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대비
영수는 회사로 돌아가 신비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임 대리. 1분기 해외 영업 현황 보고 자료 가져와 봐.”
“예. 차장님.”
“여기 거래처는 아직도 대금 지불을 안 했어? 임 대리가 미리 챙겼어야지.”
12만 달러의 대금을 기한이 지나도록 지급하지 않은 해외 거래처가 있었다.
보통 때라면 긴장해서 잘못했다고 먼저 말하고 자리에 돌아가 내용을 파악했을 것이다.
“음….”
지금은 한결 여유가 있었다. 12만 달러라는 돈이 너무 가볍게 느껴진 탓이다.
일전에 파악했던 해외 거래처 관련 정보가 수월하게 기억났다.
“CamPort사(社)에 우리 물건 도착이 늦어졌습니다. 마감 기한에 이틀이 늦어 다음 달 입금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강운 무역과 자주 거래하는 업체라 물품 대금을 떼일 염려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 그럼 다른 해외 거래처 미수에 관한 대안 마련은 어떻게 진행 중인데?”
건수를 잡겠다는 듯이 연이어 질문이 들어왔지만, 영수는 준비된 것처럼 술술 대답했다.
“해외 거래처는 T/T 거래에서 L/C 거래로 바꾸는 중입니다. 앞으론 은행에 수수료를 지급하더라도 물품 대금을 확보할 수 있는 업체를 위주로 수출을 진행하려 합니다.”
“완료 시기는?”
“모든 거래처를 L/C 거래로 바꾸기엔 현실적으로 무리입니다. 거래처 80% 이상만 L/C 거래로 바꾼다는 목표를 세웠고, 앞으로 1년이면 가능합니다.”
“…많이 준비했네. 임 대리가 대리 달더니 이제 진짜 상사인 태가 나.”
“감사합니다. 차장님.”
영수는 자리로 돌아가서 알 수 있었다.
‘이게 매제가 말한 자신감인가?’
아직 본 적도 없는 10억 달러가 든든하게 자신의 뒤를 받쳐 주고 있었다.
박성우 사장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임 대리. 이번 달엔 회사 불합리 실적 보고가 없네?”
“예. 사장님.”
“없으면 끝인가? 직접 발로 뛰어서라도 찾아야지.”
“이제 잠잠해질 때도 됐죠. 그간 충분히 매운맛을 봤으니까요.”
과거의 문제들은 충분히 찾아냈고 회수했다. 지금까지 봐 온 일이 있으니 함부로 횡령을 계획할 수 있겠는가.
“흐음….”
“그리고 직원들 긴장감이 심각합니다. 과도한 긴장은 오히려 회사에 독약입니다. 이제 풀어줄 때입니다. 자잘한 잘못은 덮어 주고 회사가 보듬어 줘야 애사심이 높아질 겁니다.”
“흐흣. 이제 임 대리가 그런 소리도 할 줄 아네?”
“참견이라 느껴지셨다면 죄송합니다.”
“나한테 이런 얘기 하는 사람도 있어야지. 알았네. 사무실로 가 봐.”
“예. 사장님.”
영수는 시야가 넓어진 기분이다.
덕분에 사장실에서 나오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비서에게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그동안엔 항상 긴장하고 들어가 보고를 마치면 비서에겐 신경도 쓸 수 없었다.
“우아. 오늘 정희 씨 미모는 눈부실 지경인데요?”
“아…. 네.”
비서에게 빙긋 웃으며 인사한 영수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지나쳐갔다.
‘뭐야…. 왜 저렇게 멋있어?’
관심 있는 상대가 상쾌한 미소로 받아 주니 절로 마음이 두근거렸다.
지나쳐 간 줄 알았던 영수는 뒷걸음질로 다시 돌아왔다.
“……!”
‘왜? 왜? 뭔데?’
비서는 떨리는 마음으로 영수의 말을 기다렸다.
“정희씨.”
“네, 네.”
“나 소개팅 좀 부탁해도 될까요?”
“네?”
크게 실망스러운 말이었다.
‘왜 내가 아니라 소개팅이냐고!’
“더도 말고 딱 정희 씨 정도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친구들 많지 않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이러면 또 얘기가 달랐다. 포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자기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처럼 들려왔다.
