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기 (190/304)

차기

‘날 왜 보자고 했을까….’

한 중년 남자가 한적한 장소의 식당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끼이익. 끼익.

일찍 도착해서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상대가 벌써 도착한 모양이다.

여러 대의 차가 도착하는 소리와 차 문을 여닫는 소리, 구두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온다.

‘요란하기도 하네.’

드르륵.

“일찍 온다고 왔는데 제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많이 남았습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탓이지요.”

수안은 눈앞의 남자에게 깊이 인사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수안입니다.”

강운 그룹을 내세우지 않은 담백한 자기소개였다.

“박재문입니다. 반갑습니다.”

담백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

악수하고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딱히 말이 없었다.

‘뭐지?’

이렇게 멀리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불렀다면 할 말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강운 그룹 장자는 아무 말도 없이 차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사실….”

수안은 찻잔이 바닥을 보이고 나서야 입을 열고 있었다.

“따로 뵙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만 다 잊어버렸습니다.”

“허허. 재미있는 분이셨네요.”

“재미있게라도 봐주시니 감사하죠.”

“국민 영웅과의 만남이니 오히려 영광스러운 자리랍니다.”

“어휴. 그것도 감사한 말씀입니다.”

식사가 나오고 서로 간단한 대화가 오가긴 했으나 박재문이 생각했던 오늘 대화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도무지 말을 꺼낼 기미가 없었다.

‘나를 통해 불법 선거 자금이라도 민국당에 건네려는 줄 알았더니.’

강운 그룹이 다른 의원들에게 찬조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큰돈은 알지 못했는데, 이는 현 대통령인 김대준을 통해서만 진행했기 때문이다. 수안이 박재문에게 따로 돈을 줄 일은 없었다.

“박 의원께서는 내년 총선에 나서시겠습니다.”

‘이제 시작인가.’

총선 얘기가 나왔으니 선거자금 얘기로 흘러갈 터였다.

“그렇겠지요.”

“힘든 길을 선택하실 분이라는 걸 잘 압니다. 저는 마음으로만 응원하겠습니다.”

“……!”

“텃밭에서의 출마는 거절하실 분이잖습니까. 고향으로 가시겠지요.”

“허허.”

“그래도 응원하겠습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그때 수안의 휴대 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우웅. 우웅.

“죄송합니다.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수안은 얼른 귀에 휴대 전화를 가져갔다.

“예. 대통령님.”

“……!”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뵙기만 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같이 식사 중입니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야. 잘 봐줘.

“제가 잘 보여야죠.”

-그 사람인 줄은 어떻게 알았어?

김대준은 마음속에 1번으로 내정해 둔 자신의 후임을 어떻게 수안이 알아냈는지 무척 궁금했다.

“이분이 대통령님과 가장 닮았습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허허허. 그래도 엉뚱한 짓은 하지 마.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일 없습니다. 인사만 드리려고 합니다.”

-알았네. 조만간 보지. 금 모으기 운동으로 보관하고 있는 물건 얘기도 해야지.

“벌써 정리하실 생각입니까?”

-금값이 자꾸 널뛰기하잖나.

10월 들어 전 고점을 돌파하며 엄청난 상승세를 보였던 금값이 이제 내림세로 돌아서고 있었다. 가격이 내려갔으니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조금 더 기다리시지요. 금값은 더 내려갈 겁니다.”

-그래?

온스당 300달러 이하로 내려간 금값은 2002년이 되어야 다시 300달러로 복귀한다. 이후엔 내려갈 줄 모르고 꾸준히 상승하게 될 것이다.

“아직 IMF에 상환할 채무도 남아 있는데 금 모으기 운동으로 보유한 금까지 회수해서 돌려주기엔 무리입니다. 국가재정에 악영향일 뿐이지요. 차기에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수안은 차기를 말하며 곁눈질로 박재문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네의 판단이 그렇다면 맞겠지.

“밖으로 내돌리지 않고 잘 보관하겠습니다.”

-알았네. 그럼 나중에 보세.

“예. 들어가십시오.”

박재문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이다.

“전화가 길어졌습니다.”

“대통령님이 직접 전화까지 하시는군요.”

“박 의원님이 걱정되셨나 봅니다. 제가 의원님을 만나기 전에 청와대 비서실에 메시지를 남겨놨거든요. 이제야 확인하고 연락하셨겠죠.”

“허허.”

누군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통화 중에 들었던 내용은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따질 것은 따져야 했다.

“그건 그렇고. 앞에서 통화하는 말을 들었는데, 금 모으기 운동으로 보유한 금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혹시 당시 정부에서 매각한 금을 자네가 갖고 있나?”

박재문은 존대를 버리고 하대로 추궁하기 시작했다.

수안은 박재문의 하대가 당연하다는 듯이 듣고 답했다.

“예. 제가 보관하고 있다가 훗날 다시 돌려드리기로 했습니다. 금은 위기 시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현금성 자산이지 않겠습니까. IMF 체제가 오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적당량의 금 보유고만 있었어도 위기를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을 겁니다. 이 금은 그때를 위한 보험입니다. 함부로 외국에 넘길 수 없었습니다.”

“…….”

“혜택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당시에 수급한 달러가 200억 달러를 훌쩍 넘지 않습니까. 혜택이 아니라 손해라고 생각해야 맞겠죠. 달러를 들고 대기업을 후려쳤으면 대기업 알짜 계열사 여럿이 제 손에 들어왔을 겁니다. 전 다 포기하고 국가에 맡겨 버렸습니다.”

“200억 달러?”

“…대통령께서 언질을 주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외화 수급을 자네가 했다고? 분명 당시 달러는 해외 금융사인 BE 인베스트먼트에서 들어왔다고 들었네만.”

“…그 회사가 제 회사입니다만.”

