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
영수는 부서에 먼저 퇴근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정확한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사무실에 남은 부장님과 차장님이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이미 심장이 커진 영수는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최 과장. 임 대리 무슨 일 있나?”
“오늘따라 임 대리 텐션이 상당히 높네요.”
“애인 생긴 거 아냐?”
“아뇨. 제가 아는데 임 대리는 애인 없습니다.”
이제 과장 타이틀을 달고 있는 영수의 사수였다.
“최 과장이 없다면 없는 건데…. 그럼 뭐지?”
“혹시 부회장님이 부르지 않으셨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 다들 야근 확정인데 저렇게 당당하게 나가는 거 보면.”
“나중에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영수는 그 길로 조금 멀리 떨어진 카페로 가서 비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받은 포상금으로 뭘 하지?’
초기에 받은 포상금 외에도 이후 몇 번 더 포상금을 받았고, 올해 세금 납부를 끝내고 남은 돈이 3억이 약간 넘었다. 상당한 돈이지만, 지금까지는 미래를 생각하며 포상금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젠 돈은 안 모아도 되니까…. 차를 한 대 살까?’
해외에 1조가 넘는 돈이 있으니 이제 돈을 모을 필요가 없다. 원하는 곳에 얼마든지 써도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비서에게 소개팅을 부탁했으니 차 한 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개팅은 진행도 되지 않았는데 데이트에 쓸 자동차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물려받은 집을 꾸며 볼까? 결혼하면 내가 거기 들어가서 살아야 할 텐데….’
영수의 상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혼까지 도달했다. 조만간 애까지 나올 참이다.
딸랑.
정희는 한껏 힘을 주고 카페에 들어섰지만, 영수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또!’
항상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 남자였다. 아까도 자신이 끝나고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이런 자리도 마련될 일이 없었다.
‘…어쩔 수 없어. 내가 들이대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을 거야.’
또각. 또각.
정희가 앞에 도착하자 그제야 인기척을 눈치챈 영수였다.
“왔어요? 앉아요.”
‘또! 또!’
자신을 보고도 가볍게 말하는 저 태도가 너무 분했다.
“아이스 커피?”
“아뇨. 저녁이라 커피는 사절이요.”
“그럼 시원한 음료로 골라 봐요. 소개팅해 줄 분이니 제가 살게요.”
“…….”
우선은 저 소개팅이라는 말부터 지워 버려야 했다.
“아뇨. 제가 살게요. 임 대리님은 아이스 커피로 드려요?”
정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자 영수는 어깨를 누르고 자신이 일어났다.
“아휴. 안 그래도 사장님 커피 심부름 많았을 텐데 여기까지 와서 그러지 말아요. 제가 주문할게요.”
‘흥…. 매너는 좋아.’
눈에 콩깍지가 쓰이면 뭐든 좋아 보이는 법이다.
시원한 음료를 두고 마주 앉았다. 이제 영수의 머리에서 소개팅을 지워 버릴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데, 정희는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소개팅을 대신한다고 해? 아니야. 너무 싸 보이잖아. 소개팅해 준다고 한 다음에 펑크 냈다고 할까? 그리고 대신에 내가 데이트를 하는 거야! 미안하다고 하면서 말이지. 아주 자연스럽네.’
정희는 자신의 시나리오가 확실하게 먹히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요즘….”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정희 씨 먼저 얘기하세요. 저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아뇨. 임 대리님이 먼저 말씀하세요.”
“별 얘긴 아닙니다. 요즘 괜찮은 차가 있나 하고요. 차를 살까 생각 중이라 고민이었거든요.”
“뭘 고민하세요? 대운 자동차는 신차 출시를 앞두고 있으니 우선 패스. 그럼 기화 차를 고르셔야죠.”
영수는 자신의 여동생이 타고 온 차량도 K9이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요즘 매제도 K9을 직접 광고해야 한다며 K9을 주로 타고 다닌다고 했다.
‘젠장. 난 선택지도 없었네.’
“…. 괜히 고민했어요. 어차피 다른 차는 고를 수도 없었네요.”
매제가 기화 자동차 사장인데 왜 차를 고르느라 고민한단 말인가. 만약 외제 차를 산다면 어머니께 등짝에 불이 나도록 맞고 도로 팔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사장님들이 타는 K9은 선택 불가.”
