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10억!!
64부작 드라마 동의보감 허준의 마지막 녹화일이다. 수안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녹화 현장을 찾았다.
“축하해 여보.”
“고마워요. 여보.”
“히잉. 엄마가 늙었어.”
“아앙~ 어엄마아~”
수안이 정원과 나현을 데리고 간 것이 문제다. 아현은 마지막 신에서 분장으로 나이 든 내의녀를 연기했기에 노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 분장해서 그런 거야. 괜찮아. 화장 지우면 원래 엄마로 돌아와.”
“킁. 진짜?”
“응. 얼른 화장 지우고 올게. 여보. 애들 좀 데리고 있어요.”
“그래. 알았어.”
그래도 특수 분장으로 노파를 만들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 부분은 수안이 따로 감독에게 부탁해 가벼운 메이크업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과거에도 본래 예진 아씨를 연기했던 배우의 특수 분장이 극의 마무리를 방해했었다.
수안은 아내가 분장을 지우러 들어간 사이 감독과 따로 인사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PD님.”
“어휴. 반갑습니다. 부회장님. 이제야 제대로 인사드리네요.”
“그간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협조라니요. 당연한 일입니다.”
강운에서 드라마 제작에 관여한 것은 별로 없었다. 그저 적당한 금액을 협찬하고 드라마 제작에 불편함이 없도록 도운 것이 전부다. 최근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의 분장에 한마디 한 것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았다.
수안은 두툼한 봉투 하나를 감독의 주머니에 넣어 주며 말했다.
“이건 별거 아닙니다. 종방연 하실 때에 사용해 주십시오.”
“뭘 또 이런 것까지 챙겨 주시고….”
“나중에 좋은 인연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우리 아현 씨 잊지 말고 챙겨 주세요.”
훗날 [의녀 대장금]을 연출할 PD이기도 했다.
‘장금이는 원래부터 우리 아현 씨 배역이니까!’
“물론입니다. 앞으로 사모님은 최우선 캐스팅입니다. 하하하.”
* * *
“엄마!”
“엄마아!”
아현이 화장을 지우고 나타나자 정원이는 달려가 안겼고, 나현이는 아빠 품에서 놔 달라며 버둥거렸다. 아현은 정원이를 먼저 꼭 껴안아 주고 나서 나현을 받아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우리 귀염둥이 잘 있었어?”
“까아~ 엄마!”
막내 나현의 나이는 올해 세 살이다. 자식은 세 살까지 평생 효도를 다 한다는 말처럼 존재 자체만으로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휴. 우리 나현이 보고 싶어서 엄마가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엄마 사랑해.”
“엄마도 나현이 너무너무 사랑해~”
* * *
아현이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에 맞춰 수안은 온 가족을 소집했다.
“어머. 아가씨도 오셨어요?”
수진도 남편과 함께 서초동에 왔다.
“오빠가 올케언니 축하해 주는 날이라고 알려줬거든요. 드라마 대박 축하해요. 시댁에서 언니 한번 데려오라고 난리에요.”
“호호호. 나중에 식사 같이해요.”
수안은 수진의 신랑과 인사하고 있었다.
“회사 일은 할 만해?”
“예. 이제 경기도 살아나고 있어서 조금 바빠졌습니다.”
“사돈 어르신이 아직도 승진을 안 시켜 주셨나? 아직도 일선에서 뛰는 거야?”
“이제 대리 달았습니다.”
대리를 달았다면 정상적인 승진 연한이 지나고 정식으로 대리를 달았다는 뜻이다.
“어휴. 어느 세월에 사장까지….”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면 사장까지 최소 30년은 소요된다.
대리에 2년, 과장에 4년, 차장에 4, 5년 그리고 부장에 5년 이상. 다시 이사부터 상무, 전무, 부사장까지 차례로 승진해야 사장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아직 아버지가 정정하셔서 괜찮습니다.”
“그럼 우리 회장님은 몸이 안 좋으셔서 날 부회장으로 올리셨을까. 미리 회사를 경영하면서 익숙해지라는 뜻이야. 사돈 어르신께 더 어필해 봐. 매제는 머리가 좋고 성실해서 회사 업무 파악에 6개월이면 충분했어. 이젠 경영을 배울 차례란 말이야. 경영자의 마인드와 피고용인의 마인드는 전혀 다르거든.”
수안은 회사를 경영하며 배울 수 있었다. 근로자로 일할 때는 불만스러웠던 일들이 경영자로선 너무도 당연한 일들이었다. 스스로가 처한 상황에 따라 같은 현상을 다르게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예. 형님 덕분에 제가 승진할지도 모르겠네요.”
수안의 뜻을 전달하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진짜 전화 한번 넣어줘?”
“아휴. 아닙니다. 해도 제가 해야죠.”
