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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족할 때 (194/304)

2% 부족할 때

‘용던?’

용산이라는 지명과 게임에서 나오는 던전의 합성어였다.

전자 제품이나 휴대폰을 구하려고 용산에 들어가면 게임 속 몬스터 몹이나 다름없는 판매원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IMF 이후 콘솔 게임 분야가 대부분 죽고 돈이 되는 통신업이 용산에서 성업 중이다. 형들이 거기서 일하고 있다면 상당히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일선에서 일을 해 봐야 뭘 좀 깨닫지 않겠어?”

“…고생 좀 하겠는데요? 괜찮을까요?”

“벌써 한참 됐어. 지금은 적응했지.”

“우아. 형님들이 버텼어요?”

“그놈들은 오히려 험한 일이 잘 맞아.”

수안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형님들이 워낙 험하게 놀았어야지.’

“그럼 직영 대리점에서 일한다는 말씀이죠?”

그래도 대리점은 맡겨 두지 않았겠나. 최소한 점주는 시켜 줬으리라 생각했다.

“군대로는 좀 모자란 것 같아서 사원부터 시작했어. 이제 적응했으니 다른데 보내서 더 굴려야지.”

“어휴.”

적응할만하니 또 다른 곳으로 보낸다는 말에 수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멀었어. 이번이 녀석들에겐 마지막 기회야.”

강병모 회장은 두 아들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더 늦어지면 정신병원에 가도 방법이 없었다.

“녀석들이 잘 버티면 그때는 회사로 불러야지.”

“…백부님.”

강병모는 두 아들을 쉽게 회사로 복귀시키지 않으려 마음먹고 있었다.

“녀석들은 이제 겨우 마음을 다잡아가는 중이야. 다시 예전처럼 여유롭게 해 주면….”

온통 아들 걱정뿐이었다. 백부는 두 아들이 과거로 돌아갈까 얼마나 걱정하는지 모른다며 한참이나 한탄을 늘어놨다.

“형들이 백부님 마음을 아는지 모르겠네요.”

“걔들이 애비 마음을 생각이나 할 것 같아? 저들 힘든 것만 생각하겠지. 걔들은 정신 못 차리게 굴리기만 하면 그만이야. 모르면 좀 어때?”

수안은 조만간 두 사촌 형에게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네 안사람이 드라마에 자주 보이더라.”

“보셨어요?”

“요즘 인기가 대단하잖아. 시청률이 50%를 넘었다지?”

“다행히 복귀 작품을 잘 선택했어요. 작품이 좋아서 나온 결과죠.”

강병모 회장은 수안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돌아갔고, 수안은 형들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형들이 용산에서 휴대 전화를 팔고 있다니….’

대기업 회장의 아들들이다. 아무리 밑바닥에서 시작한다 해도 용산은 해도 너무했다.

* * *

“얼마까지 알아봤어요?”

“그게….”

상대가 만만하게 보이자 말을 놓고 친근한 태도로 팔짱을 끼운다.

“오빠. 우선 들어와 봐.”

“어….”

“딴 데로 가 봐야 가격 다 똑같을 건데? 지금까지 몇 군데 알아보지 않았어?”

“그렇긴 했지만….”

“내가 이 근방에서 제일 싸게 해 준다니까. 형만 믿고 한번 견적 뽑아 보자. 응?”

판매원은 손님 뒤에서 불빛으로 암호를 전달하는 다른 상점 직원을 힐끗 보고 손님을 안으로 데려갔다. 암묵적으로 대부분 상점이 이렇게 연합하고 있었다. 뻥튀긴 가격을 안내받았던 손님은 어딜 가든 비슷한 가격을 안내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계 문제 생기면 언제든 와.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오케이?”

“고맙습니다. 형님. 덕분에 좋은 가격에 샀어요.”

호구는 가게를 나서는 순간까지 자기가 호구인지 모른다.

한 건을 해결하고 안으로 들어가 서류를 정리하는데 손님이 또 들어온다.

“어서옵셔!”

수안은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중무장하고 있었다. 경호원들은 가게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요즘 잘 팔리는 모델로 보여 주세요.”

간단하게 나 호구라는 소리다.

“요즘은 팬탁이 대세죠. 흐하하하. 여기가 제일 쌉니다. 제대로 견적 뽑아 드릴게.”

“그거 듣기 좋은 소리네요. 창수 형님.”

수안은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눈을 보였다.

“어….”

순간 인지 부조화가 창수를 덮쳤다. 여기서 만날 사람이 아니라 상대를 인식 할 수 없었던 탓이다.

