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행 (206/304)

비행

수안은 아내,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는 전용기에 올랐다.

“우아. 넓네요.”

아현은 빽빽한 좌석이 아니라 널찍하게 여유 공간을 확보한 실내가 마음에 들었다.

오직 강운 그룹 로열 패밀리를 위해 운용되는 전용기다. 기존 좌석을 모두 제거하고 새로운 좌석을 설치했고, 넓은 실내와 깔끔한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었다.

보통 여객기로 사용한다면 440명까지 태울 수 있는 내부를 50여 명이 탑승할 수 있도록 바꾸었으니 얼마나 넓겠는가. 미국에서 함께할 비서실 직원들 십여 명이 함께 탑승했음에도 많은 좌석이 남아 있었다.

“나현아! 달리자!”

“오빠~ 아. 같이 가~아.”

정원이는 뽈뽈거리며 비행기 내부를 휘젓고 다녔고, 나현이는 그런 오빠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이 탔다고 눈살을 찌푸릴 탑승자도 없었고,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아도 뭐라고 나무랄 사람이 없었다.

“이륙이 약간 늦어도 되죠?”

“관제탑과 이륙 시간을 조정하면 됩니다. 기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비행기가 다시 이륙을 준비하였을 때는 아이들이 지쳐서 돌아올 때까지였다.

“헥헥. 아빠. 비행기 언제 출발해?”

“정원이가 출발 신호를 안 줘서 지금까지 기다렸지. 자 “출발!”하고 외쳐볼까?”

“이야! 비행기 출발!!”

수안이 승무원에게 눈으로 지시하자 다시 이륙 준비가 시작되었고, 비행기는 금방 활주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아! 우리 비행기 간다!”

이륙하는 활주로에 들어선 비행기는 가속을 시작했고 정원이는 잔뜩 긴장한 채로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으으! 의자가 날 잡아당겨!”

쌍발 엔진을 통한 가속에 아들이 의자에 푹 파묻혀 있었다. 그래도 남자아이라 두려움을 잘 참아내고 있었다. 문제는 아현 옆자리에서 칭얼거리던 나현이다.

“흐아앙.”

걱정하던 나현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적정 고도에 도착하자마자 안전 벨트를 풀고 나현을 달래기 시작했다.

“아가 놀랐어? 이제 괜찮아. 엄마가 옆에 있잖아.”

“엄마. 엄마아아.”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쾌적한 비행이 계속되었다. 아이들이 잠이 온다고 하면 침실로 개조한 방에서 재울 수 있었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승무원들이 식사를 가져왔다.

상공을 비행 중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수안은 그 와중에도 비서실 직원들과 캠프 데이비드를 대비하고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번 IT 닷컴 버블로 내려간 주가에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4천억을 주고 산 BE 주식이 너무 비싸게 느껴질 수 있다는 뜻이야?”

청와대에 불려가도 어떤 질문이 오갈지를 미리 준비한다. 하물며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캠프 데이비드에 가면서 준비도 없이 갈 순 없는 일이었다. 비행기엔 BE 지사에서 파견된 직원도 탑승하고 있었다.

“예. 미국 정부는 당시에도 가치 산정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관련 내용이 나오기 충분합니다. 미국 정부의 불만을 가라앉히려면 곧 IPO를 준비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뉘앙스만 풍기고 이번 정부를 넘기는 말이네?”

“예. 클린턴 정부는 올해가 마지막입니다. 내년 차기 대통령과는 다시 논의가 필요할 겁니다. BE 입장에서는 이래도 저래도 좋습니다. IPO를 통해서 거대한 자금을 들여오는 것도 나쁘지 않고, 미국 정부가 가진 지분을 다시 같은 가격에 회수해 오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번 정부는 BE에 호의를 가진 상태이니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지 마시고, 차라리 다음 정부에서 선택을 강요받았을 때 처리해야 합니다.”

“흐음…. 오케이. 만약 이 건에 관해서 질문이 나오면 IPO 얘기로 넘기기로 하지. 어차피 IPO가 수개월 내로 진행될 수가 없는 일이니까. 몇 개월 늦어지고 다시 또 늦어질 수도 있는 일이지.”

