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왜긴! 이것도 너 때문이야!”
수안은 실로 억울한 표정이다.
“헐. 이젠 집안일까지 내 탓이야? 내가 동네북이야?”
“네가 제수씨 드라마 복귀시켰잖아.”
“그래서?”
“요즘 제수씨 나오는 드라마 인기 끄는 거 보고 혜린이도 복귀하고 싶어서 안달이다. 그러니 너 때문이지!”
결혼 전 여배우 커리어에 정점을 찍고 있었던 윤혜린이다. 존재감도 미비했던 아현이 복귀한 드라마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복귀가 고플 만했다. 자극이 없어도 언젠가는 생각날 복귀가 아현이라는 존재로 인해서 폭발한 것이다.
“불똥이 이렇게 튀기기도 하는구나. 놀랍네.”
따져보면 자신 탓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넌 남 일이라 느긋하게 얘기하지만, 난 맨날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이야. 귀에 딱지가 앉겠어.”
“먼저 하나 묻자. 형은 형수 연예계 복귀를 반대해?”
형이 반대한다면 형수의 연예계 복귀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이롭다. 남편이 반대하는 복귀라면 결과는 이혼밖에 더 있겠는가. 불만은 계속 쌓여갈 것이고 언젠가 터지고 말 것이다.
형이 반대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나오는 말이 엉뚱했다.
“마누라 바쁘면 오히려 나야 좋지. 자유 시간도 많이 생길 것이고. 큭.”
자유로운 시간에 뭘 할지 뻔히 그려졌다.
“으이그. 그럼 고모님이 반대하시나 보네.”
“맞아. 애 엄마가 무슨 연기를 하느냐고 완강하게 반대하셔. 게다가 배우가 하는 일이 좀 그렇긴 하잖아. 상대 배우랑 키스신이나 베드신도 있을 수 있고.”
고모님의 생각이라면 받아들이진 못해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게다가 외부의 시선에 민감한 재벌 그룹 아니겠는가. 며느리가 외간 남자와 입을 맞추는 모습이 TV를 통해 방영된다고 생각했다면 누구나 반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형은 용케 그런 거 허용한다?”
“나라고 베드신이 없겠냐? 게다가 난 연기가 아니라 리얼이잖냐. 크흐흐흐.”
“그런 지저분한 얘긴 듣고 싶지 않고요.”
“넌 사업하는 놈이 너무 착해빠져서 큰일이야.”
“…….”
고작 베드신으로 착해빠졌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 착해빠진 놈이 지금까지 죽인 놈만 여럿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그리고! 왜 마누라 놔두고 딴 데 가서 베드신을 찍냐?’
수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여성으로서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고모님의 생각이 궁금했다.
“고모님은 본인이 회장으로 일하면서 여자 일하는 건 왜 반대하셔? 어차피 배우도 직업의 하나란 말이지. 게다가 형수가 어디 보통 여배우야? 톱 중에서 톱이잖아. 충분히 인정해 줄 수 있지 않나?”
“어머니가 배우 일과 회사 경영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시겠어?”
수안은 고모님이 나중에 아현에게 한마디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물었다.
“어휴. 그럼 내 마누라가 배우로 복귀한 것도 별로라고 하시겠네?”
“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강지수 회장은 동의보감 허준의 애청자라고 했다. 예진 아씨 역으로 출연 중인 아내가 출연하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단다. 그리고 지훈이 보기엔 거의 팬에 가깝더란다.
[작은오빠는 무슨 복이 있어서 저런 며느리를 봤나 몰라. 자식 복에 며느리 복까지 아주 다 가졌어. 어쩜 저렇게 연기도 잘하고 고아하게 예쁜지…. 드라마 촬영 끝나면 한번 보자고 해야겠다. 내가 위아래 세트로 한 벌 맞춰 주고 싶네.]
그럼 뭐 하러 형수의 연예계 복귀를 막는단 말인가.
