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용기 (200/304)

전용기

“애들도 있는데 못 하는 소리가 없냐. 애들 데리고 나가서 놀아.”

“아. 쏘리. 삼촌이 방금 너무 크게 소리쳤지? 정원이는 삼촌이랑 밖에 나가서 놀자. 나현이도 삼촌이랑 나갈까?”

정원이와 나현이가 수용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고 수안의 말이 이어졌다.

“가족들을 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버지.”

“큭. 너니까 이런 이벤트를 하지. 그래. 재미는 있었다.”

“아악!!”

뒤늦게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입을 틀어막았다.

“워워. 설마 아닐 거야. 아니라고 해 줘. 아니지? 그치?”

수진도 이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상준은 소파에 털썩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10억 달러라니….’

이미 수안에게 들어 알고 있던 아현이 수진의 물음에 답했다.

“맞아요. 아가씨.”

“…맞아요? 그럼 정말로… 10억 달러라고요?”

“네. 저이는 매번 저렇게 말을 짧게 해서 사람 심장 떨어지게 해요.”

일전에 남편에게 이 얘길 들었을 때 아현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충격을 받았었다.

“아현아. 정말로 달러라고?”

“네. 어머님. 원화로 환산하면 1조 1천억쯤 된다고 해요.”

아무리 강운이 조 단위 기업을 계열사로 거느린 대기업이지만, 조 단위 금액을 통장에 넣어 놓고 살지는 않는다.

재산 대부분이 지분을 평가한 것에 불과하고 부동산, 그림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재산의 극히 일부분을 현금성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평소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강운 그룹 직계 가족들이라도 한꺼번에 조 단위 금액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강운모 회장 외에는 조 단위 금액이 통장에 들어 있는 가족이 없는 현실이다.

지금 거실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인물이 있었다.

대화에서 빠져 혼자 상념에 잠긴 사위 상준이다.

‘10억 달러를 해외여행 용돈으로 투척한 사람을 봤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겠지? 아냐, 집에선 믿겠다. 그래도 괜히 얘기하지 말아야지. 비교당할까 무섭네.’

“아. 그리고 처가 쪽엔 영수 형님을 이번 해외 계좌 개설에 포함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여, 여보!”

이 얘긴 당시에 하지 않았던 말이다. 가족들 있는 데서 공식화해서 아현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올해는 꼭 장가가셔야지.”

“아이참…. 돈으로 될 일이 아니잖아요.”

돈으로 결혼할 것 같으면 진즉에 했을 것이다.

“통장에 뭔가가 가득 들어 있잖아? 사람의 태도부터 달라져. 매일 자신감이 넘치고 세상은 아름다워 보이거든. 누굴 만나도 주눅 들지 않아. 사람 만나기도 쉬울 거야.”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그 돈은 그래도 너무 했어요.”

자신감을 키우라고 10억 달러를 주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차피 한동안은 국내로 못 가져온다니까.”

“아. 그랬죠.”

“나중에 들여오려면 6~7년 정도 지나고 나서 세금 다 내고 들여오라고 해.”

이현창이 대선을 넘어 봉황의 자리에 앉은 다음이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알았어요.”

수안은 다시 잔을 들어 건배사를 제안했다.

“자 우리 다시 축하하죠. 아내의 성공과 우리의 성공을 위하여!”

“하하하. 저 혼자 다 해 먹어 놓고 우리의 성공이라니! 아까 며느리 축하는 했으니 이번엔 바꾸자. 수안의 성공과 강운의 발전, 그리고 예진 아씨를 위하여!”

강운모 회장은 멋대로 문구를 바꿔 다시 건배를 제안했다.

샴페인을 마신 수안은 마지막 선물을 공개했다.

“아! 하나 더 있는데 깜빡했네.”

“또 뭐야? 왜 자꾸 나와?”

다른 가족들도 수진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번엔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맨날 별거 아니라고 해 놓고 나중에 보면….”

“해외에서 쓰라고 계좌를 만들어 놓고 알아서 가라고 하면 좀 그렇잖아.”

“응?”

그럼 알아서 가야지 모셔가기라도 한다는 뜻일까.

“전용기 사놨습니다. 인테리어 잘 뽑혀서 아버지도 만족하실 겁니다.”

“……!!”

“우, 우리가 타고 다닐 전용기?”

