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 달러
이미 프랭크에게 연락을 받아 일정을 비워 뒀다. 자주 연락하고 안면을 익힌 사람이라 로버트보다 더 친밀하게 느끼고 있었다. 전화 통화로 몇 가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었기에 수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미국의 재무부 장관이 방한하는데 대통령도 안 본다고? 그건 그것대로 결례잖아?
“만나야 할까요?”
-당연하지 이 사람아.
“프랭크에게 연락해서 일정을 조정하라고 하겠습니다.”
-프랭크 재무부 장관과 친분이 깊나?
미국의 재무부 장관 일정을 수안이 조정할 수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프랭크는 부장관 시절에 제 결혼식에도 참석했어요. 꽤 오랜 인연이죠. 부탁하면 들어줄 겁니다.”
-허허. 자네가 미국 정계에 끈이 있어서 다행이야.
“미국에서 사업하려면 이 정도는 필수죠. VIP께는 별일 아니라고 전해 주세요. 프랭크의 방문 목적은 BE에 관련한 일이라고 예상해요. 대한민국의 일은 아닐 겁니다.”
-…VIP에게 재무부 장관의 방한 목적을 말하기도 민망하군.
대한민국의 일이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일개 기업가를 보기 위해 미국의 재무부 장관이 직접 걸음 한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일국의 대통령은 들러리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없는 목적을 만들 순 없잖습니까.”
-그럼 기자들에겐 뭐라고 해?
수안은 책상의 신문을 들춰 경제면을 보고 말했다.
“외부엔 한미 경제 협력 강화를 위한 방문이라고 해 두시죠.”
-핑계는 좋군. 재무부 장관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시게. 사기도 손발이 맞아야 할 것 아닌가.
“푸흐흐. 예. 알겠습니다. 선배님.”
이후 한미 경제 협력 강화를 이유로 방한한 프랭크 재무부 장관은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다. 그리고 프레스룸에서 서서 기자들에게 판에 박힌 말을 해야 했다.
“한국 경제의 역동성과 회복력을 높이 평가한다, 양국 간 경제 협력 강화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프랭크 재무부 장관은 앞으로도 주요 경제 현안들에 수시로 소통하며 협력할 계획임을 밝혔다. 안 그래도 IT 버블로 상승하던 국내 주식 시장은 다시 큰 폭으로 상승하며 비명을 질러 댔다.
“온통 빨간 불이야! 대박!”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프랭크 장관님.”
“예전처럼 자주 만나면 좋을 텐데요. 하하하.”
기자들 앞에선 굳은 얼굴이었지만, 수안과 만날 때는 한껏 풀어진 얼굴이었다.
“대통령께서는 별고 없으시죠?”
“그럼요.”
내부로 자리를 옮긴 둘은 깊이 있는 대화를 시작했다.
“곧 미국에도 갈 예정인데 직접 걸음을 하셨네요?”
“곤란한 부탁이 있어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혹시나 불편한 사항이 있더라도 여기까지 온 저를 봐서라도 참아주십사 하고요.”
수안의 뇌리에 여러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미국 정부에서 불편한 얘기를 꺼낸다면 나올 법한 안건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먼저 골드만삭스 회장의 죽음과 잭 피에타의 혐의에 관한 증거 제출이 있었고 이후 대출 담보에 따른 강제 집행이 이어진다. 그 전의 일이라면 롱텀 사태로 인한 보험 상품부터 따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근래 외부 확장을 멈추고 내실을 다지고 있지만, BE의 규모가 커진 것도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으로 남아 있었다.
“프랭크 장관께서 이렇게 와 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화를 내겠습니까. 문제가 있어도 대안을 챙기셨겠죠.”
다행인 점은 프랭크 장관이 와 줬다는 것이다. 클린턴 정부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어도 프랭크가 대리인이라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프랭크 장관의 태도부터 공손하지 않은가.
