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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적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자리가 정말로 끝이 났고 수안은 박재문을 배웅한 다음 차에 올랐다.

“이쪽은 아닌 모양입니다.”

장세진은 수안이 정치 자금을 건네주지 않았으니 중요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지. 그냥 얼굴만 익히는 거야. 그래도 내가 만나는 사람 중에 있지 않겠어? 이런 일은 묵묵히 생각 없이 진행하면 되는 거야. 누가 될지 계산하기 시작하면 있던 기회도 날아가 버리거든.”

“부회장님도 사서 고생이십니다.”

“사서 고생은 무슨…. 다 내 기분 좋자고 하는 일인데 뭐.”

“…….”

장세진은 본래 수안을 곁에서 관찰하고 이현창에게 보고하는 인물이다. 박재문이 차기 대통령이라는 건 지금 알려 줄 필요가 없었다.

수안은 장세진이 비서와 같은 일을 한다 해서 진짜 비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언제나 경계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장세진이다. 수안은 긴장감도 유지할 겸 장세진을 곁에 두고 있을 뿐이다.

부우웅.

차는 부드럽게 출발해 다시 회사로 향했다.

* * *

“원장님. 접니다.”

장세진은 퇴근 후 차 안에서 휴대 전화를 통해 이현창과 연락하고 있었다.

-그래. 요즘은 어때?

“강 부회장이 민국당 의원들을 계속 찾아다니며 자금을 뿌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이었는지 돈도 주지 않고 헤어졌습니다.”

-그 친구는 너무 열심이라니까.

“항상 일관적인 모습입니다. 원장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장 우선해서 처리합니다. 일전에도 계좌에 추가자금을 넣어놨습니다.”

지금까지 봐 온 것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좋은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현창은 수안의 수고보다 추가 자금이 중요한 모양이다.

-추가 자금? 지금 얼마나 모였지?

“지금까지 800억이 넘습니다.”

-허허. 이 친구가…. 아직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벌써 그렇게 많이? 민국당 후보자들 만나고 다니려면 쓸 곳도 많을 텐데….

차기 대선조차 아직 한참이나 남았고 자신이 대선으로 갈 차차기는 그보다 더 많이 남았다. 800억은 당장 쓰지도 못할 돈이다.

“강 부회장이 해외 계좌를 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해외까지? 뭐 하러?

“BE를 통해 달러를 유통하기 쉬워서 그런 듯합니다.”

-그걸 내가 들여와서 쓸 수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야?

국내 계좌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해외 계좌라면 국내에 들여오는 것부터 복잡했다.

“혹시나 원장님이 해외에 나가시면 편히 쓰시라고….”

-…나 참. 이 친구는 왜 걸핏하면 사람을 울컥하게 만들어? 내일 전화 한번 하라고 해.

“강 부회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수고 많았어. 조금만 더 수고하자.

“예. 원장님.”

-아. 집에 내가 선물 좀 보냈다. 장 보좌관이 가서 확인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더 고맙지.

거액을 관리하는 보조관이라 이렇게라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 이현창이다.

장세진은 집에 도착해 작은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다.

“뭔데 그렇게 무겁다니? 누가 책이라도 보냈어?”

“그런가 봐요. 아마 서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장세진은 내용물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원장님은 뭐가 그렇게 걱정인지 종종 이런 선물을 보내 주신다.

박스 윗면의 테이프를 칼로 쓱 그어 열어보니 예의 현금 뭉치가 들어 있었다.

“이건 또 어떻게 처리하지?”

천만 원씩 네 개의 돈뭉치가 들어 있는 상자를 보며 고민에 빠진 장세진이다. 방구석에는 비슷한 박스가 두 개 더 있었다.

“펀드라도 가입할까?”

주식투자 광풍이 부는 대한민국이다. 본인이 직접 투자하기엔 시간이 없으니 대안은 펀드밖에 없었다.

* *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배 사장. 요즘 BE 서울 지점 때문에 바쁘지?”

배영성은 본래 더블 스타와 펜타그램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근래에는 BE 서울 지점에도 오가고 있었다. 수안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나름 재미있습니다.”

수안이 고른 종목들을 BE 서울 지점에 알려주고 펀드 운용 상황을 보고 받는 일이라 골머리 썩을 일이 없다는 점이 다행이다.

“그리고 장 비서가 펀드에 가입했습니다.”

“…YⅡK 펀드에 가입하는 사람이 몇 명인데 장 비서를 알아봤어?”