“그래. 내가 전화해서 부탁하는 것도 불편하실 일이지.”
수안이 상준과 대화하는데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수안아 잠깐 서재로 와 봐.”
“예. 아버지. 매제는 이따 다시 봐.”
“예. 형님.”
* * *
“앉아 봐.”
“예. 아버지.”
수안에겐 앉으라고 해 놓고 강운모 회장은 책상으로 가서 쇼핑백 하나를 꺼내 왔다.
“이거 네 마누라 갖다줘라.”
“선물입니까? 아버지가 직접 주셔야죠.”
“큼큼. 아냐. 그냥 네가 전해 줘.”
“아버지가 이렇게 마음 쓰고 있다는 걸 아내도 알아야죠. 잠시만요.”
“야, 야. 어디 가?!”
수안은 얼른 서재 문을 열고 큰소리로 외쳤다.
“여보! 얼른 이리로 와 봐.”
“네에!”
“너는 왜….”
수안이 타박을 듣기 전에 아현이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예. 아버님. 부르셨어요.”
“휴우. 너도 앉아라.”
민망해서 수안을 통해 대신 전해 주려 했는데 결국은 이 꼴이다.
“별거 아니다. 드라마 촬영하느라 수고했다.”
“아버지가 선물 사 오셨대.”
수안이 아버지가 가져온 쇼핑백을 아내에게 건네줬다.
“어머.”
강운모는 아현이 선물을 가지고 나가서 혼자 확인하길 원했지만, 아현은 그 자리에서 선물을 뜯었다.
“너무 예뻐요. 이번에 샤넬에서 새로 나온 신상이네요.”
“백화점에 들를 일이 있어서 지나다가 하나 사 왔어. 큼.”
강운모 회장이 백화점 들를 일이 있겠는가. 오로지 팬심으로 선물을 골라온 결과였다.
“…뭐야. 난?”
“내 어깨는 장식인가? 나도 저 가방 예쁘게 걸고 다닐 수 있는데?”
“여보. 며느리 것만 사 온 건 아니겠죠?”
서재 문을 닫고 들어오지 않아 생긴 참사다.
수진이와 수현이를 포함해 어머니까지 열린 문을 통해 선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
아버지가 말이 없자 공격이 이어졌다.
“이제 난 출가외인이라 이거지?”
“난 아직 시집 안 갔는데?”
“엄마는 그럼 뭐니?”
강운모 회장은 정말 오랜만에 곤란함을 느꼈다.
“수, 수안아.”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말이다.
“에헤이. 오늘 주인공은 누구? 바로 대배우 임아현이잖아. 다른 분들도 선물 꺼내 봐. 설마 빈손으로 축하해 주려는 건 아니지? 아버지는 센스 있게 선물까지 미리 준비하셨는데….”
그냥 모이자고 해서 모였지, 선물을 준비하라는 말은 없었다.
이제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곤란함을 느낄 차례다.
“…….”
“…….”
“…….”
수용이 정적을 깨트리며 멀리서 소리쳤다.
“오늘 우리가 같이 마실 샴페인 몇 병 사 왔으니까 같이 잔 채워 주세요~”
“어~ 지금 갈게.”
“엄마. 가자. 가.”
“당신 이따 봐요!”
“아버님. 저도 나가 볼게요.”
집안 여성들이 후다닥 거실로 사라지고 수안의 어깨를 툭 치는 손길이 있었다.
“…수고했다.”
“수진이 수현이는 상관없지만, 어머니는 뭐라도 해 드려야겠는데요?”
“…수억 깨지겠네.”
“큭. 오랜만에 데이트도 좀 하세요. 선물도 사드리고 맛있는 것도 드세요. 날씨도 좋은데 해외 휴양지라도 같이 다녀오시고요.”
“그럴까?”
“아. 그리고 나가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가족들 전부 있는 데서?”
“예.”
수안도 아버지와 함께 서재를 나서서 거실로 향했다.
이미 매제와 수용이 가족들의 잔을 세팅해 놓고 있었다.
“아버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큼. 우리 며느리 드라마 찍느라 수고 많았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으로….”
강운모 회장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수진과 수현이 속닥거렸다.
“우리 며느리란다.”
“우린 이제 올케언니한테도 밀린 거야.”
“…또한 강운 그룹의 이름을 빛내준 아현을 위하여!”
“““위하여!”””
강운 그룹 가족들만을 위한 작은 파티가 열렸다.
집안의 유일한 아이들인 정원과 나현은 고모들과 삼촌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즐거워했고, 아현도 막간의 여유를 즐기며 가족들과 대화를 나눴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수안이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이번 IT 닷컴 버블 사태로 약간 여유 자금이 생겼거든요.”