“아….”
아무리 임영수의 회사 내 대우가 좋다 한들 위계질서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다.
“이사님들이 K7을 타는데 대리 나부랭이가 K7을? 이것도 불가.”
“대리 직급에 맞게 타야죠. 맞는 말이라 참 슬픕니다.”
“하지만.”
“하지만?”
“어차피 임 대리님은 회사로 자차를 가져오지도 못해요. 전용 주차 공간이 없거든요.”
“…대리의 설움이 정말 크네요.”
대리를 달았을 때는 회사에서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위로 까마득한 사람들이 즐비했다. 대리까지 주차 공간을 할당할 정도로 강운 무역 본사 빌딩의 주차 공간이 넓지 않았다.
“집에서 개인이 타는 차까지는 회사에서 터치할 수 없죠. K9을 타든 외제 차를 타든 임 대리님 마음대로 고르면 되겠어요.”
“오오~ 역시 정희 씨는 정말 똑 부러진다니까.”
“예산은요? 내가 알아봐 줄게요.”
뭐라도 건수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다른 여자를 소개해 준다고 거짓말하는 것보다는 자주 밖에서 만나서 정을 쌓으면 더 좋지 않겠나.
“아휴. 차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가끔 차량 관련해서 외제 차 딜러를 만날 일이 있었거든요. 제가 괜찮은 딜러를 소개해 줄게요.”
“외제 차는 안 삽니다. 괜히 눈치 보여서 좀 그러네요.”
“…….”
“그보다 정희 씨 하려던 얘기는 뭐죠?”
“…….”
건수는 포기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소개팅 때문에 보자고 하셨잖아요.”
“오. 바로 본론인가요?”
“제가 소개해 줄 친구는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영수를 보고 있자니, 소개해 준다는 거짓말도 내뱉기 싫어졌다.
‘내가 보이지도 않아? 내가 눈앞에 있는데?’
분노는 용기를 불러왔다.
“난 어때요?”
“…네? 친구 이름이 난이라고요? 그거 예쁜 이름이네요. 사진 있어요?”
“나요 나! ME! 한정희!”
“무, 물론 그야….”
영수는 언감생심 정희를 어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를 소개받고자 했을 뿐이다. 도도했던 그녀가 이렇게 화끈한 모습으로 들이댈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야 땡큐지!!’
하지만 속마음을 바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제 자신도 재벌이나 마찬가지였다.
통장에 10억 달러가 있다지 않은가.
“나 좀 놀라서…. 미안해요.”
“…….”
정희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방금 전 용기의 후폭풍을 견디고 있었다.
“…나보단 정희 씨가 더 놀란 것 같네요.”
“…대답… 해 줘요. 내가 소개팅을 대신해도 괜찮아요?”
영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나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정희 씨는 나에 관해 잘 모르잖아요.”
“알아요. 강운 그룹 사돈 집안이라는 거 모르는 회사 사람도 있나요?”
“그거 말고요.”
“……?”
“강운 그룹 사돈이야 그냥 사돈일 뿐이죠. 나한테 떨어질 건 없어요. 난 그냥 회사원인 것으로 전부예요. 앞으로도 마찬가지고요.”
이젠 돈 때문에 다가온 여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없어요? 아무것도? 임 대리님은 사장님과 자주 만나시잖아요.”
정희의 말에 영수는 들뜬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 기분이다.
“그야 업무로 인한 미팅이죠. 부회장님이 제 매제니까 회사에서 함부로 대하는 윗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맡겨진 업무가 있고 그걸 보고하는 것뿐입니다. 난 앞으로도 우리 직원들과 똑같이 승진하고 똑같이 벌어 먹고살아야 해요. 특별한 혜택은 없을 겁니다. 이건 강 부회장님이 장담하신 일이에요. 솔직히 얼굴 볼 일도 별로 없어요. 남이나 다름없죠.”
영수는 정희의 작고 귀여운 입술에서 나올 말을 예상했다.
‘알고 보니 개털이네? 총수 일가 사돈도 별것도 아니었네? 뭐가 나오든….’
