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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선물 (195/304)

작은 선물

“백부님은 형들만 생각하고 있어. 혹시라도 자식들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진 않을까. 못 견디고 뛰쳐나가면 어쩌나…. 자신이 원망을 들어도 자식들이 올바른 길로만 간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니까.”

“…….”

“…….”

“이제 형들은 백부님이 걱정하실 일만 하지 않으면 그걸로 족한 거야. 혹시나 백부님이 다른 매장으로 보내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죽은 듯이 살아. 그래야 진짜 기회가 오니까.”

“거 노친네. 그냥 믿지 좀.”

“창식이 넌 우리가 한 일을 생각해 봐라. 믿게 생겼나.”

창수의 말에 창식도 금방 수긍했다.

“못 믿지. 나도 날 못 믿어.”

“응. 나도 너 못 믿어.”

창수의 말에 창식이 눈을 부라렸다.

“…….”

“꼬나보면 어쩔 건데? 너 밖에 나가서 뭐 하고 놀다가 이제 들어왔어? 또 게임방 가서 스타 하다가 왔지?”

한창 스타크래프트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여기저기 게임방이 늘어나고 있었고, 용산에도 통신사 대리점과 더불어 컴퓨터 부품매장이 많아지고 있다.

“에이. 형도 노친네 못지않네.”

“냄새를 풍기질 말든가. 네 몸에 담배 냄새가 찌들었어.”

창식은 킁킁거리며 몸의 냄새를 맡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썩을. 쩐내 장난 아니네.”

수안은 티격태격해도 형제는 형제라고 생각했다.

“백부님께 좀 잘해 드려. 월급 받으면 뭐라도 좀 사다 드리고. 가족 사이에도 애정 표현은 필요하잖아.”

“노친네가 돈이 없겠냐?”

“그러게. 겨우 우리 월급 가지고 누구 코에 발라?”

“철드는 게 별건 줄 알아?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 조금 내려놓고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면 그게 철드는 거야. 생판 남을 배려하라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 마음만 좀 알아 달라는데 그것도 못 해?”

“이 새끼는 타골 전문이네.”

“쟤는 옛날부터 그랬어.”

“단숨에 백부님 인식을 바꾸진 못해. 천천히 해. 맡은 일도 싫은 티 팍팍 내면서 하지 말고 즐기면서 하고. 그래야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생활도 버틸 수 있잖아.”

“오냐오냐했더니 충고가 계속 는다?”

“아놔….”

“에라이. 나중에 세기 통신 경영을 맡길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형들은 안 되겠다.”

“……!”

“……!”

안 그래도 훗날을 생각하면 분쟁밖에 없었다. 둘 중의 하나가 밖으로 나가 다른 회사를 경영한다면 현재 상황에선 최선의 비전이었다.

둘은 후다닥 일어나 일어서던 수안을 다시 자리에 앉히고 양쪽에서 어깨를 주물렀다.

“아우님. 저희가 뭘 하면 될 깝쇼.”

“창식아 인마. 너는 다리!”

“아차차.”

창식은 얼른 수안의 다리를 탁자에 올리고 주무르기 시작한다.

“더 필요하신 거라도.”

“필요한 건 단 하나. 형들이 백부님께 멀쩡한 아들로 각인될 것. 집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 나가서도 새는 법이야.”

“암요. 아우님.”

수안은 부담스러운 형들의 손을 치우고 다시 자리에 앉게 했다.

“위치로!”

착. 착!

“앉았습니다. 말씀하십쇼. 아우님.”

“…나중에나 경영을 맡겨 볼 수 있다는 말이지, 회사를 준다는 말은 아니야. 알지?”

“우리가 염치가 있지, 네 회사를 달라고 하겠어?”

자식에게도 함부로 물려주지 않는 회사다. 하물며 사촌에게 회사를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다. 대기업 사장이라고 내밀 수 있는 명함만 있다면 충분했다.

“이 생활도 오래 안 갈 거야. 백부님은 어찌 됐건 형들을 회사로 불러올 것이고 회사에서 작은 일이라도 맡기실 거야. 그리고 형들이 아무리 싸워 봤자 백부님은 공평하게 분배하실 거야.”