“설마…. 회사 전용기겠지.”

수안은 수진과 수현의 의문을 시원하게 해결했다.

“두 대 샀다. 하나는 회사에서 공무용으로 사용할 생각이고, 하나는 우리 가족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목적이야.”

수안은 아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에 어머니랑 여행 준비 중이라고 하셨죠? 비서실에 일정만 확정해서 알려주세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일 먼저 타 보시겠네요. 아차. 이거 비밀이었던가요?”

“…….”

방금 전에 수안이 제안했던 여행이다.

“어머. 당신 여행 준비했어요?”

“아. 날씨도 좋고…. 당신과 같이 쉬려고…. 하와이로 가 볼까 했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으면 얘기해. 유럽도 좋고 미주 대륙도 나쁘지 않지.”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이 정도 일에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진 않았다.

“다 생각이 있으셨지. 설마 아버지가 며느리 선물만 챙길 사람인가?”

“난 그것도 모르고…. 괜히 버럭 했네.”

강운모 회장은 수안만 볼 수 있도록 엄지를 들었다.

수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부모님의 관계 개선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이들과 놀다가 들어온 수용은 뒤늦게 전용기에 관해서 들을 수 있었다.

“형 스케일은 진짜….”

“너도 국내에만 있지 말고 해외에 좀 돌아다녀.”

“혼자서 무슨 재미로?”

“애인은 안 만들어? 그래도 대학 다닐 때는 여럿 만나더니.”

“막 사업 커나가고 있는데 어딜? 연애보다 사업이 더 재미있더라.”

강운모 회장의 피가 다 어디로 가겠는가. 수안의 형제들도 사업에 눈을 뜨고 있었고 그중에 수현과 수용이 아버지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모양이다. 물론 수안은 논외로 쳐야 했다.

“큭. 이러다 너도 수현이 꼴 나겠다.”

요즘은 아예 선 자리도 나가지 않는 수현이다. 수안의 자본금을 수혈받아 바쁘게 커피 프랜차이즈 매장을 확장하고 있었고, 전국을 뛰어다니느라 오늘 모임에도 겨우 참석시켰다.

수용은 부동산이 회복세를 띠며 늘어나는 거래에 부동산 전용 사이트 방문자 수가 쭉쭉 늘어난다. 특히 다움과 네이보를 통한 광고가 그 효과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었다.

‘사업이 잘되니 재미있을 수밖에.’

“나는 눈 낮거든요? 형수님 정도만 되는 분이면 족해.”

“…그게 낮은 거냐?”

“형이 아무리 뭐라 해도 내 생각은 변함없어. 어딘가에 내 짝이 있을 거야. 형수보다 더 예쁘고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해 줄 사람이.”

수현이보다 수용이가 짝을 찾기 힘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에효. 너도 앞날이 깜깜하다.”

“형은 왜 누나들만 챙겨 주는데? 나도 좀 찾아봐 주면 되잖아?”

“찾는다고 나오면 좋겠지만, 마음대로 되냐?”

“찾아나 보고 얘기하지?”

“썩을. 알았어.”

“크흐흐.”

그래도 나름 자기 사업을 하며 앞가림은 하는 녀석이다. 게다가 강운 그룹의 막내아들이라는 신분이 있으니 맞선 보겠다고 나설 사람은 줄을 선다.

“네 조건 중에서 얼굴만 좀 빼면….”

“그걸 왜 빼? 나 평생 마누라 얼굴 뜯어먹고 살 테니까 얼굴은 무조건이야!”

얼굴만 빼면 후보가 확 늘어날 텐데 이 부분을 양보하지 않는다.

* * *

수안은 아내 아현과 함께 작은 공연장에 도착했다. 가수 김광식의 소극장 공연을 보기 위함이다. 매번 같이 간다 간다 말만 하다가 이번에서야 아내와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

“그런데 당신 바쁘지 않아?”

“바쁘긴요.”

드라마가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워낙에 인기가 있었던 탓에 여기저기 프로그램에서 동의보감 허준의 출연진을 모시지 못해 안달이었다. 주요 조연배우들은 물론이고 주인공 격인 배우들도 바쁘게 TV에 출연하고 있는 와중이다. 거기서 아현만 쏙 빠져 있었다.