BE 서울지점에서 출시한 YⅡK 펀드는 상당히 위험한 펀드였다. 안정적인 채권형 상품에 투자하지 않고 변동성이 큰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상품이었으며 공매도까지 진행하는 상품이다. 상품을 판매할 때도 원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BE 지점에 방문한 장 비서를 지점장이 알아본 모양입니다. 요즘 항상 회장님과 함께하지 않습니까. 얼굴이 낯이 익었겠죠.”

“하여간 운은 좋은 사람이네. YⅡK 펀드에 들어왔으니 돈 벌 일만 남았잖아?”

“그렇죠. 그리고 금액도 상당히 컸습니다. 1억 2천이나 입금 했습니다.”

“어휴. 이러다 장 비서 재벌 되겠어.”

“하하하. 겨우 그걸로 재벌은 어렵죠.”

“배 사장은 얼마나 넣었어?”

수안은 일전에 YⅡK 펀드에 투자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었다. 배영성은 아내 모르게 조성한 비자금을 열심히 굴려야 했다.

“저는 300억 넣었습니다.”

“오오. 굿.”

YⅡK 펀드를 개설하고 외부에 판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번에 판매한 펀드의 명칭은 BE INVESTMENT YⅡK 2호 펀드로 1호 펀드는 이미 정산을 끝냈다. 1호 펀드의 수익률은 220%를 기록했고 엄청난 수익률에 펀드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재미를 본 배영성이 불어난 자금을 다시 2호 펀드에 가입한 것이다. 처음 조성한 비자금 규모는 120억. 펀드로 회수한 원금과 수익금 대부분이 다시 YⅡK 2호 펀드로 자리만 옮겼다. 그만큼 BE와 수안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30억을 넣었고요.”

“예상대로 안정을 추구하시네.”

“공매도까지 진행하면 이번 펀드 수익률은 상당할 것 같습니다. 이미 국내 IT 종목에서 상당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220%의 수익률도 대단한 수익률이지만, 이번 YⅡK 2호 펀드의 수익률은 1호의 수익률을 한참 뛰어넘을 것이 확실했다.

“이제 버블 꺼지기까지 얼마 안 남았어.”

내년 3월까지 불과 몇 개월 남았다.

“예. 해외 주식시장 상황을 보며 시기를 체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기 통신사 인수 건은….”

수안은 배영성에게 세기 통신의 지분 매입을 지시했었다. 이제 그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할 때였다. 펜타그램은 팬탁을 강운 전자로 넘겼고 휴대 전화 제조업을 산하에 두고 있지 않아 통신사 인수가 가능했다. 따지고 들면 관계가 없지는 않겠으나 법적인 문제는 없었다.

“펜타그램에서 세기 통신 지분 5%를 넘게 취득하며 취득 목적을 경영권 취득이라고 공시했습니다.”

적대적 인수 합병이 시작됨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이다. 5%로는 상당히 부족해 보이지만, 외부에만 5%라고 공표되었지, 사실은 그 이상이다.

“차명으로 확보한 지분을 포함하면 23%이며 블록딜로 넘겨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SK에서 일부 지분을 매입한 흔적이 있으나 냄새를 맡았는지 손을 털고 나갔습니다.”

“큭. 이제 시장에서 아무리 구해 봤자 못 구하지. 냄새를 맡고도 남아.”

현재는 지분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세기 통신의 대주주인 두 회사가 연합하면 모르지만, 그 부분도 이미 반쯤 해결을 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수안이 K사 출신의 김대수 사장을 통해 일을 진행했고, 조만간 K사의 지분 25%도 블록딜로 넘겨받게 된다. 23%에 25%를 더해 이미 48%를 확보했다. 이 정도면 반전의 가능성이 없었다.

“남은 대주주인 P사 대표와 약속을 잡아 놨습니다.”

“우리가 확보한 지분 확실하게 알려줘. 하지만 마음 상하지 않게 대응 조심하고.”

P사 모르게 소유 회사에 적대적 인수합병을 진행했으니 대응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뭐라도 내줄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말로만 대응하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장에 장수가 나가는데 무기도 없이 보낼 순 없는 일이다.

“적당한 건수가 하나 있지.”

국내 최대 제철사인 P사에 줄 수 있는 혜택이 없겠는가. 기화 자동차와 대운 자동차, 본래 소유한 강운 자동차까지 소유한 강운 그룹이다. 자동차용 강판 수요가 상당하기에 괜찮은 거래가 될 것이다.

