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던 (193/304)

용던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선물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습니다. 녀석이 딱히 즐기는 것이 없어서 마땅치도 않고요.”

하도 욕을 먹어서 이런 질문 정도는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지훈이다.

“그건 그렇지….”

강지수 회장은 그래도 아들이 영 생각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이었다. 강지수 회장은 수안의 주변을 떠올리다가 번뜩 선물이 생각났다.

“신설할 프리미엄 아울렛 법인의 지분으로 선물해.”

“……!!”

강 회장은 아들이 기겁하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수안이 아들하고 딸 이름으로 생색만 내. 한 5%만 넘겨주면 되잖아.”

초기 자본은 나중에 추가 자본금에 희석되어 점차 지분율이 낮아지겠지만, 지분은 재벌가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는 선물이다.

“그 정도면 딱 좋겠습니다. 정원이랑 나현이라면 수안이가 껌뻑 죽죠.”

아끼는 아들, 딸에게 주는 선물이니 얼마나 더 좋아하겠는가.

“그걸 알면서도 넌 이런 생각을 못 하니?”

“…….”

집무실에 앉은 강 회장은 얼마 전 아들이 간곡하게 부탁했던 일을 거론했다.

“마누라가 부탁한 일은 쪼르르 달려와서 매달리면서 말이야.”

“그게 아니고요….”

수안에게 조언을 듣고 어머니에게 아내의 복귀 허락을 구했다가 크게 한 소리 들었던 지훈이다.

“됐고!”

“…….”

‘긁어 부스럼이라니까….’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이런 잔소리를 또 듣게 되지 않았겠는가.

“네 마누라도 잘할 수 있대?”

“……!”

‘어라?’

잘하면 허락해 주신다는 말이 아닌가.

“복귀하면 수안이 부인만큼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잖아.”

“물론이죠! 혜린이는 원래부터 최고 배우였습니다. 지금도 손만 벌리면 시나리오가 잔뜩 쌓일 겁니다.”

“작품은 함부로 선택하지 말라고 해. 난잡한 작품 고를 거면 도장 찍고 나가서 하라고 해.”

조건이 붙긴 했지만, 복귀 허락이었다.

“예! 확실하게 교육할게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감사는 됐고! 네가 수안이를 이기는 건 어림도 없겠지만, 며느리는 이겨 보잔 말이야.”

“…….”

뭔가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딱히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 더 자존심 상한다.

“그럼요. 혜린이가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마누라 빠샤! 기운 내서 수안이 부인이라도 이겨 보자.’

시간이 지날수록 동의보감 허준의 인기는 치솟고 있었다.

* * *

연말이라 여기저기 행사가 많았다.

아현은 아현대로 촬영에 바빴고, 수안은 재계 행사와 정치권의 호출로 얼굴 비출 곳이 많았다.

그래도 운 테크를 빼먹을 수는 없었다.

수안은 비서실을 통해 운 테크에 미리 연락하고 박성호 사장을 만나러 갔다.

운 테크 로비엔 박성호 사장을 포함한 관리부 직원들이 나와 늘어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

이런 의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수안이다.

그래도 인사를 안 받을 수는 없는 일.

“다들 수고 많습니다. 일들 보세요.”

얼른 박성호만 데리고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뒤로 누군가 따라왔다.

수안은 누군가 싶어 뒤를 돌아봤다가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로비에선 남자들 틈에 가려져 안 보였던 모양이다.

“오!”

박성호가 얼른 소개했다.

“이번에 운 테크로 복귀한 비서 송민희 주임입니다.”

“주임?”

왜 주임이란 말인가. 그녀의 연차라면 대리를 달아야 했다.

참견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건 참을 수 없다.

“송 비서.”

“예, 예. 부회장님.”

“일전에 운 테크 입사하고 몇 년이나 일했죠?”

“6년 조금 넘게 근무했습니다.”

수안은 박성호를 돌아봤다.

“박 사장님.”

“예.”

“사원의 대리 승진 연한이 몇 년입니까?”

“4년…. 입니다.”

고졸자의 경우 사원에서 주임까지 2년, 주임에서 2년이면 대리였다. 전졸과 대졸은 2년이면 바로 대리를 달지만,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리고 대리는 다시 4년이 지나면 과장이다.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다면 과장까지 직행하는 직급 구조였다.

“그런데 왜 6년 넘게 현 사업장에서 근무한 송 비서가 주임이란 말입니까?”

“그게….”

본래 운 테크는 여직원들의 승진을 누락시키는 일이 빈번했다. 퇴직 전까지 송민희의 직급은 사원. 복귀하며 주임으로 들어온 모양이지만, 수안은 그것도 수용할 수 없다.