“대안까지는 아니지만, 스티븐 회장님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이래서 최악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수안이 공을 들인 미국 정계의 인물 중에 로버트와 프랭크가 수위를 차지한다. 외국인이 미국 금융가를 주름잡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후로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고 있었다.
“어디 들어봅시다. 우리끼리 괜히 협상하느라 시간 보낼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다 말씀해 주세요.”
“휴우. 우선 미국 정부에서 있었던 논의부터 들어 보셔야 합니다. ….”
프랭크는 미국 정부에서 BE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회의한 내용을 가감 없이 공개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를 포함해 미국 금융계에서 얻어낸 이득과 대출, 그리고 골드만삭스의 지분 획득으로 로버트 전 장관을 회장으로 올린 일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잭 피에타 회장의 형 확정으로 인한 모건 스탠리의 지분까지 더해졌다. 정부에선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한쪽으로 몰리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정부가 BE의 확장을 염려하고 있군요. 저도 염려했던 부분입니다.”
“스티븐 회장님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지만, BE가 국내가 아닌 외국 법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물론 그간 정부의 정책에 반하지 않고 잘 따라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재무부의 지시도 충실히 따라 주셨죠.”
“그래도 외국인은 외국인이죠.”
“그렇습니다. …정부는….”
수안은 한참 머뭇거리던 프랭크를 조용히 기다려 줬다.
“BE의 지분 일부를 취득했으면 하고 있습니다.”
이제 수안이 입을 다물 차례였다.
“…….”
미국의 BE 인베스트먼트는 비공개 법인이다. 주식 시장에 상장하지 않고 지분 100%를 수안의 모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수안이 예상했던 안건 중에 나오지 않았으면 했던 부분이었다.
‘결국 이렇게 흘러가네….’
미국 정부가 BE를 그냥 두고 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이 아닌 외국 법인. 그것도 일개 개인이 소유한 금융사이니 BE를 통제할 장치가 필요하긴 할 것이다.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티븐 회장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프랭크 장관께서 직접 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이 왔으면 쫓겨났을 겁니다.”
“직접 걸음 하길 잘했군요.”
“우선 정부에서 마음이 상하지 않을 범위와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네요.”
수안의 물음에 프랭크는 당연하다는 듯이 속내를 보였다.
“정부에선 처음부터 50%를 불러 협상을 시작하자는 결론을 냈습니다.”
“훗. 그래서 최소한의 지분 비율은 얼마나 됩니까.”
50%로 협상을 시작하지만, 최소한 얻으려 한 지분 비율이 있다는 말이다.
“25%입니다. 여기까지만 확보하면 미국 정부가 안심할 수 있습니다.”
“25%로 만족한다는 가정이 없지 않나요? 나중에 또 달라고 하면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국 정부는 추가 지분 양도를 요청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BE의 기업 공개가 수년 내에 이뤄지면 스티븐 회장님의 지분 비율이 낮아질 테니까요.”
규모가 규모인지라 기업 공개를 할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는 여기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도 25%는 조금 과한데요?”
“그래서 제가 추가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거대한 금융사의 지분을 내놓는 일인데 지분값만으로는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수안은 점점 더 프랭크가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지분을 넘겨야 미국에서 사업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25%의 지분은 아쉬워도 포기할 수 있었다. 여기에 보상까지 붙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다.
“어디 보상이나 들어 봅시다.”
“앞으로 BE가 투자하는 미국 내 회사들의 지분 취득 제한이 사라질 겁니다.”
외국 법인인 BE 인베스트먼트는 미국 상장 회사 지분 취득에 제한이 걸려 있었다. 그 비율을 우회하기 위해 여러 회사에 지분을 분산해야 했는데, 그 제한이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호오.”
