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계획
공연을 보고 돌아가는 길.
수안은 아현과 해외 자금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아직 아내에게 말하지 않은 자금이 또 있었다.
“…제 계좌도 있었어요?”
“당연하지. 가족들 챙기는데 당신을 빼 놓으면 섭섭하잖아.”
“오빠 계좌가 있다면서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아버지와 어머니, 수진, 수현, 수용에 아현까지가 한 가족이었다.
“못 말려 정말….”
“한남동에 아버님, 어머님 집도 당신이 관리하고 있다며. 보태 쓰면 되겠네.”
“그건 지금 있는 돈으로도 충분하거든요?”
“흐흐. 우리도 아버지, 어머니 여행 다녀오시면 같이 나가자. 이번엔 일로 나가지 말고 진짜 휴양목적으로.”
하지만 얼마 뒤 걸려온 전화로 인해 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 * *
수안은 막 더블 스타로 출근한 참이었다.
“회장님. 이방효 사장이 긴급하게 연락을 요청했습니다.”
“배 사장이 처리할 수 없는 일인가?”
“예. 미국 정계와 관련한 일입니다. 백악관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습니다.”
“…클린턴 그 사람은 또 무슨 일이야?”
수안은 이방효와 통화했지만,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연락을 달라고만 했습니다. 저도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
“오케이. 어쩔 수 없지. 내가 연락해서 알아볼게.”
수안은 시차 때문에 퇴근 시간이 지나고 나서 백악관에 연락할 수 있었다.
“스티븐 강입니다.”
-직접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티븐 회장님.
수안과 통화하는 사람은 대통령의 수석보좌관 지미였다.
“백악관에서 찾는데 제가 모른 척할 수는 없죠. 지미.”
-이번 닷컴 버블에 BE는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국제 투자 회사 대부분이 이번 닷컴 버블의 영향으로 상당한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안과는 관련 없는 일이다.
“준비한 자에게 위기는 도약의 기회가 되죠.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오우. 다행이군요.
“혹시 지미는 다른 금융사에 돈을 맡겼나요?”
-정확하게 맞췄습니다. 저는 상당한 손실을 봤죠. 정말 망할 놈의 펀드였어요.
“저런…. BE를 믿지 못한 모양입니다.”
-앞으론 믿어 보려고 합니다.
“환영합니다. 지미. 제가 직접 약속하죠. 앞으로 당신은 손해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게 될 겁니다. 당신이 잠자는 동안에도 BE는 당신의 자산을 불려줄 테니까요.”
-하하하. BE의 회장이 장담하니 정말로 거래 금융사를 바꿔야겠군요.
수안은 대체 언제쯤 본론으로 들어갈지 답답했지만, 지미의 수다를 충분히 받아 줬다. 지미는 10분이나 엉뚱한 소리를 하고 나서야 클린턴의 전언을 입에 올렸다.
-이번에 스티븐 회장님을 데이비드 캠프에 초대하려고 합니다.
“아.”
미국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되는 데이비드 캠프다. 일반에도 알려질 만큼 유명했기에 수안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통령께서 스티븐 회장과 긴히 나눌 대화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내용은 물어도 발설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정을 알려 주시면 맞추겠습니다.”
-시원하게 수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안은 일정을 확인하고 지미와의 통화를 끝냈다.
“썩을. 날짜는 왜 또 이 모양이야?”
가족 여행 일정 중간에 정확하게 겹쳐 있었다.
수안은 집에 돌아와 아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일정을 조정하려 했다.
“…당신은 캠프 데이비드에 가야 한다고요?”
“응. 클린턴 대통령이 초청해서 안 갈 수가 없어.”
“절묘하게 그 날짜에 초대를 하네요.”
“그러게.”
본래 해외 휴양지 두 곳 정도를 돌아보려고 넉넉하게 2주의 휴가 일정을 잡고 있었다. 첫 주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별장으로 일정을 잡았었고, 다음 주는 스페인의 이비자 섬으로 가서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 미국엔 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여행 일정을 쉽게 변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 갔다가 출발하는 걸로 하면 어때요?”
“그럼 미국, 스페인, 스위스 순인가?”