“운 테크는 이제 강운 그룹 계열입니다. 모회사 인사 기준에 맞춰야죠. 여직원이라고 승진을 누락시키지 마세요. 우선 기존 여직원들 파악해서…. 여직원이라고 해 봐야….”

“송 비서가 전부입니다.”

운 테크의 여직원은 송민희가 유일했다.

“입사 시점부터 대리 2년 차로 조정하세요.”

“예. 부회장님.”

수안은 눈을 반짝이는 송민희를 보고 말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 뻔했습니다. 그래도 일찍 바로잡아서 다행이네요. 앞으로 박 사장님을 잘 부탁해요. 송 대리.”

“네엡!!”

주임 초봉과 대리 2호봉은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민희는 여전히 발랄하네.’

어설프게 혼자 좋아했던 민희를 만나고야 알 수 있었다. 그때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동경이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 밝음을 가진 민희를 그저 부러워했음이다.

박성호는 집무실에 앉아 지난 선물에 감사 인사를 했고 수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젓고 말았다.

그리고 뭔가 중요한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애들 선물 차에 넣어둘 테니까 가져다주세요.”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겨 주고 수안의 볼일은 끝이었다.

“…애들 크리스마스 선물 챙겨 주려고 오셨다고요?”

“그럼 뭐 중요한 얘기라도 하러 온 줄 아셨어요?”

강운 그룹 계열사 중에서도 가장 작은 운 테크에 수안이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운 테크는 뭘 지시하고 말 것도 없을 만큼 작은 기업이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예. 말씀하십시오.”

“박 사장님 혹시 주식에 투자합니까?”

“흐흐. 요즘 아주 짭짤합니다.”

처음 주식을 가르쳐 준 사람이 박성호다. 지금도 하고 있을 줄 알고 물어봤다.

주식 시장은 IT 버블로 이상 과열되고 있는 상황. 소문만 듣고 따라가도 먹는 시기였다. 어떤 주식은 360배가 넘게 폭등하기도 했을 정도다.

‘이러다 된통 물리지.’

이런 개미들이 내년 3월 거품이 꺼지기 시작할 때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 코스닥 지수가 떨어지기만 했다면 일부라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급등하는 대부분의 테마주는 이후 상장 폐지라는 결과밖에 없었다.

“싹 다 정리하시고 주식 판에 기웃거리지 마세요.”

“아….”

수안은 아쉬움이 가득한 박성호를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주식 절대 금지! 박 사장님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어휴.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투자하고 싶거든 차라리 BE 인베스트먼트에 펀드로 넣어요. 다른 증권사 펀드는 눈길도 돌리지 말고요.”

“오오. 새로운 정보가 있었군요!”

“새롭기는 뭐가 새롭습니까? 이미 BE 인베스트먼트 YⅡK 1호 펀드는 수익률 220%를 달성했어요. 다들 아는 정보를 왜 박 사장님만 몰라요?”

“…….”

“지금 2호 펀드가 팔리고 있으니 거기다 넣으시란 말입니다. 정보도 없는 개미가 직접 주식에 투자한다고 얼마나 벌 것 같습니까?”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수안은 너무 열을 냈나 싶었지만, 이렇게라도 막을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2호 펀드 마감이 얼마 안 남았어요. 이번 기회는 좀 큽니다. 들어가려면 빨리 들어가는 편이 좋을 겁니다.”

“예. 부회장님.”

이대로 계속 주식 판에 기웃거리면 그땐 답도 없다.

“나 온다고 직원들 밖에 대기시키지 마세요. 그런 의전 질색입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정 나오고 싶거든 혼자 나오시든가.”

“시정하겠습니다.”

* * *

수안은 배영성에게 세기 통신 인수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 받고 조만간 SK에서 찾아오겠거니 예상했다. 먹고자 했던 기업을 빼앗겼으니 불만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다. 어차피 불만 이상은 말하지 못할 작은 기업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람이 수안을 찾아왔다.

“…백부님?”

“예. 한송 텔레콤 강 회장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세기 통신으로 인해 방문한다는 사람은 강병모 회장이었다.

“아….”

‘뉴월드와 마찬가지구나.’

강운 그룹이 마트 사업에 진출하는 바람에 고모님이 위기감을 느꼈듯이, 한송 텔레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미리 연락이라도 할걸.’

공시가 나가기 직전에 해명이라도 미리 해 두었으면 모를까 지금은 늦었다. 오면 대화로 풀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강 부회장.”

“안녕하십니까. 백부님. 편히 말씀하십시오.”

“강 부회장. 오늘은 사업가 대 사업가로 대화하려고 왔네.”