소개팅 건은 이걸로 끝이었다. 괜히 들떠서 기분 냈다가 이런 결과를 보고야 말았다. 지금까지 강운 그룹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가까이로는 친척들이 있었고,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친구들도 괜히 옆구리를 찌르곤 했었다. 그런 지인들의 가면 쓴 모습을 보아왔지만, 오늘 또 이런 일을 겪어보니 세상 참 살기 힘들다고 느껴진다.
‘그냥 혼자 살까?’
영수의 상념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됐다.”
“네?”
“잘됐다고요.”
“왜요?”
분명 개털이라고 했는데 잘됐다는 말이 왜 나온단 말인가.
“돈 보고 들러붙을 여자는 없다는 뜻이잖아요. 솔직히 저도 속물이구나 싶었는데, 그 얘기 들으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요.”
‘얼레? 이 사람 진심이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영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또 알아야 할 것이 있나요?”
“저, 저는 부모님이 애지중지하는 아들…. 애지중지까지는 아니지. 어쨌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여자들이 좀 부담스러워하더라고요.”
“저도 외동딸인데요? 또 있어요?”
“…나중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거든요?”
“친구들에게 들어 보니까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 애 키워 주시고 좋다고 하던데요? 오히려 따로 사는 친구들이 애 낳고 나서야 시부모님 모시려고 안달이죠.”
“…….”
이제 더는 할 말도 없었다. 강운 그룹 사돈이라는 이점이 없어도 상관없고, 외아들에 시부모 봉양까지 오케이라는 여자에게 뭐라고 한단 말인가.
“소개팅은… 거절인가요?”
정희는 자꾸만 핑계를 대는 영수의 태도에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네. 거절입니다.”
“후우….”
‘정말로 내게 마음이 없었던 거야. 일말의 가능성도 없었어.’
“소개팅은 왜 합니까? 마음 맞으면 그냥 시작하는 거지.”
“……?!!!”
“나갑시다.”
영수는 정희를 일으켜 세워 커피숍을 나섰다.
“택시!”
택시를 잡아탄 영수는 정희를 태우고 자신도 함께 택시에 올랐다.
“어, 어디 가세요?”
“집이요.”
“네에!!?”
“한남동으로 갑시다. 기사님.”
영수는 못된 것만 배운 모양이다.
* * *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
보통 때보다 이른 아들의 퇴근에 마중 나온 모친은 아들 뒤에 있는 아리따운 여성을 발견했다.
“어머머.”
거대한 저택에 잔뜩 움츠러든 정희는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누, 누구?”
“결혼할 사람. 데려오라며?”
저녁을 드시던 아버지도 후다닥 나와 물었다.
“누가 와?”
“안녕하세요. 아버님.”
“아, 아버님? 영수야!”
“현관에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요. 정희 씨 들어갑시다. 우리 부모님 좋은 분들이세요.”
서초동 집을 뒤집었던 사건이 한남동 영수의 집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어디서 한 번 본 풍경 같은데….’
한남동 관리를 맡고 있는 최정숙은 예전 수안이 아현을 데려온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맞다! 사모님이 부회장님 손에 끌려서 집에 온 날….’
* * *
“오빠가 어제 누굴 데려와?”
-글쎄 결혼할 사람이라고 데려왔는데, 여자 쪽은 혼이 쏙 빠져 있더라. 네 오빠가 막무가내로 데려온 모양이야.
“하!”
-그래도 예쁘긴 얼마나 예쁜지, 영수가 데려올 만했어.
“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만났는데 집으로 데려와? 그동안 누구 만난다는 얘기도 없었잖아?”
-어제 서로 진지하게 만나기로 했다더라. 그러니 그동안 거짓말한 것도 아니지.
“그럼 당일에 집으로 바로 데려왔다고?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런 사람이 어딨어?”
-왜 없니? 너 있잖아. 정확하게 말해 줘? 네 서방 강수안.
있었다. 남편도 오빠와 똑같은 일을 벌였던 유경험자였다.
“…….”
-그래도 영수는 양반이지. 서로 합의는 끝내고 데려왔잖니? 넌 그때 결혼할 생각도 없었는데 강 서방 손에 끌려갔잖아. 저는 더했으면서….
“그, 그거야 지금은 잘됐으니까….”
-됐고. 나중에 너도 한번 봐. 싹싹하기도 했고 교육 잘 받아 바르게 자란 것 같더라.
“…알았어. 그 여자 신상이나 말해 줘. 연락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