미국에 먼저 들러서 일을 보고 이후에 수정한 일정대로 휴가를 즐기면 될 일이다.
“스페인은 빼고 아예 캘리포니아에 있는 샌타바버라로 가요. 거기도 후보로 넣어 놨었거든요.”
“오오. 그럼 동선이…. 오히려 늘어나는데?”
미국이 워낙에 넓다 보니 스페인에 들렀다가 스위스로 가나 캘리포니아에 들렀다가 스위스로 가나 비슷했다. 중간에 굴러들어온 워싱턴 탓이다. 이래저래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일정이 된다.
“캘리포니아 말고 플로리다의 섬 그랜드바하마로 가자. 거기엔 BE 소유 리조트가 있으니까 거기서 묵으면 되겠다.”
마음대로 일정을 바꿔도 전용기가 있어 비행기 티켓 걱정이 없었다.
게다가 BE 소유의 호텔과 리조트가 미국 주요 도시에 흩어져 있어 숙소 해결도 쉬웠다.
“스위스도 나중에 갈까요? 아무리 전용기라지만, 비행 시간이 길어지면 아이들이 힘들 것 같아서요.”
“그럴까? 괜히 복잡해지는 것보다 단순한 여행이 편하지. 그리고 이왕 워싱턴에 같이 가니까 내가 체험 학습할 것이 있나 찾아볼게.”
“오! 그것도 좋겠어요.”
수안은 데이비드 캠프로 초대한 클린턴 덕분에 일이 꼬였다 생각했다. 다음 날 백악관의 지미에게 연락해 당당하게 추가 요청 사항을 전달했다.
“아내와 아이들도 데려가겠습니다.”
-스티븐 회장의 가족과 함께 온단 말입니까?
미국 대통령의 휴가지 데이비드 캠프를 경험하는 체험학습이다. 아이들이 언제 이런 체험학습을 할 수 있겠는가.
“그날이 제 휴가 일정이랑 겹치더군요. 어차피 대통령께서도 휴가 아닙니까.”
-인원이야 변경하면 그만이죠. 대통령께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날 뵙죠.”
* * *
“오빠 일정 뒤로 미뤄졌어. 우리 먼저 가도 된대.”
“그래?”
수진과 상준도 전용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안의 일정이 뒤로 일주일 미뤄졌으니 자신들 일정을 앞당겨 먼저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럼 휴가 일정을 앞으로 당기면 되나?”
“응. 우선 파리와 이탈리아를 돌면서 유럽 패션계를 순회하고….”
“쇼핑?”
결혼 전에는 검소했는데, 결혼 하고 나서 민낯을 드러낸 수진이다. 집을 사려고 모아 뒀던 자금을 야금야금 쇼핑으로 쓰다가 상준에게 걸렸다. 그 뒤로 수진은 함부로 쇼핑을 하지 않기로 상준과 약속했었다.
“…무, 물론 서방님이 허락을 해 줘야 사지.”
그래도 상의는 하려고 해서 다행이다 싶은 상준이다.
“내가 허락 안 하면 안 사는 거다?”
“아잉. 서방님.”
“집도 형님도 사 줘, 앞으로 쇼핑하라고 용돈도 넉넉(?)하게 줘…. 우리 뭐 하러 이렇게 일하는지 모르겠다.”
평생 수안이 준 돈만 쓰고 살아도 될 정도였다. 아버지에게 사돈댁에서 자신의 직급이 조금 느리다는 얘길 전해 조만간 특별 승진을 허락하셨지만, 그래봤자 과장이나 실장급이다. 나오는 월급이 너무 적다고 생각됐다. 나중에 사장이 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무려 10억 달러가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땀 흘려 번 돈이랑 같아? 순수하게 오빠 마음만 생각하면 되는 거지.”
“순수하게 1조? 1조가 순수해?”
“흐흐. 그렇게 말하니까 전혀 순수하지 않아 보이긴 한다.”
상준이 기업가 집안 아들이라 10억 달러라는 돈을 수긍했지, 만약 일반인이라면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겠어. 형님이 돈이 많아서 생긴 일인걸.”
4천만 원을 벌어 용돈으로 10만 원 정도는 줄 수도 있는 일이지 않은가.