만약 클린턴 대통령이 같은 가격에 지분을 넘기겠다고 하면 받으면 된다. 당시의 돈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이 IPO를 진행하려고 한다는 뉘앙스만 풍겨도 지분 넘기겠다는 말이 쏙 들어갈 것이다. 현재 금융계에서 BE만큼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는 투자 법인이 없기 때문이다. 지분 가치가 2조 달러 이상으로 책정될 수도 있는 일인데 고작 4천억 달러에 지분을 넘기진 않을 것이다.

BE 지분에 관한 시나리오를 가져온 직원이 뒤로 빠지고 다른 직원이 나섰다. 이번엔 미국 정치권에 관련한 문제를 제기한 직원이다.

“존 제퍼슨입니다. 저는 정권과 관련된 문제가 거론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특히 미국의 다음 정권도 대비가 필요합니다. 이번엔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다음엔 공화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큽니다.”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는데? 공화당의 부시가 다음 대통령이라고 확정한 다음 대안을 찾아보기로 하지. 어차피 우리가 민주당에만 후원하는 건 아니잖아? 공화당 후원자 중에서 BE의 후원 금액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걸?”

BE 인베스트먼트는 미국에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고, 그만큼 많은 돈을 다시 지출한다. 미국 정치권에도 상당한 돈을 투자하고 있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에 모두 후원하느라 양당에서 최고의 후원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공화당에서 대여섯 번째 후원자이고, 민주당에서도 그 정도일 겁니다.”

“확실한 노선을 정하라? 이번에 클린턴이 그런 요구를 해 올 것 같은가?”

“예. 미국 정부는 BE 지분 인수로 인한 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내려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정치 문제로 회장님을 엮어 들어가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까지 요구할까?”

“BE 지분을 사들이며 정부에서 지출한 4천억 달러의 3%까지 요구할 수 있습니다.”

“120억 달러? 이게 최대 예상치인가?”

“예.”

“그럼 별거 아니네.”

이번 IT 닷컴 버블로 독일과 미국에서 엄청난 돈을 쓸어 담았다. 120억 달러 정도는 미리 후원금을 낸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회장님께는 대수롭지 않더라도 민주당에서는 상당한 후원이죠. 클린턴 앞에서는 고심하는 척이라도 하셔야 합니다. 깎을 수 있다면 깎으셔야 합니다. 만약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 안건이 나온다면 클린턴은 당당하게 요구할 겁니다. 마치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당황하실 필요도 없고 조급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예 못 주겠다고 하셔도 됩니다. 관계가 틀어지는 것에 미련을 갖지 않으시면 협상의 우위를 가져갈 수 있습니다.”

“올해 지분을 매각하며 BE의 법인세를 탕감받기로 했는데, 이걸 걸어도 대차게 치받으란 말이야?”

“…물론 BE의 법인세 탕감은 상당한 금액이지만, 미국 정부가 이 혜택을 무위로 돌리겠다고 하면 대응책은 많습니다. 우선 저희도 미 정부 소유 BE의 지분에 우선 배당을 주기로 했던 부분을 제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증자를 통해 미국 정부의 지분율을 희석해 배당금을 낮게 책정할 수 있죠.”

“또 있나?”

“BE 본점을 미국 외의 나라로 옮겨도 됩니다. 이번 기회에 법인세가 최저인 국가로 이전하고 미국엔 지점만을 두며 사업을 계속 진행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회장님께 함부로 한다는 건 곧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배를 가르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에 더 붙어 있을 필요는 없죠. 게다가 회장님은 미국인도 아니지 않습니까.”

“넌 미국인이잖아?”

오로지 수안의 기준에서 판단한 대안들이었다. 미국인이라면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어디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뽀글뽀글 갈색 머리에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영국식 억양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미국은 개인주의가 강합니다. 저는 USA보다 BE를 더 좋아합니다.”

“BE가 돈을 많이 줘서?”

