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리 집에 놀러 와 (196/304)

우리 집에 놀러 와

미국 BE의 지분을 가진 홍콩의 모회사가 한국인 강수안의 소유였다.

“하지만 그는 국적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프레지던트.”

클린턴은 지금까지 회의석 상단에서 나오는 의견들을 경청하고 있었다. 정부 각료를 모아 두고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내년에 대선이 시작되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 놔야 했다. 이 상태로 끌고 가다간 미국의 금융이 해외에 먹히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스티븐 회장에게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라고 요청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스티븐 회장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 아닙니다. 동맹국에 예의도 아니지요.”

수안이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수안은 미국의 금융 기업을 가진 경제인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 강운 그룹의 장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전 세계적으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유명한 스포츠 스타였다. 이런 수안을 미국인으로 만든다는 것은 타국에 손가락질받을 일이었다.

“그럼 적정 비율의 지분을 취득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흐음….”

“스티븐 회장의 지배권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라면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지분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야 BE를 미국에 묶어 둘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부가 받았던 혜택이 있으니 정중하게 지분 양도를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직접 스티븐 회장과 접촉할 필요가….”

주변을 둘러보던 클린턴은 한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이 부분은 프랭크 재무부 장관이 맡아 주면 좋겠군요.”

“…예. 제가 맡아서 진행하겠습니다.”

로버트가 재무부 장관에서 물러나고 부장관이 장관으로 올라섰다. 이미 수안과 안면을 트고 지냈던 프랭크 빈치 재무부 장관이다.

“다만 지분을 취득하는 비용 외에 추가 보상이 필요합니다. 지분 가치를 평가해 가격을 산정해도 상대는 스티븐 회장입니다. 지분을 내주지 않아도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합당한 보상을 내걸어야 스티븐 회장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 인맥의 저울추가 사실 미국보다 BE에 더 기울었다는 것은 클린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프랭크 빈치는 로버트 전 재무부 장관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봤고 함께해 왔다. 그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자신과 로버트는 억만장자가 되었고, 로버트는 추가로 거대 금융사의 수장이 되었다. 자신의 뒤를 맡기기에 스티븐 회장만큼 든든한 인물이 어디 있을까.

“보상이라….”

‘나중에 보상 수준으로 줄다리기하는 것보다 지금 딜을 성사시켜놔야 뒷말이 없지.’

“롱텀 사태로 위기가 도래했을 때 BE 인베스트먼트는 가장 많은 자금을 지출해 금융 시장의 안정을 도왔습니다. 미국 금융사에 보험 상품을 매입하고도 절반 이상을 대출상품으로 전환해 주기도 했지요.”

“BE는 그 때문에 더 큰 이익을 챙기게 됐지요. 우리가 BE를 염려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가 끝이 아니죠.”

모건 스탠리도 BE에 보험 상품을 판매했고, 결국 막대한 채무를 짊어져야 했다. 다른 은행들은 규모가 작을 뿐이지 대부분 BE와 채무 관계를 맺고 있었다. BE의 영향력이 더 커지기 전에 조치가 필요했기에 이렇게 모인 것이다.

“두 기업의 수장에게 문제가 생기리라는 예상은 없었을 겁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의 지분 인수는 예상치 못한 사고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로버트 전 재무부 장관을 골드만삭스 회장에 앉히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금융사가 BE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면 절대 이런 방식으로 남에게 경영권을 넘기지 않았을 겁니다.”

클린턴은 BE가 아닌 다른 금융사가 어떻게 일을 처리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합병 절차를 밟아 더욱 거대한 금융사로 재탄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BE는 합병이 아닌 현상 유지를 선택했고, 확보한 지분은 정부 인사로 경영자를 추대하는 데 이용한 것이 전부였다.

“미국에 호혜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BE에 미국 정부는 외국인이라 믿지 못한다며 지분을 달라고 합니다. 누구든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선 과반의 지분도 아닌 일부의 지분일 뿐이니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크게 부족하죠. BE가 계속해서 미국에 좋은 감정을 갖게 하려면 금융 외에 다른 혜택을 줘야 합니다. 지분을 얻어내면서도 서로 간에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최선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장관의 생각이 나와 일치합니다. 계속 BE와 좋은 관계로 이어 갔으면 해요.”

‘1차는 성공이다.’

긍정적인 반응이면 충분했다. 다음에 나올 말을 위한 밑밥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미국 정부에선 스티븐 회장에게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을지를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BE의 지분을 몇 퍼센트까지 확보해야 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

“…….”

가장 민감한 주제였다. BE의 지분은 몇 퍼센트나 인수할 것인가와 얼마를 지급할 것인가. 추가로 스티븐 회장에게 무엇을 보상할 것인가는 당장 도출되기 어려운 답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BE의 기업 가치는 상상 이상으로 불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정부에서 정보를 차단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스티븐 회장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수안이 BE 인베스트먼트의 소유주라는 사실은 지금도 알려지는 중이지만, 전파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그 뒤에 미국의 정보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스티븐 회장의 정체가 알려진다면 사람들의 시선은 BE에 머물게 됩니다. 당연히 BE의 실적을 눈여겨볼 겁니다. 실적을 확인하면 누구든 BE 인베스트먼트에 돈을 맡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BE가 일반에 펀드 판매를 시작하고 오래되지 않았다. 다른 금융사처럼 자신들의 실적을 홍보하지 않아 그렇지 그 어떤 투자 금융사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누가 BE가 아닌 다른 금융사에 돈을 맡기겠는가. 이미 대부분 금융사에선 BE의 펀드에 많은 자금을 배정하고 쏠쏠한 수익을 챙기고 있었다.