물론 원이 아니라 달러지만, 비슷한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생각하는 돈의 단위가 다를 뿐이지.’
“그럼 서방님이 나 쇼핑 허락한 거다?”
“어허. 맨입으로?”
상준은 팔을 벌리고 있었고, 수진은 폴짝 뛰어 상준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살짝 붉어진 얼굴로 상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늘 뜨밤?”
신혼의 뜨거운 밤이 시작되려 한다.
“길고 뜨거운 밤이지. 이리 왓!”
“오, 오빠!”
* * *
“…….”
지금 아현 옆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사람은 임영수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오빠.”
“어 버.”
“말을 해. 엉뚱하게 또 물어보지는 말고.”
“정말….”
“내가 같은 내용 다시 물어보지 말랬지? 괜히 처음부터 장황하게 다 설명한 줄 알아?”
“…합.”
방금 아현은 오빠에게 수안이 해외에 계좌를 만들어 선물한 10억 달러에 관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자금의 목적은 오로지 집안 가족들의 품위 유지를 위함이란다. 그 외의 다른 목적은 없었다.
“그, 그래. 이해도 안 가고 믿어지지도 않지만, 우선은 알아들었다.”
아무리 사실을 설명했어도 쉽게 믿기 힘든 금액이었다.
“괜히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거나 국내로 들여올 생각은 하지 마.”
“그것도 아까 얘기했잖아. 몇 년 지나고 나서나 생각해 보라고 했고….”
“불안하니까 반복하는 거야.”
“…그만한 돈이면 충분히 불안할 만하지.”
영수가 생각하기에도 10억 달러는 너무 엄청난 돈이었다. 지금까지 회사의 불합리를 바로 잡으며 받은 포상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1조가 넘는 돈이라니….’
평생 만져 볼 일도 없을 줄 알았던 돈이다. 회사에서 무역 거래를 하면서 회사의 반기 매출이 모여야 만들어지는 단위의 돈이 이제 자신의 통장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쓰지 말라는 말은 아니야. 나 대신에 오빠가 부모님 모시고 해외에도 나가고 해.”
“아무리 써도 줄지 않을 것 같다만….”
“내 생각에도 그렇긴 해. 죽을 때까지 다 쓸 수나 있을지….”
아현의 계좌에는 20억 달러를 넣었다고 했다. 아현은 오빠보다 더 막막했다.
“못 쓰지. 하루 종일 돈만 써도 다 못 쓸걸?”
“어쨌든, 그 돈은 앞으로 오빠가 잘 관리하면 되니까 그렇게 알아. 아빠랑 엄마한테는 얘기하지 말고.”
“이거 알면 엄마 뒤로 넘어간다. 아버지도 기겁하실걸?”
아현은 오빠에게 첨언했다.
“나중에 오빠 결혼해도 돌려 달라고 할 돈은 아니야. 알았지?”
이 부분까지 확실하게 알려 주라고 했던 남편이다. 나중에 이 돈으로 인해 생길 잡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다. 미리 정해 두면 내 돈이니 네 돈이니 따질 이유가 없었다.
“…….”
영수는 이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 뻔히 짐작됐다.
“그러니까 오빠는 앞으로 내 올케언니 될 사람만 잘 모시고 와.”
“맨날 기승전[결혼]이냐?”
“수안 씨가 왜 우리 가족의 품위 유지를 신경 쓰겠어? 오빠가 애인 만들 수 있게 도와주려고 한 거야.”
“매제는 별걸 다 신경 쓰고 살아. 일도 바쁘면서….”
“나 이제 가 봐야 해.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입이 근질근질해도 진짜로 잘 참아야 해.”
“…생각해 보니까 자신이 없네.”
“오빠!”
“푸흐. 농담이야.”
“얼른 회사로 가. 나 녹화 있단 말이야.”
“응. 촬영 잘해라.”
영수는 아현이 타고 있던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어 줬다.
아현도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차는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
아현이 가고 흔들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영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사돈이 너무 잘 살아도 문제네.’
10억 달러. 소시민 영수가 감당하기 힘든 돈이다.
‘그걸 어떻게 쓰냐고….’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