“그리고 자국 법인과 같은 세금을 부담하게 됩니다. 거기에 이번 지분 취득으로 인한 비율만큼 세금 탕감이 이뤄질 겁니다. 합법적인 감면이죠. 그리고 BE 자금의 외부 유출은 조심하셔야 하겠지만, 지금보다는 나아질 겁니다.”
프랭크 장관의 마지막 제안은 강운 그룹에 관해서였다.
“앞으로 강운 그룹에서 생산하는 휴대 전화와 전자 제품의 통관도 수월해질 겁니다. 미국 시장은 거대하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챙겨 주시면 더 바랄 게 없군요.”
“긍정적으로 판단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지분 양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한시름 놨습니다. 미국은 향후 BE의 발전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지분을 취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BE 인베스트먼트 25% 지분은 어떻게 산정했습니까? 정확한 금액이 있겠죠?”
“…….”
이 부분이 가장 큰 이슈일 것이다.
“BE의 지분 가치는 정부의 논의가 가장 뜨거웠던 부분입니다.”
기존 BE의 운용자산을 제외하고 최근 보험 상품으로 인한 소득만 무려 4천억 달러가 넘는다. 대부분을 채권으로 돌려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도 BE의 자산이었다. 여기에 기존 BE의 운용 자산과 지분을 가진 회사들, 각지에 흩어져 있는 호텔 등의 부동산까지 더하면 지분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BE가 가진 자산이 워낙에 거대하고 향후의 발전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막대한 금액을 지급해야 맞겠지요.”
“알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한 푼도 깎아 줄 생각이 없거든요. 이 부분은 협상 불가라는 걸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제가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강조한 부분이 바로 BE의 가치 산정입니다.”
“미국 정부에서 BE의 지분 총액을 얼마로 산정하셨을까요?”
수안의 물음에 프랭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미국 BE의 가치는 1조 달러로 계산했습니다.”
“흠….”
수안은 1조 달러라는 말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프랭크는 이 금액을 확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었다.
“1조 달러가 대단치 않으십니까?”
달러당 1천 원으로 계산하면 무려 1천조 원에 이르는 금액이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25% 지분에 얼마를 주려고 하죠?”
미국은 지분 가치 그대로 매입하고 싶겠지만, 수안에겐 너무 저렴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엄청난 수익을 달성하며 성장할 미국 BE의 가치는 고작 1조 달러가 아니었다. 10년 이내에 지급할 배당만으로 수천억 달러에 이를 것이다.
“3천억 달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대한입니다.”
“4천억 달러로 합시다. 5년 이내에 1천억 달러 이상의 배당이 있을 겁니다. 이 부분도 문구로 넣으시면 되겠죠. 미국 정부가 가져갈 25%에 1천억 달러의 배당금을 조건으로 하면 협상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배당 1천억 달러에 지분 가치 1천억 달러 상승이라면 충분히 논의해 볼 수 있었다.
“배당 1천억 달러가 가능할지….”
문제는 실제로 배당할 수 있을지였다. 아무리 배당을 주고 싶어도 BE에서 이익을 내지 못하면 배당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 금융사를 대상으로 보유한 채권 대부분에 미수 채권 충당금을 설정했습니다. 이 부분이 매년 상환되기만 해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 독일의 주식 시장은 IT 기업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강세를 보이고 있지요. 올해 시장은 아무거나 주워 먹어도 손실을 보지 않아요. 큰 기회가 왔어요.”
“BE의 수익률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다른 금융사와 비교도 어렵죠. 하지만, 배당에 관해서는 스티븐 회장님의 확답으로도 논의가 쉽지 않습니다.”
“지분 양도 계약 서류에 추가로 조건을 넣으세요. 1천억 달러의 배당금을 5년 이내에 지급하지 않을 시 지급한 1천억 달러를 반환한다고 하면 믿겠지요. 정확하게 계약서에 못 박겠습니다. 5년에 1천억 달러를 확정적으로 지급하는 계약입니다. 고작 25%를 가진 주주에게 1천억을 배당한다 이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