“강운 증권과 BE 인베스트먼트는 손실이 아니라 굉장한 이득을 봤지.”
아버지의 말에 수안이 화답했다.
“예. 저도 해외에서 BE 인베스트먼트 펀드에 투자했습니다.”
“형. 형 돈 벌었다고 자랑하려고? 여기 형 돈 많은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수용이 끼어들었다. 근래 수용은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고, 부동산이 회복세로 돌아서며 상당한 돈을 만지고 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선점한 시장을 마음껏 누리는 중이다.
“좀 자랑하면 어떻습니까. 저는 궁금하니까 계속해 주세요.”
상준은 수안이 이번에 벌어들인 돈의 규모가 궁금한 모양이다.
“말 그대로 해외 계좌이고 국내에 들여오지만 않으면 문제 될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가족은 해외에 출국할 일도 잦을 거라 각자 통장 하나씩 만들어 놨습니다. 여유롭게 써 줬으면 좋겠습니다. 수진이는 매제랑 알아서 나눠 써. 혼자 다 쓰지 말고.”
“오오! 안 그래도 파리에 갈 일이 있지!”
“역시 오빠야. 난 외국 호텔 업무 협약하러 갈 때 써야겠다.”
“아들~ 잘 쓸게.”
“에이. 형. 또 돈이야?”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새로울 일도 아니다.
아무도 돈의 규모를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강운모 회장은 달랐다.
“그래서 얼마냐?”
“…각자 10억이요.”
“우아. 오빠 이번에 힘을 팍 줬는데? 올케언니 잘됐다고 막 퍼준다?”
“10억이면 그래도 해외에서 쓰기 딱 좋지. 일이 년은 여유롭겠는데?”
수진과 수현이 떠드는 동안 창백하게 질려 있던 강운모 회장이 벌떡 일어났다.
“10억이라니! 수안아!!”
“…….”
“…….”
강운모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가족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너 지금 10억이라고 했어? 미쳤어?! 그 돈이면 해외에서 인수 합병할 수 있는 기업이 몇 개나 되는데!!”
수진은 10억으로 기업을 살 수 있다는 말에 수현에게 물었다.
“요즘 해외 기업이 좀 싸나?”
“아니. 10억으로 무슨 회사를 사겠, 사겠…. 자, 잠깐.”
수진의 귀엣말에 답하던 수현도 뭔가를 깨달았는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 오빠. 시, 시, 십억이라고? 진짜?”
“넌 앉아. 아버지께 설명부터 드리고.”
수안은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올해 초에 BE 지분 25%를 미국 정부에 넘기면서 4천억을 받았습니다.”
“4천억?!!!”
“히에엑!”
지금 수안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강운모와 강수현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4천억으로 왜 저렇게 호들갑이냐는 태도였다.
“미국 정부에서 수령한 4천억은 펀드 여럿으로 분산되었고, 그중엔 독일 주식 시장에 공매도를 진행한 펀드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상당한 이익을 봐서 가족 모두에게 10억씩 줘도 여유가 있습니다.”
“하! 25%에 4천억이라니! 넌 왜 그 얘길 안 한 거야?!”
이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4천억을 받았다는 부분이 중요했다.
“미국이지 않습니까. 정부와 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괜히 속 쓰리실까 봐 말씀 못 드렸습니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아버지께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반강제적으로 넘기는 지분이라 차마 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없었다.
“속이 쓰리긴 뭐가! 4천억이나 받았으니 크게 남는 장사지. 흐흐. 하하하하!!!”
아버지의 웃음소리에 수용도 뭔가를 깨달았는지 입으로 가져가던 포크를 카펫에 떨어트렸다. 포크에 꽂혀 있던 사과 조각이 튀어 소파 밑으로 숨어 버렸다.
“사, 사, 사천억? 미국 정부가 준 사천억?”
아무리 계산해도 말이 안 되는 셈법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BE 인베스트먼트의 지분 25%를 가져가면서 고작 4천억 [원]을 줬다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천억 달러, 즉 100조 원 이상을 운용하는 거대 금융사를 고작 4천억 원에 어떻게 산단 말인가. 그리고 미국과 해외 계좌에서 사용할 환종의 단위는….
‘…아까부터 단위가 달러였던 거야!!’
수용의 얼굴도 강운모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창백하게 질리고 있었다.
‘거기다 우리가 받을 10억.’
10억 원이 아니라 10억 달러였다. 최근 1천 1백 원 선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환율로 따지면 무려 1조 1천억!!!
방금 형은 해외에서 넉넉하게 쓰라고 1조를 투척한 것이다. 그것도 가족 각자에게!
“야이! 미친!!”
“수용이는 입 다물고 자리 앉아.”
날카로운 수안의 시선과 묵직한 목소리가 수용의 자유 의지를 빼앗아 버렸다.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