“아무리 자주 봤다고 해도 소개팅은 좀 무리한 부탁이겠죠? 우리가 그 정도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그게 아니라 지금은 회사 업무 중이잖아요.”
“아차차. 쏘리. 쏘리.”
영수가 사과하며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비서는 얼른 뒷말을 붙였다.
“그럼 회사 끝나고 얘기하면 되겠죠?”
“오오. 좋은 생각이네요. 끝나고 새로 생긴 커피숍에서 보는 건 어때요? 거긴 회사 직원들도 별로 없던데.”
“…네. 업무 끝나고 뵙죠.”
비서를 뒤로하고 복도에 들어서자 영수는 벽에 손을 기대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켰다.
“젠장. 머리는 막 굴러가는데 몸이 안 따라 주네.”
어떻게 하면 소개팅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순식간에 떠올랐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예쁜 애들은 친구들도 예쁘다고 하질 않나. 비서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이라면 만나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소개팅…. 진짜 정희 씨 만큼만 예쁘면 좋겠는데.”
영수의 계획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소개팅이라니! 감히 일편단심인 날 두고!!’
영수를 어떻게든 해 보려고 생각한 시간만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엔 총수 일가의 인척이라는 말에 급 관심이 생기는 정도였지만, 오늘 영수의 말로 관심이 집착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영수의 계략은 시작과 동시에 능선을 넘어 목표 지점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 목표 지점이 원하는 곳이 아닐지라도 이제 막을 수 없었다.
도도도도.
정희는 손에든 컴팩트의 거울을 보며 파우더 쿠션을 줄기차게 두드린다.
‘완벽하게 준비해서 나가겠어! 내게 반하도록 만들어 주지! 움화화!’
파우더가 과했던 탓일까? 분노에 가득한 화장 덕분에 비서의 얼굴은 하얗게 들뜨고 있었다.
김성우 사장은 사장실에서 나오다가 비서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 물었다.
“어억! 한 비서 얼굴이 왜 그래?”
“네?”
방금 내려놨던 컴팩트 거울을 들어 보니 처녀 귀신이 그 안에 있었다.
“꺄악!”
“커흠. 화장이 너무 과했지 싶은데….”
“죄, 죄송합니다.”
“거래처 약속 있어서 나가니까 부서 결재는 내일 올리라고 해 줘요.”
비서는 하얗게 변해 버린 얼굴을 가리고 대답했다.
“…네. 사장님.”
“한 비서는 안 꾸며도 예쁜데 말이야. 수고.”
사장이 나가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본 정희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후. 진정해. 아직 퇴근까지 많이 남았잖아.”
검은 정장에 하얀 얼굴만 동동 떠다니는 정희는 얼른 화장부터 지워야 했다.
“기운 내자! 아자!”
부사장은 사장실에 걸음 했다가 한 비서의 파이팅에 깜짝 놀랐다.
“힉!”
파이팅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한 비서의 얼굴이다.
“어머. 부사장님. 사장님 방금 나가셨습니다. 결재서류는 내일로….”
“그런데 한 비서 얼굴은 왜…. 어디 아픈가?”
“아악! 몰라요!”
* * *
수안은 단란한 가족 여행을 기대하며 2000년 여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의외의 일이 생겼다.
-애플의 스티브 사장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벌써?”
아직 애플의 주가는 바닥을 치기까지 여유가 있었다.
‘아니지. 스티브는 바닥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테니 얼마든지 연락 할 수 있겠어.’
“스티브가 뭐라던가? BE가 다시 지분을 사 달라고 해?”
-지분 관련한 대화는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는 건강 검진 관련입니다.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으나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 중이라고 합니다.
“아. 그거 잘됐네.”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하는 거다. 지분을 되돌려줬음에도 꼬박꼬박 건강 검진을 받았다니 신기한 일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디자인 특허 관련입니다.
“디자인 특허? 아! MP3 장치 디자인 말이야?”
미래 iPod 시리즈의 모든 디자인은 초기부터 후기까지 모두 수안의 손에 의해 디자인 특허가 출원된 상태였다. 물론 iPod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iPhone 디자인도 마찬가지로 모든 디자인 소유권이 수안에게 있었다.