“…형이 고모님께 얘기 좀 해 봐. 고모가 화낼까 봐 말도 못 꺼냈지?”
“나야… 긁어 부스럼이라고 생각했지. 예전에 딱 잘라서 안 된다고 하셨거든.”
“형수한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면서 얘기 한 번을 안 하냐?”
“네 집이랑 다르다니까.”
“아버지도 애가 둘이나 있다고 복귀 반대했어. 결혼 전이랑 생각이 바뀌셔서 내가 그 마음 돌리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아내가 연예계로 복귀해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블 엔터를 통해 철저하게 관리하겠다고 밝혔고, 이후에도 몇 번 더 아버지에게 간청했었다. 아버지는 처음 자신이 했던 말이 있어 오래 반대하지 못했고 수안은 결국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특히 아현의 존재가 훗날 대선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랬냐?”
“그러니까 형도 노력이란 걸 좀 해 봐라. 응?”
“괜찮으려나….”
“형도 형수 복귀하면 자유 시간 많아져서 좋다며? 형수를 위해서가 아니면 형을 위해서라도 말해 봐야겠네.”
“애 엄마 복귀하면 잘될까? 은퇴하고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형은 드라마도 못 봤어? 형수님도 복귀만 하면 펄펄 날아다니지. 형수님 이미지가 좋아지면 뉴월드그룹 이미지까지 좋아질걸? 고모님도 나중에 “잘했구나.” 하실 거야.”
“에효. 내가 오늘 가서 말해 볼게.”
수안이 지훈을 보고 싶었던 목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대화가 끝나가고 있어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을 던졌다.
“그리고 올 연말에 K-9 나오는 거 알지? 뉴월드도 임원급 차량 다 바꾸는 거다?”
“너 나한테 영업하냐?”
“내가 기화 자동차 사장인데 당연히 영업도 해야지.”
K-3, K-5는 얼마든지 일반인이 살 수 있는 차량이다. 어찌어찌 K-7까지도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K-9은 달랐다. 가격 면에서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차량이라 기업 대 기업으로 영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래야 그나마 판매 대수를 확보할 수 있다. 기화 자동차와 대운 자동차 협력사의 사장급 인사들 대부분도 K-9을 구입하기로 확정되어 있었다.
“알았어. 안 그래도 바꿀 때가 되긴 했지. 그리고 국내에서 기화 차 아니면 살 것도 없어.”
“크크. 왜? 대현 자동차도 있잖아?”
수안은 다 알면서도 지훈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디자인이 구시대적이잖아. K-5와 K-7을 보면 K-9은 안 봐도 훤해. 얼마나 예쁘게 뽑았을지 벌써 기대된다. 인마.”
“형이 오랜만에 맞는 소릴 다 하네.”
지훈은 슬쩍 고개를 비틀어 시계를 보고 허리를 번뜩 세웠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 일정이 있어서 가 봐야겠다.”
수안은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제발 집 밖에서 헛짓거리하다가 쫓겨나지 말고 가정에 충실하자. 형.”
“큭. 사람이 밥만 먹고 어떻게 사냐? 스테이크도 가끔 먹어 주고, 스파게티도 즐겨 주는 거지. 넌 모르겠지만, 스시는 진짜 죽여 줘.”
수안의 말 몇 마디로 바뀔 사람이 아니었다.
‘형수 인생도 참 서글프네.’
“내가 집에 가면 어머니께 잘 말해 줄게. 기대해. 그리고 넌 인생 좀 즐기면서 살자. 하하하.”
이전 삶에서 아내가 출연했던 영화 속 대사가 떠올랐다.
‘너나 잘하세요.’
* * *
BE 인베스트먼트 이방효는 집무실에서 쇼핑 중이다. 탁자에는 팸플릿이 여럿 놓여 있었고, 자신을 골라 달라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 모델이 최선입니다. 보잉-777 모델이라면 회장님도 만족하실 겁니다.”
“흠. 그래. 이걸로 선택하지.”