“……!!”

“오늘 대통령께서 입이 참 무거우신 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박 의원께는 말씀을 드렸겠지,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습니다.”

비밀을 지켜 달라고 했던 수안이다. 재계 여기저기서 수안의 정체를 알아내고 있었지만, 국내 정치권에선 여전히 깜깜했다. 우선 전 대통령인 김일삼이 입을 다물었고, 현 대통령인 김대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국내외 정보를 맡은 이현창이 정보를 차단하는 중이다.

중요 정보가 전파되질 않고 있었다. 수안에겐 좋은 일이다. 사람들이 모르면 모를수록 자신의 행보는 자유로웠으니까.

“BE는 지금….”

“일본 BE와 미국 BE가 해외에서 열심히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번 IMF는 미국 정부 때문에 손 놓고 당했지만, 앞으론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BE 인베스트먼트는 대한민국의 숨겨진 힘입니다.”

박재문은 수안이 자신에게 정치 자금이나 건네줄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수천억 달러를 가진 BE 인베스트먼트의 주인이라면 대한민국은 앞으로 걱정이 없어!’

IMF로 대한민국을 걱정하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수백억 달러의 국가 채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큭. 이거 내가 제대로 강 부회장을 오해했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국민의 피와 땀이 섞인 금이 아닙니까.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지요.”

“자네는 하는 말마다 마음에 드는군. 괜히 국민 영웅이 아니야.”

“별말씀을요. 편히 말씀해 주시니 이제야 제 마음도 편합니다.”

“아…. 말 놔도 되나?”

“아까부터 편히 하셨습니다.”

“큼. 그럼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대통령께 뭐라고 했든 간에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은 있을 것 아닌가.”

“…….”

이현창이 원하는 차차기 대통령의 중임에 관해서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헌법을 개정하자고 먼저 야당에 제안할 차기 대통령이다.

수안은 정말로 얼굴만 보려고 왔다.

“…없어?”

“죄송합니다. 정말로 없습니다.”

“큭. 이거 진짜 한 방 먹었군.”

“필요하신 부분이 있다면 편히 말씀하십시오. 생각을 안 해 왔다 뿐이지 생각이 없진 않습니다.”

달라면 뭐든 내주겠다는 태도였다.

“됐네! 지금까지 자네가 해외에서 국위 선양한 것도 대단한데, 앞으로도 대한민국 미래를 책임질 사람이질 않은가. 내가 강 부회장에게 손 벌릴 일은 없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 지금까지 입을 못 떼고 있었지요.”

이후엔 조금 더 편안하게 식사하며 대화할 수 있었다.

강릉에서 북한 잠수함을 마주한 얘기도 하고….

“이야. 진짜로 자네가 발견했었어. 놀랐겠구먼.”

“그럼요. 그때 정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적외선 망원경을 안 가져갔다면 북한군에 납치되었을지도 모르죠. 2000년 올림픽에선 가슴에 인공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갔을 수도 있겠네요.”

“그것참 끔찍한 상상이야.”

수안은 북한을 대표하는 것보다 올림픽에 나간다는 것이 끔찍했다.

“끔찍하죠. 전 절대로 내년 올림픽에 안 나갑니다.”

볼트에 관해서도 대화했으며….

“허허. 자메이카에 자네 후계자가 있단 말인가?”

“지금 열심히 훈련하고 있지요. 대한민국 선수는 아니지만, 제가 온 힘을 다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피겨 퀸으로 자라날 연하에 관해서도 말해 줬다.

“피겨를 지원해?”

“가능성이 대단한 어린 선수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스포츠 아니겠습니까. 아이스 링크를 하나 만들고 피겨 선수들이 전용으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장하네. 정말 장해.”

마지막 즈음엔 집안 얘기까지 나눌 정도로 친분이 생겼다.

“요즘 드라마 잘 보고 있네.”

“하하하. 아내가 복귀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연기를 다시 시작하더니 눈에 생기가 돕니다.”

“강운 그룹 강 회장님이 생각보다 소탈하신 모양이야. 며느리가 배우로 복귀하는 걸 허락하다니.”

“여러 면에서 존경할 만한 분이죠. 홈플러스 인수와 영업 기조도 회장님이 전부 지시하신 부분입니다. 힘든 시기이니만큼 먹거리는 제대로 만들어 저렴하게 제공하자는 말씀이셨죠. 회사가 일부 손해를 보더라도 사회 환원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물론 강운모 회장은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허. 정말 대단하시네. 그래서 홈플러스가 좋은 품질의 먹거리를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었어. 나도 아내와 자주 간다네.”

“우리 회사 고객님이셨네요. 하하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만남은 헤어짐을 품고 있는 법이다. 자리를 파할 시간이다.

“오늘 정말 즐거웠네. 강 부회장.”

“저도 즐거운 만남에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자네를 오해했지만, 다 풀려 버렸어.”

처음 오해를 풀고도 일말의 의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마지막엔 그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웃으면서 인사하세.”

“물론입니다. 언제든 연락해 주십시오.”

수안은 마지막에서야 명함을 건넸다. 새하얀 명함이다.

“엥? 이게 뭔가. 연락처도 없잖아.”

명함엔 강수안의 이름과 강운 그룹 로고만 덩그러니 박혀 있었다.

“아이고. 제가 실수로 엉뚱한 명함을 드렸습니다.”

수안은 얼른 다른 명함을 꺼내 건넸다. 진짜 연락처가 담긴 명함이다.

“평소에 자주 쓸 일이 없어서 깜빡했습니다.”

박재문은 명함이 금으로도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으이.”

“제겐 특별하신 분이죠.”

“하하. 그래? 자네도 내게 특별하다네.”

“고맙습니다. 대…. 아니. 의원님.”

실수로 대통령님이라고 부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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