백부는 동생에게 가업을 몰아 준 할아버지의 선택을 답습할 사람이 아니었다. 한송 그룹 지분을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줄 거라고 확신한다.

“노친네는 그러고도 남아.”

“할아버지한테 당한 게 있는데 본인이 그러시진 않겠지.”

물려받을 지분이 공평하더라도 한송 그룹의 경영자가 앉을 의자는 하나였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면 형들은 회사로 가자마자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할 것이고 백부님은 그 꼴도 보기 힘들어하실 거야.”

“그래서 세기 통신 경영권을 양보하겠단 생각까지 한 거야?”

“…성자 나셨네.”

“조용히 해. 새끼야. 아우님 말씀하시는데.”

“아차.”

“아우님. 계속하시죠.”

“…….”

경영권을 맡겨도 될지 심히 걱정스럽지만, 아직 먼 훗날의 일. 창수, 창식 형제가 최소한 중년의 나이가 되어야 가능할 일이다.

“둘이 한 회사에서 아웅다웅 싸우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어. 회사로 가면 나중에 하나가 경영자로 올라설 때 업무 능력이 좋은 쪽이 세기 통신으로 옮겨. 어차피 지분이야 둘이서 똑같이 갖고 있을 테니 회사 소유로 싸울 일은 없잖아.”

“그 와중에 본인 회사엔 실력 있는 사람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씀?”

“너 같으면 쩌리를 데려가고 싶겠냐?”

“그건 아니지.”

“우리 둘 중에 실력 없는 놈이 한송 텔레콤에 남고 실력 있는 놈은 세기 통신으로 가서 경영을 맡는다면 아주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해.”

“그건 내가 되겠지만.”

“웃기시네. 게임방이나 끊고 얘기하시지?”

“맨날 호구 등쳐먹던 용팔이가 할 소린가?”

“넌 그것마저도 땡땡이치고 놀다 오잖아!”

“…….”

여전히 환상의 케미를 보여 주는 둘을 보고 있자니 괜히 헛바람을 불어넣었나 싶었다. 아무리 엇나가도 다시 시작할 시간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다. 실수를 할 수 있는 기회. 누구나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기회를 돈으로 사는 사람들. 창수와 창식은 그런 부류에 속했다.

밖에서 경호를 보던 직원이 슬쩍 들어와 수안과 눈을 마주쳤다. 수안은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고 경호원은 얼른 다시 제자리로 갔다.

‘아무래도 형님들 용돈은 안 되겠어.’

경호원 손에는 현금이 가득 들어 있는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빠듯한 월급을 생각해 잠깐의 여유라도 갖게 해 주려 했지만, 둘이 대화하는 꼴을 보니 아직 조금 더 고생해야 할 것 같다.

형들에겐 실수를 만회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입방정만 조심해도 백부님 선물 살 돈을 챙겼을 건데….’

수안은 저들 복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다.

* * *

수안이 떠나고 형제의 대화가 시작됐다.

“저 새끼는 나이도 어리면서 나보다 어른 같으냐.”

“아마 네가 여섯 살, 수안이가 다섯 살 때부터 그랬을걸? 창식이 네가 수안이 때리려다가 따귀 맞고 울면서 뛰쳐나왔지?”

“큭. 형이 복수한다고 같이 갔다가 형도 맞았잖아. 쟤는 그때부터 싹수가 노랬어. 어딜 형들을 때려?”

“푸흐흐. 지 맞은 건 기억 못 하다가 나 맞은 건 또 기억나냐?”

당시 둘은 한참 어린 사촌 동생에게 맞아 고자질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때렸는지 흔적도 남지 않았다. 고자질을 해도 혼나는 것은 둘이었을 것이다.

“아까 다리 주무르는데 여전히 근육은 빵빵하더라. 우리 가문에서 어쩌다 저런 놈이 나왔는지….”

“저 새낀 혼자만 사는 세상이 달라.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회사 경영은 더 잘해!”

한참 수안을 씹던 둘은 수안이 던져 준 화두에 이르렀다.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지. 회사 생각하면 나도 고민이 많았거든. 어차피 둘은 안 될 테니 포기할까 생각하고 있었어.”

창식은 군을 제대하고 생각이 많았다.

