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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존재감 사이 (207/304)

겸손과 존재감 사이

“정원이는 준비됐지?”

“네에! 아빠!”

비행기에서 충분히 쉬고 내렸기에 아들의 컨디션은 최상이다.

“가서 이것저것 많이 보고 배워야 해? 알았지?”

“응!”

대통령을 경호하는 인원들이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잘 지켜줄 수 있죠?”

클락슨을 비롯한 경호원들이 있지만, 캠프 데이비드 내에서는 이들의 통제에 따라야 했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머무는 공간입니다. 위험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스티븐.”

“부탁합니다.”

“여보. 아이들하고 쉬고 있어. 사진도 물어봐 가면서 찍고.”

“알았어요. 다녀와요.”

아내와 잠시 작별을 고한 수안은 안내에 따라 클린턴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어서 오게. 스티븐.”

마중 나온 클린턴과 악수하고 안으로 들어가며 수안은 내실에 실무자들이 기다리는 풍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수안은 비행기 내에서 준비한 내용을 다시 기억하며 걸음을 옮겼다.

“…….”

“여긴 내 아내 힐러리라네.”

“반갑습니다. 영부인.”

“반가워요. 스티븐.”

“아내와 아이들은 어쩌고 혼자 왔나? 같이 온다고 들었네만.”

“…중요한 대화가 오갈 것 같아서 나중에 오라고 했습니다.”

“저런, 자네가 착각한 모양이야.”

괜히 긴장했나 싶을 정도로 편안한 자리였다. 클린턴은 편안한 복장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힐러리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부호라고 들었어요.”

“좋은 사람들이 곁에서 도와줬기 때문입니다. 여기 대통령께서도 힐러리 여사님이 곁에서 도와주셔서 이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까.”

.

.

.

힐러리 여사가 자신의 부군인 클린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던 수안이다. 과거 클린턴은 주유소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고 말했었다고 한다.

“당신이 저 사람의 부인이었다면 주유소 사장의 아내가 되었을 거야.”

그랬더니 힐러리가 대답했다.

“설마요. 내가 저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면 저 사람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있겠죠. 당신은 저 자리에서 우리 차에 기름을 넣고 있을 테고요.”

그 말에 클린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르윈스키 스캔들 이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아내 앞에서 찍소리도 하기 힘들 때였다.

.

.

.

“호호호. 여보. 드디어 내 수고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네요.”

클린턴은 손을 휘젓고 수안에게 물었다.

“직접 보니 어때? 자네가 예전에 말했던 것과 같은가?”

수안은 클린턴이 뭘 물어보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떠올릴 수 있었다.

‘관상?’

아직도 당시에 관상이라는 핑계로 말해 줬던 내용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보니 더 확실합니다. 하늘의 거대한 힘이 힐러리 여사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구설수만 조심하시면 어렵지 않겠습니다.”

이미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을 막아냈다. 앞날에 드리운 검은 구름을 걷어냈으니 대권으로 향하는 길이 환하게 드러난 형국이다. 트럼프와의 대선 경쟁을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면 그걸로 족했다. 선거인단에선 밀렸더라도 미국의 유권자 과반수는 힐러리를 선택하지 않았겠는가. 아주 작은 차이로도 얼마든지 힐러리가 권좌에 앉을 수 있었다.

“으응?”

힐러리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클린턴을 보고 있었다.

“하하하. 이 사람이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다는군. 당신이 날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것처럼 나도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들 사람을 데려왔어. 스티븐은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맞히는 사람이야.”

“어머. 그거 정말 대단한 능력인데요? 당신이 많은 돈을 벌어들인 비밀이 바로 그거였어요.”

수안이 돈을 벌어들인 핵심이긴 하다. 미래를 보고 온 사람이니 알려지지 않은 과거를 맞추기도 쉽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미래도 알 수 있었으니까.

“제 가장 큰 비밀이 이렇게 탄로 나 버렸군요.”

“비밀을 지키도록 하죠. 나는 입이 무겁답니다.”

힐러리는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이 역시도 수안이 바라는 바였다.

그렇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 한마디 정도는 해 주고 싶었다.

“여성으로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긴 쉽지 않을 겁니다. 유약한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해 국방에 헌신하는 것도 하나의 준비가 될 수 있겠죠. 남자보다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여성 대통령! 하지만 여성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면 안 됩니다. 미국은 대통령을 원하는 것이지 여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모든 주에서 자만심을 버리고 끝까지 노력하십시오. Make America Great Again!”