“P사 차량용 강판 수급 비율을 늘리기로 하지. 이걸로 달래주면 되겠어. 비율은 눈치 봐서 조정해.”

“그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현재는 대현 제철과 P 제철로 이원화해서 강판을 공급받지만, 비율을 몰아주면 상당한 금액이 될 것이다.

이후 배영성과 더블 스타의 대소사를 논의하는데 비서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똑똑.

“부회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지금 이 시각에 약속된 일정은 없었다.

“샤롯 마트 주환득 사장입니다.”

비서의 말에 배영성이 반응했다.

“일정도 안 잡고 그냥 왔단 말입니까?”

“예. 배 사장님.”

“나중에 약속 잡고 다시 오라고 하세요.”

주환득이 사장이든 회장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약속도 없이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면 돌려보내야 맞다.

“…예.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려는데 수안이 불러 세웠다.

“그냥 들어오라고 해요.”

“겨우 사장급 인사입니다. 예의 차리실 필요도 없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나 들어나 보자고. 안 그래도 왜 안 찾아오나 궁금했거든.”

분명 홈플러스와 관련한 일로 찾아왔을 것이다. 강운 무역 김성우 사장을 찾아가지 않고 수안에게 직접 온 것을 보면 특별한 용무가 있지 않겠는가.

“곧 집무실로 안내하겠습니다.”

본래 미래에선 가장 많은 대형 마트 점포 수를 자랑했을 샤롯 마트가 지금은 뉴월드와 홈플러스라는 강적을 만나 마트 운영에 애를 먹고 있었다.

“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샤롯 마트 주환득입니다.”

“반갑습니다. 주 사장님.”

“배 사장님도 계셨군요. 주환득입니다.”

“배영성입니다.”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지만, 우선은 웃는 낯으로 악수했다.

“앉으시죠. 커피 괜찮으십니까?”

“예.”

주환득 사장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선 약속도 잡지 않고 무작정 찾아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유가 있겠지요.”

“오늘만입니다. 다음에 또 이렇게 오시면 그냥 발길을 돌리셔야 할 겁니다.”

수안의 말에 이은 배영성의 경고였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다음엔 먼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배 사장님.”

주환득은 사과를 끝내고 조심스럽게 목적을 입에 담았다.

“최근 홈플러스와 뉴월드 마트가 할인 행사를 진행하고 있어 관련 문의를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계속하세요.”

“먼저 이번 행사가 언제까지 진행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마 상당 시간 지속할 것 같습니다. 뉴월드 마트에서 저희와 경쟁을 시작했으니 저희도 질 순 없지요.”

뉴월드 마트와 홈플러스의 연합을 곧이곧대로 밝힐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음….”

홈플러스와 뉴월드 마트의 할인에 맞서 그 외의 모든 마트가 각자의 전문 분야를 선택해 할인 행사를 진행 중이다. 접근성이라는 무기가 있으니 초반엔 조금 통하는 듯했지만, 지금은 할인이 거리의 불편함을 뛰어넘었다. 할인뿐일까? 식자재의 품질 면에서도 상대할 마트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홈플러스로 몰리고 있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할인 행사를 중단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배영성이 버럭 소리쳤다.

“샤롯 마트 주 사장님이 홈플러스 경영에까지 참견하십니까?!”

주환득은 배영성의 말에도 수안만을 바라보며 말을 보탰다.

“참견이 아니라 제안입니다. 지금 뉴월드 유통 그룹에는 샤롯 그룹 신 부회장님이 가셨습니다. 비슷한 제안이 뉴월드에도 전해졌을 겁니다.”

“뉴월드에는 그룹 부회장님이 갔는데 강 부회장님께는 마트 주 사장님이 오셨다 이 말씀이군요?”

격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강운 그룹 부회장인 수안에게 샤롯 그룹 신 부회장이 와야 격이 맞지 않겠는가.

“큭. 뉴월드 마트는 무조건 관철하겠다는 뜻이고 홈플러스는 크게 상관없다는 뜻이겠지.”

“……!”

수안은 숨겨진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배영성에게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홈플러스가 먼저 시작한 일이니, 후에 따라온 뉴월드는 제안이 먹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거야. 여긴 말이 통하기 쉽지 않잖아. 상관없는 수준이 아니라 홈플러스를 공동의 적으로 만들고 싶은지도 모르지.”

국내 최대 그룹인 강운 그룹이다. 재계 순위 10위권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샤롯 그룹이 강운에 홀로 대항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재벌가에 끼어들었다』 10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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