자료를 메일로 첨부해 발송하고 결재 서류를 처리해 나갔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강운 전자 배터리 연구소의 연구소장과 연구원들은 그들이 추출한 단일 흑연층의 놀라운 성능에 모두 입만 벌리고 있었다.
“…….”
“…….”
“…….”
“…….”
강운 전자 배터리 연구소 일동은 부회장의 지시에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도출된 결과물이 심각할 정도로 대단했다.
“이, 이게 대체….”
“그라파이트(흑연, Graphite)에서 추출한 단일 흑연층, 그래핀(Graphene)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죠.”
“누가 그걸 몰라? 인장강도가 이게 말이 되냔 말이야!”
“인장강도 130GPa, 탄성계수 1TPa 정도로 나왔습니다. 강철보다 수백 배 단단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모델이었는데, 저희가 그 이론을 실체화했습니다. 우리 연구소에서 노벨상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영국의 학자는 이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았었다. 한국에서 4년 이르게 발견했으니 이제 영국의 학자가 노벨상을 받을 일은 없었다.
“고작 스카치테이프 하나로….”
“다른 방법도 다 되는 거 아닐까요?”
구리 호일 대면적 합성법, 드라이아이스 분리법, 대면적 단결정 성장법, 주방 세제와 믹서기를 사용한 해괴한 방법까지 적혀 있었다. 이번 결과물을 확인하기 전엔 괴짜 부회장님의 엉뚱한 상상으로 치부했지만, 지금은 전부 보물처럼 보였다.
이번에 그래핀을 추출한 공법이 고작 스카치테이프 공법이었으니까.
“다 해 봐! 그리고 관련 자료 확실하게 구비해서 논문 준비하고 관련 특허 뽑아내! 우리도 이번에 포상금 받아 보자!”
“…이거 부회장님이 개발했잖아요.”
이들은 지시대로 연구를 수행하고 절차대로 검사를 시행한 것이 전부였다.
“4%는 부회장님 몫. 우리는 1%. 다른 연구소에서도 이렇게 해.”
다른 연구소에서도 부회장님이 끼어들면 무조건 4%를 할당했었다. 밖에서 볼 때는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겪어보니 알 수 있었다. 연구원들은 지시대로 수행한 것이 전부다. 핵심 연구는 모두 부회장님 몫이었다.
“예! 소장님!”
그래핀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소재다. 특히 반도체,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전극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룩할 신소재였다. 이 소재를 한국에서 처음 발견하게 되었다. 예전에도 한국은 그래핀 응용 면에서 세계를 선도했지만, 이젠 그래핀의 시작부터 선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