가볍게 보이고 싶어 윙크까지 하며 검지로 힐러리를 가리켰다.

“큭. 독특한 분이셨네요.”

“흘려듣지 마. 당신도 정치에 관심이 많았잖아.”

“알았어요. 이제 당신도 일 얘기를 해야겠죠? 난 빠져줄게요. 당신의 아내를 보러 가야겠네요.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스티븐.”

“물론입니다. 미래의 프레지던트.”

“푸훗.”

힐러리 여사가 자리를 비웠고 클린턴과 단둘이 남았다.

“전혀 안 믿는 눈치야.”

이미 클린턴은 신비로운 능력(?)을 경험한 당사자였기에 수안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때가 되면 믿으실 겁니다.”

“…정말 된다는 거지?”

“반반이죠. 미래의 일을 누가 감히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차차기 대통령이 될 오바마가 누군가를 도발하지만 않는다면 무리 없이 당선될 것이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 트럼프였다. 오바마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트럼프를 비난했고 이 일로 트럼프는 정치권에 투신하기로 마음먹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미리 입조심을 좀 시켜야겠네.’

“자네는 확신하는 것 같네만?”

“저 혼자만 확신하는 거죠.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훗. 자리를 옮기지.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

클린턴을 따라 옮긴 자리에는 대통령의 핵심 참모들 일부와 오바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 수안이 예상했던 그 모습이다.

‘방심을 노렸나?’

확실히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대였다.

“지미도 있었군요. 반갑습니다.”

그렇다고 페이스가 흔들릴 수안이 아니다.

“회의는 간단하게 진행하고 우리도 빨리 쉬도록 하지.”

상대할 사람은 많았지만, 수안은 이미 대비되어 있었다.

“미국 금융가에선 BE가 취득한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의 막대한 지분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세 곳이 합병하면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한곳으로 몰리게 되니까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겠군요. 모건 스탠리나 골드만삭스는 그대로 유지될 겁니다. BE 인베스트먼트는 전통의 금융사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 생각이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티븐.”

“BE 인베스트먼트가 투자 회사란 것을 기억해 주세요. 어차피 지금도 지분만 취득했을 뿐입니다. 경영은 전문가에게 맡길 생각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건 스탠리와 골드만삭스 지분 가치가 상승하면 이익 실현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이미 출발하기 전에 논의된 사항들이 주류를 이뤘고, 비행기에서 복습한 내용까지 줄줄이 안건으로 논의되었다. 캠프 데이비드는 보통 일국의 총리나 지도자가 방문하는 곳이다. 중요한 외교적인 안건들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자리라는 말이다. BE 인베스트먼트의 회장인 수안은 그와 같은 수준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BE 인베스트먼트의 가치로 산정한 1조 6천억 달러를 생각하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매년 수천억 달러를 움직이는 BE 인베스트먼트는 어지간한 나라의 경제적인 수준과 맞먹었기 때문이다.

“지분을 되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주 좋은 제안입니다.”

인수한 BE의 지분에 관해 불만이 나왔고, 되파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는 중에 터진 수안의 발언이다.

“대신 미국엔 BE 본사를 둘 수 없겠습니다. 쉽게 말을 바꾸는 정부를 상대하는 건 내키지 않거든요.”

“…….”

“…….”

생각보다 공격적인 수안의 태도에 말을 꺼냈던 클린턴의 보좌관이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 온도가 영하로 내려간 기분이다.

미국과 한국은 다르다. 겸손의 미덕은 미국에서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잘났다는 티를 내줘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법인세 탕감을 되돌리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상관없습니다. BE는 법인세를 내지만, 자유를 얻게 되겠군요. 향후 이득을 생각하면 손해가 아닐 것 같습니다.”

정부가 BE 인베스트먼트에서 납부할 법인세를 포기하긴 쉽지 않다는 예측이 있었다. 지분 인수를 되돌리는 척하며 기존 협상을 수정하고자 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있었기에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클린턴은 작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 부분은 논의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지분에 관한 대화는 없었던 것으로 하죠.”

“어차피 넘기실 지분이라면 지금 넘기시죠? 괜히 다음 정부에서 또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느니 지금 이 자리에서 정리하고 싶군요.”

“BE 지분은 미국 정부가 그대로 보유할 것입니다. 법인세 탕감도 그대로 진행될 것이고요.”

“저런… 아쉽군요. 차라리 지금 되사는 편이 제게 더 큰 이득인데요.”