“누구….”

“제대하고 오랜만에 보긴 하는데 날 몰라봐요?”

제대하고 본다고 하니 군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8사단?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미안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오는 건 아니지.”

군대에서 깽판 좀 치고 나온 모양이다.

“에라이.”

수안은 선글라스를 내리고 마스크까지 벗었다.

“나요. 형님.”

“억! 네가 여기 왜와!”

“왜긴. 형님 보러 왔지. 창식이 형은 어디 가시고?”

“창식이는 잠깐 외부에 물건 떼러 나갔는데….”

창수는 얼른 밖으로 나가 누가 보는 사람이 없는지 살피려다가 경호원과 눈이 마주쳤다.

“헙!”

경호원은 눈으로만 인사하고 다시 주변을 경계했다.

“뭘 또 이렇게 많이 데려오고 지랄….”

“형님 들어와. 왜 밖은 보고 그래?”

“알았어. 인마!”

수안은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마시며 방금까지 호구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얜 부담스럽게 여기까지 찾아오고 난리람.’

수안은 종이컵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담하네.”

“내 것도 아닌데 아담하든 넓든….”

“에이. 그래도 한송 텔레콤 아들인데….”

“점주 새끼가 아주 독기가 올랐어. 부려 먹을 건 다 부려 먹고 월급은 짜디짜고.”

창수, 창식 형제는 한송 텔레콤 용산 대리점의 직원일 뿐이다. 진짜 사장은 따로 있었는데 상당히 부림을 당하는 모양이다.

“워. 강단 있는 사람이네.”

“강단이 아니라 무모하다고 해야겠지. 내가 나중에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러니까 강단이 있다는 거지.”

사실 강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뒷거래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일개 대리점 점주가 무슨 배짱으로 본사 회장의 아들들을 험하게 대하겠는가. 강 회장님의 특별 지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점주 새끼 얘기는 됐고. 왜 왔는데?”

“어제 백부님을 뵙고 형들이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모르면 몰랐지, 알았는데 얼굴도 안 볼 순 없잖아.”

“노친네. 뭐 하러 그런 얘긴 해?”

창수가 버럭 성질내는 동안 창식이 들어서고 있었다.

“어라.”

“창식이 형. 오랜만.”

“어…. 오랜만이다.”

“형도 잠깐 브레이크 타임?”

수안이 종이컵을 흔들고 있었다.

창수와 창식이 자리에 앉았고 수안은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노친네가 우리가 여기 있다고 했어?”

“응.”

창식의 호칭도 아버지가 아니라 노친네였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부끄럽다고 말도 안 해 놓고….”

“내가 남이야? 가족이니까 얘길 하셨겠지.”

“…….”

가족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동생에게 큰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다 알려져도 숙부 가족에겐 숨길 사람이었다.

“그만큼 형들이 믿을 만해졌다고 생각하셨을 거야. 그러니 나한테도 얘기하지 않았겠어?”

“믿기는 개뿔.”

지금까지 자신들의 자유는 없었다. 통장의 돈과 차는 물론이고 어머니에게 몰래 받던 용돈조차 끊어 버렸다. 아버지가 하도 노발대발이라 어머니도 어쩔 수 없단다.

그래서 지금 형제에게 돈 나올 구석은 대리점에서 받는 월급이 전부였다. 그나마 집에서 먹고 재워 주니 추가로 들어가는 돈은 없었다.

“형들 일은 할 만해?”

“…….”

영 소질이 없었다면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적성에 잘 맞았다. 호구들 등치면서 물건 파는 재미도 쏠쏠했고, 겸사겸사 밑바닥 업무를 훑어가며 한송 텔레콤의 업무를 배워가고 있었다. 이사로 근무했던 몇 년보다 여기서 몇 배는 더 많이 배웠다.

“하라면 그냥 하는 거지. 할만해야 하나?”

그래도 적성에 맞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나. 창식은 이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사실이 더욱더 불만이다.

“그냥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벌고 있어. 동생이나 나를 따로 떼어놨으면 못 견뎠을 텐데, 그래도 노친네가 붙여 줘서 서로 의지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확실히 형은 형이다.

“백부님이 믿는 사람이 형들 말고 누가 있겠어.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고 견뎌봐.”

“썩을 분명 누가 위에서 농간을 부린 거야. 이 정도면 적당히 잠잠해졌잖아.”

수안은 창식을 보며 아직도 멀었구나 싶었다.

“야. 잠잠해지기는 뭐가 잠잠해져? 우리가 그딴 짓을 하고도 깜빵에 안 간 게 용한 거야.”