“그보단…. 환경 문제를 당면한 과제로 보는 경영진의 시야와 바이오 산업에 투자하는 선견지명에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오오! 선견지명도 알아? 제퍼슨 어휘가 장난 아닌데?”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왜 한국행을 결정했지? 이미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잖아.”

“유대인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직접 경험해 보고 알았습니다. 유대인은 한국인과의 경쟁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는 걸요. 그 어떤 나라도 한국인의 근면함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게다가 머리까지 좋습니다. 단결력도 뛰어나죠. 과거부터 일본과 중국이 왜 한국을 견제했는지 한국을 경험해 보고 이해했습니다.”

“…누가 들으면 한국어 말하기 대회 나온 줄 알겠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의 외교부를 포함해 각 학술 기관에서 역사 연구 사업을 추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들은 고구려사를 속지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수안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어. 강운 그룹의 지원을 받은 역사학자들과 학술회가 유네스코와 역사 연구 사업을 먼저 진행하는 중이야. 해외 역사학자들과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를 올바로 알리기 위해 작업을 진행 중이지. 그런데 자네가 거기까지 파악할 일은 아니잖아?”

“…대학 역사 동아리에서 활동하다 보니 관심이 많았습니다. 회장님이 미리 챙기고 계신 줄은 전혀 몰랐네요.”

“나 참. 미국인이 왜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

“미국은 역사랄 것도 없지 않습니까.”

“…….”

“한국의 역사는 너무 방대하고 처절했습니다. 전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만년의 역사로 입버릇처럼 말하는 고조선의 역사가 기원전 2,333년부터 시작이다. 기원후 2천 년인 지금까지로 따지면 무려 4,333년 전의 과거인 셈이다. 하지만 미국의 건국은 1776년. 224년 전에 건국된 나라였다. 인디언을 학살하고 차지한 땅. 독립운동을 통해 영국에서 분리된 미국의 역사. 건국 후 고작 몇백 년이 지난 나라의 역사를 한민족의 역사와 비교하긴 어렵다.

“…그러고 보니 미국 독립선언문을 토마스 제퍼슨이라는 사람이 기초를 잡지 않았나?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었잖아.”

“제 조상님 중의 한 분이죠.”

“오호!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한 분이지? 자네도 그 대학을 나왔어! 그래 맞아.”

“…한국인이시면서 왜 미국의 역사를 알고 계십니까?”

“미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그 나라 역사도 모르면 되나. 길지도 않은 역사를.”

“…한국은 역사가 너무 길어 위인도 너무 많습니다. 외울 것이 산더미입니다.”

수안은 제퍼슨과의 대화가 상당히 재미있다는 걸 깨달았다.

‘역사 동아리라…. 미국에도 조력자가 필요하겠지.’

“앞으로 존이라고 불러도 되지?”

“예. 스티븐 회장님.”

“그럼 아까 얘기로 돌아가 보자고 존. BE가 미국을 벗어난다는 협박? 아니면 실행?”

“협박이라고 해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실행은 언제든 할 수 있으니 협박으로 얻어낼 것만 얻어내면 그만입니다.”

수안은 전문가들과 논의를 이어 갔고, 많은 안건을 검토하고 나서 워싱턴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클락슨! 잘 지냈어요?”

“하하하. 반갑습니다. 스티븐 회장님.”

이제 한 식구라고 할 수 있는 클락슨이 BE Security 직원들과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안면을 익혀 둔 다른 직원들과 하나씩 인사한 수안이 아이들도 보여 줬다.

“정원이랑 나현이도 아저씨들께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안녕. 귀염둥이들.”

두 아이가 가지런히 배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이는 모습에 큰 덩치를 자랑하던 직원들도 아빠 미소를 지었다.

“크흐. 나도 결혼을 해야 하나? 애들이 왜 이렇게 귀여워?”

“네가 애 낳으면 딱 너 같을 거야. 저런 애는 안 나와.”

“넌 다를 줄 아냐? 네가 자식 낳으면 시커먼 수염 달고 나올걸?”

“뭐 인마?”

수안은 많은 인원을 대동하고 캠프 데이비드로 향했다.

워싱턴에 도착했어도 아직 100키로는 넘게 더 달려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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