-예. 애플에서 관련 기기 디자인의 특허를 출원하려고 했는데, 회장님 선행 디자인으로 인해서 막힌 모양입니다.
“당연하지.”
애플에서 못 쓰게 하려고 늦지 않게 디자인 특허를 출원했다.
“몇 개월 내에 강운 전자에서 그 디자인으로 대용량 MP3 장치를 출시할 예정이거든.”
iPod, iPod mini, iPod shuffle, iPod nano, iPod touch까지 전부 다 강운 전자의 새로운 MP3 기기로 출시될 예정이었다. 여기서 얻은 데이터로 스마트폰 개발까지 이어서 진행할 수 있기에 양보는 불가능했다.
-협상의 여지도 없는 일이군요. 제가 알아듣게 설명하겠습니다.
“그럼 지분 얘기는 없었던 거야?”
-예. 전혀 없었습니다.
“…10월까지 얘기 없으면 주식 시장에서 매집해.”
내놓지 않으면 직접 사면 될 일이다.
-분산할까요?
“초기엔 분산해야지. 괜히 눈총받잖아.”
-예. 그래야 애플에서 지분을 넘긴다고 했을 때 수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레이크 말이야.”
2001년 9‧11 사태까지 이제 1년 남짓이다.
-그는 현재 BE Security 소속이 아닙니다.
서류상으로는 소속이 아니지만, 외국에서 퇴직 용병들과 어울리도록 지시했었다. 따로 비용도 지불하는 중이다. 드레이크는 지금까지 놀면서 돈을 받아먹었지만, 앞으론 일을 해야 했다.
“내년 9월까지 100명을 모으라고 해. 되도록이면 미군 부대 출신이면 좋겠어. 그리고 관련한 비용은 내 비상금 계좌에서 지급하고.”
-100명이나 말입니까?
납치될 네 대의 비행기에 25명씩 탑승시키면 고작 다섯 명 남짓의 테러범이 무슨 수로 비행기를 납치할까.
“나중에 험한 일을 할 때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소속 용병들의 도덕적인 부분도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숫자만 맞추면 그만이야. 대신 미국엔 입국할 수 있는 놈들로 하자. 우리 주 무대가 미국인데 여길 못 오면 안 되잖아.”
-미국….
이방효는 미국에서 생길 험한 일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설마 내가 테러라도 벌이겠어? 만사 불여튼튼이야. 미리 극단적인 상황을 준비한다 생각해 줘. 나도 되도록 녀석들을 부르고 싶진 않아.”
-그럼 준비만 해 두고 계속 해외에 두시겠습니까?
“내년 9월 초에 미국에서 합동 훈련 한 번만 하고 다시 돌려보낼게.”
그 합동 훈련은 비행기에 탑승해 실전으로 치를 생각이다.
-전달해 놓겠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미국 본토 테러는 정말 대단한 성과를 냈었다. 세계무역센터 1동과 2동을 완파하고 미군의 심장인 펜타곤에도 비행기를 꽂았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뼈아픈 실책이다. 왜 실책인가 하면 이 테러를 막을 기회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린턴의 현 정부에서도 오사마 빈 라덴을 잡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놓친 전력이 있다. 다음 부시 정부에서도 테러 관련 정보를 수집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부시는 이를 기회 삼아 공화당의 입지를 대폭 올리고 이라크 전쟁으로 굉장한 돈을 벌게 된다. 수안은 이번 테러가 실패로 돌아가도 같은 결론이 나올 거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와의 연관성은 철저하게 잘라내야 해.”
테러를 막아도 불똥이 튈 수 있는 일이다. 드레이크가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녀석이 영웅이 되어 환호를 받든 테러 분자가 되어 손가락질을 받든 BE가 나설 일은 없었다.
-비용을 지급하는 계좌는 녀석의 계좌입니다.
일전에 칼슨에게 빼앗은 계좌가 드레이크의 이름으로 다시 개설되어 있었다. 녀석은 지금 자신의 계좌에서 월급을 받는 셈이다. 모집할 용병들의 급여도 드레이크의 이름으로 들어갈 것이다.
“좋아.”
이제 캠프 데이비드에 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