“에이.”

창식은 형이 하는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술 먹고 운전하다가 아버지 차량을 전복시킨 사고나 술집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 회사에서 여직원을 추행한 일들은 여전히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자르라고 한 놈들도 다 복귀시켰는데, 우리가 들어가면 뭐가 되겠냐?”

“…회사에 또 분란이 생기겠지.”

“그래. 노친네가 기껏 회사를 안정시켜놨는데 우리가 들어가면 또 문제야. 앞으로 몇 년은 회사로 돌아갈 생각하지 말아야 해. 조금 더 참아 보자. 응?”

“휴우….”

수안은 이런 대화가 하루 이틀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창수 형은 그래도 생각이 좀 열렸네.’

“그리고 너!”

창수의 시선이 수안을 향한다.

“왜?”

“미쳤어? 돌았어? 세기 통신을 네가 왜 사?”

현장에서 대리점 업무를 보면서 접할 수밖에 없는 정보일 것이다. 세기 통신의 주인이 더블 스타로 바뀐 것은 상당히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어제 내가 백부님을 괜히 만났겠어? 다 해명했고 웃으면서 회사로 가셨으니까 걱정 놓으셔.”

“이제 우린 알 필요도 없다는 거냐? 에효. 하긴 우리가 알아서 뭐 하니….”

저렇게 찌질한 표정으로 물어보면 얘기를 안 할 수 있나.

“범 강운으로 뭉쳐서 통신 시장 먹자고 했어. 추가 설명 필요 없지?”

경쟁이 아니라 연합이다.

“…그럼 홈플러스도?”

“맞아. 뉴월드와 연합하기로 했어. 범 강운 그룹은 가족이니까.”

처음엔 약간 다른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다시 수정한 비전은 비슷했다.

서민들을 위한 중저가 이미지의 홈플러스와 고급화 전략으로 나아갈 뉴월드로 구분했다. 서로 다루는 품목에 조정은 필요하겠지만, 훌륭하게 시장을 나눠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노는 물이 다르네. 우린 다른 상점과 연합하고 앉아 있는데….”

옆집과 그 옆집을 포함해 여러 대리점이 서로 사인을 맞춰 두고 호구를 요리했다. 호구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영업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호구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동안 사촌 동생은 기업이 연합해 국내 시장을 먹어가고 있었다. 자신들 처지와 천양지차였다.

“얘기가 또 왜 그리로 가나? 그리고 형들이 언제까지 여기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데 불러 주시겠지.”

창수, 창식 형제는 잠깐 서로 눈을 마주치고 다시 수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둘은 본사로 간다는 기약이 없어 서로가 의지하고 있었지만, 본사로 가게 되면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할 처지였다.

수안은 잠시 어색한 공기만 갖고도 둘이 걱정하는 부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캔버스에 밑그림도 안 그렸는데 벌써 떡을 생각하면서 군침 흘리는 건 아니지?”

“그림의 떡이라는 소리를 참신하게 하네?”

“크크. 쏘리. 아예 백지는 아니야. 그래도 백부님이 밑그림은 그리신 것 같더라.”

“……!”

“……!”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어지는 비유였지만, 서로가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설마 백부님이 생각 없이 형들을 여기서 굴리겠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으로 여기신 탓이지.”

“노친네가 그렸다는 밑그림이나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봐.”

“그래. 알아듣게 말해. 우리가 뭘 하면 되는지.”

형제는 수안의 말에서 희망의 불빛을 보고 불나방처럼 덤벼들었다.

수안은 그런 형제의 모습에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형님들은 백부님 믿음에 보답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뭐가 그렇게 조급해? 누가 능력을 보여 주랬어?”

“우린 여기서 휴대 전화나 팔아먹고 있는데 무슨 믿음을 줘?”

“그래. 믿음 주려고 해도 뭘 해야 믿음을 줄 거 아냐?”

생각 짧은 건 어쩜 저렇게 백부님을 닮았는지 모르겠다.

“형들이 여기서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일하는 게 바로 그 믿음을 주는 일이야. 벌써 성공적으로 실행 중이잖아.”

“…지금 하는 일?”

“우리가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사는 게 믿음을 준다고?”

“군대 잘 다녀왔고 힘든 일도 군말 없이 잘하고 있으니 얼마나 믿음직하겠어. 사고나 치던 자식들이 벌써 철이 들었나 싶은 마음도 있지만, 아직은 2%가 부족한 상황이야. 그리고….”

둘은 수안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한껏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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