클린턴이 회의실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나섰다.

“BE는 앞으로도 크게 성장하겠지. 하물며 BE의 회장이니 자신 회사에 자부심이 상당하지 않겠는가.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프레지던트. 다음 정부에서 팔아 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지분을 인수하고 나서나 IPO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

클린턴은 정말 다음 정부에서 BE의 지분을 팔아치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BE는 모든 지분을 쥐고 다른 나라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아니면 IPO를 통해 주가가 하늘 높이 날아가거나….

‘그럼 미국 정부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겠군….’

“아. 그리고 지금까지 지켜 주시던 저의 신상도 이제 풀리겠군요.”

클린턴의 임기는 올해로 마지막이다. BE 인베스트먼트를 실소유하고 있는 수안의 신상이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미 미국 정부가 엄청난 돈으로 지분을 매입했으니 내년 3월 포브스지에 실릴 세계 부호 1위는 무조건 수안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25%를 4천억 달러에 매입했으니, 75%를 가진 수안의 지분 가치는 1조 2천억 달러.

무려 1,000조 원이 넘는 자산가로 알려지는 것이다.

“그것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이미 전 유명인사니까요.”

어느 하나도 약점을 잡을 구석이 없었다. BE에 내줄 것은 없었고 대통령의 시간은 부족했다.

“…스티븐 회장이 많은 준비를 한 모양이야.”

“캠프 데이비드에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만나러 오면서 이 정도 준비도 안 하는 국가 지도자가 있던가요?”

클린턴은 보던 종이를 뒤집어 회의 종료를 알렸다. 이것이 신호였는지 참모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BE의 일은 이래도 그만이고 저래도 그만이야. 내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지.”

“말씀하십시오.”

“올해 대선에 관한 것이야. 아까 이 자리에 있던 앨 고어 상원 의원은 민주당의 다음 대선 주자라네. 내 인기 덕분에 민주당이 다음 대선을 차지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여겨지고 있어.”

“좋은 소식이군요. 프레지던트.”

“…하지만 자네는 부시의 당선을 예측했잖나.”

“미국의 선진 투표 시스템은 득표수와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이기도 하니까요.”

112년 만에 전체 득표를 이기고도 선거인단에서 고작 5표 차이로 고배를 마시는 앨 고어 부통령이다. 네 번째로 많은 플로리다의 재검표를 둘러싸고 잡음이 생기게 되고 이 재검표 문제는 내년 클린턴이 퇴임하는 순간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연방 대법원이 재검표를 중단하고 부시의 승리를 확정해 버렸다. 이후 승자 독식주의인 미국의 선거제도를 재검토하자는 여론이 생기기도 했다.

“앨 고어 의원을 보고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군. 바쁜 사람을 여기까지 오라고 했는데 헛수고였어.”

또 관상이다. 지나칠 정도로 관상에 집착하는 클린턴이었다.

“저를 예언자 정도로 봐주시는 것 같은데, 전 경제인이죠. 누가 승자가 될지는 뚜껑을 열어 봐야 아는 법입니다.”

“이제 자네가 BE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모든 언론에서 떠들게 될 거야. 자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더 유명해지겠군.”

미국에서 BE의 지분을 인수했다는 사실은 감출 수 있는 성질의 정보가 아니다. 4천억 달러라는 금액부터가 엄청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공화당에는 이 정보를 무기로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놨습니다. 그들도 BE 인베스트먼트의 수혜자 아니겠습니까.”

“거기까지 손을 썼단 말인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경제인입니다. 물론 민주당에도 충분한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수안이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에 클린턴은 두 손을 들어 버렸다.

“됐네. 거기까지 확실하다면 자네를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지.”

클린턴이 BE의 지분을 되팔고자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대선 때문이었다. 공화당에서 BE의 지분 취득을 빌미로 공격하면 미국의 유권자들이 등을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지분이든 법인세든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늘 대화 즐거웠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니 저도 마음이 편하군요. 하하하.”

“…자네는 정말 경제인이었군.”

방금까지 날카로웠던 태도는 눈 녹듯 사라졌고 푸근한 인상의 사업가만 남아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자네 골프 좀 친다지?”

“여기까지 와서 골프장도 들르지 않고 갈 수는 없죠. 내일 뵙겠습니다.”

일전에 한국에선 프랭크 빈치가 당했으니 이번엔 클린턴이 제물이다.

한국의 거래처 손님들을 상대하듯이 겸손을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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