‘내가 한송 텔레콤을 경영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그만한 역량이 있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형이 회사를 경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딜 가든 자신이 일할 곳이 없겠나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긴 어려웠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허전해서 더 밖으로 돌았는지 모르겠다.

“야. 인마….”

“그래도 형이잖아. 나보단 형이 낫지.”

“새끼…. 너도 충분하니까 앞으론 농땡이 치지 말고 일해. 노친네가 우리만 생각한다는데 최소한 혈압 안 오르게는 해 줘야지.”

“…노친네. 말을 하려면 직접 하든가.”

“우리가 앞에 가기나 하냐? 맨날 도망 다녔는데?”

“…….”

사실이다. 자신들을 용산에 처박아 둔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었다.

대화할 시간도 없었으니 직접 듣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창식아. 너 남은 월급 얼마야?”

“그건 왜?”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사다 줬으니까 지금이라도 아들 노릇 해야지. 수안이 말 못 들었어? 아무도 우리 안 믿어도 아버진 믿는다잖아. 우리 편은 아버지밖에 없어.”

“에효. 쪼들려 죽겠구만.”

툴툴거리면서도 지갑을 꺼내는 창식이다. 창수도 지갑을 꺼내 현금을 모았다.

“그런데 이걸로 뭐 사지?”

“…어. 보통 월급 받으면 부모님 내복 사지 않나?”

“어! 맞아. 그게 좋겠다. 내복이면 우리 돈으로도 충분하겠네.”

둘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내의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고 별거 아닌 선물에 아버지는 작은 눈물을 보였다.

‘노친네는 왜 울고 그래…. 불효자 마음 쓰리게.’

‘썩을. 별것도 아닌데….’

“…나가.”

“쉬십쇼.”

어머니도 두 아들이 가져온 선물에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다.

“흐흑. 우리 아들들이 이제 사람 됐네. 어휴. 이런 날이 왔어. 허응.”

“별것도 아닌데….”

“왜들 이러셔…. 엄마까지.”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어머니의 눈물은 두 아들의 마음을 적시고 있었다.

‘…나 대체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냐.’

지금까지 술집에 가져다 바친 돈과 여자들에게 퍼다 나른 돈만 해도 수억이다.

그런데 고작 몇만 원짜리 내의를 선물 받은 부모님이 울고 있었다. 수백만 원이 넘는 가방을 가볍게 사던 엄마가 고작 몇만 원짜리 선물에 이렇게 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엄하고 퉁명스럽게만 대했던 사람이다. 엄한 얼굴 뒤에 숨기고 있었던 연약함을 오늘에야 알아봤다.

지금까지 낭비한 돈이 얼마나 가치 없게 쓰였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하아.”

창수가 과거를 후회하는 동안 옆에서 창식은….

“끄읍. 미안…. 미안해 엄마. 내가 잘못했어.”

“우리 막내 이리 와. 한번 안아 보자.”

“커흥.”

괜히 울컥한 창수도 어머니 곁으로 가서 어머니의 등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우리 엇나가지 않고 잘할게요. 지금까지 걱정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흐흑.”

“어머니….”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다.

* * *

수안이 한국에서 사업과 가족에 집중하는 동안 미국 정부에서 중요한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이제 잭 피에타의 형이 확정되면 BE 인베스트먼트는 모건 스탠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미국에 초거대 금융그룹이 탄생하는 셈이죠. 심히 염려되는 상황입니다.”

“BE 인베스트먼트의 확장이 염려된다는 점은 동감합니다. 이미 골드만삭스의 지분을 얻어 거대 금융사 하나를 품에 넣었죠.”

프랭크 골드만이 사망하며 전 재무부 장관인 로버트가 골드만삭스의 신임 회장으로 취임했다. 미국 정부에서 로버트가 갖고 있던 위치도 위치지만, 그는 민주당 계열의 정치인이었다. 로버트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여기에 모건 스탠리가 더해진다면 염려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현재도 대단하지만, BE에 모건 스탠리가 더해진다면 BE 인베스트먼트는 막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누가 뭐래도 돈을 가진 사람이 최고인 법이다.

“스티븐 회장은 미국인이 아닙니다. 조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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