“더블 엔터에서 김 사장이 앓는 소리 하던데? 당신이 자꾸 TV 출연을 고사한다고.”

김기수 사장은 걸려오는 전화에 몸살이 날 정도라고 했다. 드라마에서 아현의 비중은 주인공 허준 역 다음으로 높았던 탓에 아현을 모시고자 하는 연락이 방송 3사에서 골고루 걸려오고 있단다. 하지만 아현이 출연을 고사하고 있어 방송 제의를 거절하느라 직접 PD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좀 쉬려고요. 이번에 당신하고 보내는 시간이나 애들하고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어요.”

“…….”

수안은 안타까운 눈으로 아내를 돌아봤다.

“에이. 괜찮아요.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좋자고 했던 일이잖아요.”

“쉬는 건 좋은데, 그래도 TV에 자주 얼굴을 비추자. 당신은 연예인이고 그 인기는 팬들이 만들어 줬잖아. 너무 신비주의로 가면 당신을 사랑하는 팬들에겐 안타까운 일이 될 거야.”

돌려 말했지만, 결국은 팬들의 사랑에 보답해야 할 여배우가 의무를 저버리고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일침이다. 누가 강운 그룹 며느리에게 이런 말을 하겠는가. 수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

“그리고 뉴월드 형수님도 이번에 복귀 작품 고른다고 했어.”

“혜린이가요?”

“막 이름 부르진 말고.”

“어쨌든요. 정말로 복귀한다고요?”

“응. 지훈 형이 고모님께 부탁했다나 봐. 형수는 일찍부터 복귀하고 싶었는데,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거든. 당신이 드라마 나와서 잘되니까 고모님도 허락하신 거지. 그런데 당신이 갑자기 활동을 쉬면 형수도 곤란하지 않을까?”

“저도 완전히 활동을 접을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가정에 더 충실하고 싶었던 거죠. 당신 말대로 TV 활동은 생각해 볼게요.”

“그렇다고 활동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어. 당신 뜻대로 하면 돼.”

작은 소극장에 사람들이 하나씩 들어차기 시작했고, 김광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한다.”

조용한 가운데 그의 기타 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극장은 금방 그의 존재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한 곡이 끝나고 김광식은 수안에게 아는 척했다.

“오늘 대단한 분이 제 노래를 들으러 와주셨네요. 무척 반갑습니다.”

무대 조명 하나가 수안과 아현을 비추자 둘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고 인사했다.

““우아아아!””

“예진 아씨가 왔어!”

아현의 얼굴을 본 관객들이 환호했다.

“저보다 인기 있는 분들이 오셔서 감개무량하네요.”

수안은 김광식에게 손만 흔들어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주인공은 김광식이다. 수안의 손짓은 더는 관심을 빼앗을 수 없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오늘 끝까지 달려보겠습니다. [나의 노래]부터 달려보죠. 준비됐습니까!”

““네에!!””

다행히 김광식은 수안의 신호를 제대로 이해했다.

공연이 끝난 무대 뒤. 수안은 관계자나 다름없기에 김광식과 만날 수 있었다.

“오늘 공연 끝내줬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동이었어요.”

“아휴. 저는 대배우님 와 주셔서 감동입니다.”

“우리 같이 사진이라도 찍읍시다.”

SN 엔터는 요즘 방송계를 씹어 먹고 있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대단한 가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SN 엔터의 아이돌 가수는 방송사 가수 대상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고, 이후 데뷔한 여자 아이돌 가수도 걸핏하면 음악방송에서 1위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더블 엔터도 가수와 배우를 가리지 않고 방송에 내보내고 있었다. 최근엔 아현의 인기가 가장 높지만, 향후 최고 MC 자리를 차지할 인물도 소속되어 있었다. 이래저래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그런 연예인들 사이에 끼인 김광석은 나름의 존재감을 보이며 인기 포크송 가수로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중이다.

“후배들을 살펴주세요. 김 이사님.”

“하하. 아직도 이사라는 직급이 어색합니다.”

아현이 더블 엔터 이사직을 내려놓으며 김광식을 이사로 임명한 수안이다.

“차차 적응하시겠죠. 흐흐.”

“또 와주십시오.”

“관객들이 공연에 집중하려면 저희가 안 오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 콘서트 여시면 이이와 가 보겠습니다.”

아현의 말에 김광식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리로 남겨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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