“BE의 지분을 인수하기로 한 이상 지분율과 보상은 빠르게 결정해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최대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클린턴은 재무부 장관의 인선이 실로 적절했다고 생각했다.

“그럼 지금부터 논의를 시작해서 결론을 보도록 합시다. 그래야 재무부 장관이 스티븐에게 지분을 얻어올 수 있지요.”

* * *

“미국에서 재무부 장관이 방한한다고 합니다.”

“재무부 장관?”

미국 의전 서열 15위. 미국 대통령 유고 시 승계 서열은 5위에 이른다.

고리타분한 서열이 아니라도 IMF 체제하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미국 재무부 장관의 방한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재무부 장관이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온다니 김대준 대통령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우리가 IMF와 협상한 조항 중에 지키지 않은 부분이 있던가?”

“몇 가지 미비한 부분은 계속해서 진행 중이지만, 크게 문제가 될 부분은 없습니다.”

“일전에 GM을 물 먹인 일은?”

대운 자동차 입찰에서 GM 대신 강운을 선택한 바 있었다.

“강운 그룹과의 일이라면 저희가 곤란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의전에 실수 없도록 하고 무슨 일인지 추가로 파악해 봅시다. 국정원 이 원장부터 불러오세요.”

“예. 대통령님.”

* * *

기화 자동차는 K-9을 출시했고 대운 자동차는 신차 출시를 위해 달리고 있었다. 남은 것은 한동안 잠잠했던 강운 자동차였다. 기화 자동차에 집중하느라 살피지 못한 것도 있지만, 워낙 K시리즈가 잘나갔던 탓에 함부로 다음 모델을 준비할 수 없었다.

본래 강운 자동차 모델로 생각했던 모델을 대현 자동차 정영수 회장에 넘겨준 다음이라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미래의 차량 디자인은 모두 수안의 머리에 들어 있었고 머리에 든 디자인을 현실로 옮겨올 능력도 충분했다.

수안은 강운 자동차에서 발표할 신차 디자인을 마무리했다.

“역시 강운 자동차는 이게 잘 어울리겠어.”

이번에도 기존의 방식과 동일한 디자인이다. 미래에는 새롭지 않지만, 지금은 새로운 디자인이라는 점이 기존과 동일했다.

“말리부. 역시 예쁘네.”

쉐보레의 2세대 말리부는 독특하면서도 훌륭한 비주얼을 자랑했다. 기존 말리부는 GM이 인수한 대운에서 나와야 했지만, 지금은 먼저 쓰는 놈이 임자 아니겠는가. 게다가 당시의 차량 결함은 심각할 정도였으나, 이번엔 결함이 생길 일이 있을까 싶다.

“기화 자동차에 대운 자동차를 더해서 차를 만드는데 똑같은 문제가 생길 리가.”

모든 회사의 차량 기술을 총동원해서 완벽한 품질의 차량을 출시하려 한다. 이미 3사의 차량은 기술 협약을 통해 서로 기술을 공유하고 진보된 기술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본래 GM과 차원이 다른 강운 자동차의 품질관리 시스템이 더해지면 결함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흐흐흐. 이제 강운 자동차도 재미 좀 보겠네.”

수안이 말리부 디자인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장 비서가 급하게 들어와 말했다.

“부회장님. 원장님이 전화 달라고 하십니다.”

“선배님이? 알았어. 그럼 이따 연락을….”

“급하다고 하셨습니다.”

“…뭔 일이야?”

급하다니 전화를 안 할 수 없었다.

* * *

“선배님. 접니다.”

-어. 전화 잘했어.

“혹시 시계방에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수안과 이현창 사이의 암호였다. 시계방은 스위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더 자세하게는 스위스에서 지내는 북한의 후계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수안은 후계자를 관리하는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시계방은 말끔하게 정리했으니까 신경 꺼도 좋아.

“…….”

‘대체 언제 정리한 거야?’

수안에게 예고도 없이 정리를 끝낸 모양이다.

“그럼….”

하지만 후계자를 어찌했다는 말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정리가 돌려보냈다는 뜻인지 회유를 완료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죽였나?’

-이제 가게는 다른 놈이 물려받겠지.

“아….”

정말로 끝났다는 말이다. 이제 북한에 남은 후계자는 둘이다. 그중에 가장 가능성이 큰 후계자는 마카오와 일본을 쏘다니는 첫째다. 수안이 다른 후계자에 관해서 묻자 이현창은 짧게 경과를 설명했다.

-접촉이 어려웠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얻었어.

“오오! 용케 찾으셨네요.”

-거기까진 후배가 알 필요 없고. 물어볼 것이 있어서 연락 달라고 했어.

벌써 김정남에게 접촉했다면 이제부터 수안이 관여할 일은 없었다. 수안도 깨끗하게 마음을 털어내고 말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BH에 다녀왔는데 미국에서 재무부 장관이 방한하는 건에 관해서였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와 수안에게 먼저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 프랭크 빈치 재무부 장관이요?”

-혹시 아는 거라도 있나? VIP는 일전에 대운 자동차 입찰에서 GM을 물 먹인 일이 걱정되는 모양이야.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라도 자세하게 말해 봐.

“저 보러 온다고 했습니다. 재무부 장관이 움직이는 일이라 한국에 통보한 모양인데, 아마 청와대에는 갈 생각도 없을 겁니다.”

마치 지나가던 친구가 집에 놀러 온다는 것처럼 편하게 말하는 수안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