“지훈 형도 제게 편히 대하는데, 백부님께 부회장 소리를 들을 순 없습니다.”

“크흠. 그래 수안아.”

“예. 백부님.”

“갑자기 통신이라니. 어떻게 된 일이야?”

“죄송합니다. 보안이 필요한 일이라 미리 알리지 못했습니다. 차후 백부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사실이긴 했다. 적대적 인수 합병을 성공시키려면 세기 통신 주식을 매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 했다.

“내가 직접 왔으니 말해 봐. 운모를 찾아가려다가 아무래도 수안이 네게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왔으니까.”

“…….”

‘설마요. 먼저 아버지를 찾아갈 엄두가 안 나셨겠죠.’

더블 스타에서 인수했는데, 왜 강운 그룹 회장인 아버지를 찾아간단 말인가. 그나마 조카가 만만하니 수안을 찾아온 것이다. 거기다 통신 사업을 새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세기 통신이 운영하던 사업을 인수한 것이 전부다. 당장 한송 텔레콤에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제가 예전부터 백부님이 경영하시는 통신사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일이 생기면 한송 텔레콤에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일전에도 작은 오해가 있었지만 잘 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수안은 강병모 회장의 공격적인 물음에도 준비한 변명을 늘어놨다.

“강운 무역에서 홈플러스 인수하고 운영 중인 것은 아시죠?”

“왜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가?”

“하하. 거기와 마찬가지라서 그렇죠.”

“뭐가 마찬가지란 거지?”

‘마트와 텔레콤이 같은 일이 뭐가 있다고….’

“홈플러스와 뉴월드 마트가 겹치지 않습니까.”

“운모는 형제들 사업도 탐이 난다 이거야?”

“아휴. 그런 거 아닙니다.”

수안은 차근차근 뉴월드와 연합한 일을 설명했다.

“…해서 앞으로 뉴월드와 홈플러스가 발을 맞춰 외부의 적을 상대하기로 했습니다. 이 싸움이 끝날 때쯤에는 대한민국 마트가 뉴월드와 홈플러스로 양분되어 있을 겁니다. 범 강운 그룹의 세상이죠.”

“그럼…. 통신 사업도?”

“그럼요! 세기 통신이 한송 텔레콤보다 가입자 수에서 약간 앞서긴 하지만, 한송 텔레콤에 가입자 몰아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죠. 게다가 이제는 팬탁 휴대 전화도 강운 전자에서 생산하지 않습니까. 강운 전자에서 생산한 인기 휴대 전화를 세기 통신과 한송 텔레콤이 팔아치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가입자는 얼마나 늘어갈 것이며 수익률은 얼마나 높아지겠습니까? 서로 간 업무 처리가 수월해지는 건 말할 필요도 없죠. 우린 강운 그룹 가족입니다.”

“큼큼.”

강병모 회장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헛기침해 댔다.

“오해는 풀리셨죠? 백부님.”

“오해는 무슨 오해를 했다고 그래? 난 믿고 있었어.”

‘믿기는 개뿔. 성질이 잔뜩 나서 씩씩거리며 들어왔으면서.’

“…그냥 믿어.”

“물론이죠. 백부님을 믿습니다.”

“내가 처음 네 집무실에 왔는데 차도 안 내줘?”

오자마자 큰 목소리로 본론에 돌입해서 비서도 차마 못 들어오지 않았는가.

“아. 뭐로 드시겠습니까.”

“쌍화차 한 잔 내와 봐.”

“저랑 취향이 비슷하시네요. 역시 우리는 가족.”

“프흐. 너도?”

가끔 나이가 지긋한 사장들과 먹으려고 준비해 뒀다.

“평소에 즐겨 먹습니다. 비서에게 두 잔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수안은 위기를 넘기고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쌍화차를 홀짝거렸다.

‘음. 역시 괜찮네.’

전생까지 더하면 이제 80에 가까워진다. 커피보다 쌍화차가 더 좋을 나이였다.

“요즘 형들은 잘 지내요? 제대하고 잠깐 얼굴 보고 그 뒤로는 연락을 못 했네요.”

“열심히 영업 뛰고 있어.”

“아. 영업부로 들이셨어요? 잘하셨네요.”

백부님이 회사로 함부로 들이지 않겠다고 장담했었지만, 군대에 다녀오고 결국은 다시 회사로 복귀시켰다고 생각했다.

‘박수겸 사장은 또 골치깨나 아프겠네.’

“영업부 말고.”

“그럼 어느 부서에서 영업일을 해요? 수출팀?”

“용산.”

“용산이라는 부서가….”

“부서가 아니라 용산 전자 상가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