강운 그룹과 BE 인베스트먼트를 같이 운영하려면 전용기는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수안이 직접 이방효에게 부탁한 일이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주문하고 내부 인테리어까지 새로 하려면 1년 이상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하지만 BE는 여느 고객과 다르다.
“물론입니다. 최대한 빠른 인도가 가능하도록 보잉사에 압박을 가해 보겠습니다. 인테리어까지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가격을 듣지 못했군.”
전용기 구매 업무의 대부분을 일임하고도 가격을 확인하지 않았다.
“전용기로 개조하는 작업을 포함해서 한 대에 2억 7천만 달러입니다.”
“저렴하군.”
“……!”
“우선 두 대만 주문해서 써 보고 괜찮으면 추가 주문을 넣도록 하겠네.”
“두 대! 주문 감사합니다.”
5억 4천만 달러도 BE 인베스트먼트에서는 크지 않은 지출이다. 이방효는 어차피 대단치 않은 금액이라 생각해 지금까지 묻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도 한 대 살까?’
본인도 전용기를 살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 * *
“전용기 주문 잘했어?”
-예. 회장님. 보통 1년도 넘게 기다려야 한다고 했는데, 조금 더 이르게도 가능한 모양입니다.
“다행이네. 모델은 뭐야?”
-보잉사 트리플 세븐 기종입니다. 최근 출시한 모델이고 세계적으로 항공사 주문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아~ 나도 알지. 잘 골랐네. 잘 팔리는 기종이 괜히 잘 팔리는 게 아니거든.”
-하하. 보시기도 전에 만족하시니 기분은 좋습니다.
“앞으로 아버지도 타고 다니실 전용기니까 내부 인테리어에 신경 써 줘.”
-예. 심플, 모던, 럭셔리가 업체의 인테리어 주제라고 하더군요.
“아버지 취향에도 잘 맞겠어.”
-그리고 잭 회장의 재판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조만간 결심 공판에서 가석방 없는 무기 징역과 사형 중에서 결론이 나올 것 같습니다.
“잭이 언론에 BE에 관해 입을 열진 않았지?”
-잭의 변론을 맡은 로펌을 통해 경고를 남겨 뒀습니다. 잭의 입에서 BE와 회장님이 거론될 일은 없을 겁니다.
많은 증거를 오바마 상원 의원에게 전달했지만, 일부 증거는 전달하지 않고 BE에서 확보하고 있었다. 이 증거를 무기로 잭 피에타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너무 확실한 증거라 잭 회장은 BE의 경고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가 없어도 유죄는 확정이지.’
그래도 사형과 무기 징역 중에 고르라면 무기 징역을 고르지 않겠는가.
-화이트 하우스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니까.”
재판을 통해 속속 밝혀지는 잭 피에타의 행적은 금융계의 로비가 얼마나 촘촘하게 진행되었는지도 알게 해 줬다. 로비 대부분은 공화당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민주당 일부 의원들에게도 로비가 있었다는 증거가 나왔다.
“그래서 뭐래? 우리 일에 도움을 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로버트 전 장관이라는 대안이 마음에 든 것 같습니다.
“크흐. 그거 좋은 소식이네.”
정부, 아니 민주당에서도 미국 금융계에 힘을 쓸 수 있는 창구가 열리는 것이다. 말로만 미국 금융이지 실상은 전 세계에 지점을 가진 글로벌 금융 회사였다.
무려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대 금융 그룹의 힘은 국가의 또 다른 힘이다.
-잭 회장의 형이 확정되면 모건 스탠리 지분부터 확보하고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물론 다른 유산도 정리를 시작해야겠죠.
“사전에 면회해서 뭘 남겨 줄지 물어봐. 다 뺏기는 좀 그렇잖아. 프랭크 회장은 죽었으니 상관없었지만, 잭은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
-어떻게 잭에게까지 군자의 도리를 실천하십니까. 저는 죽었다 깨나도 못 쫓아가겠습니다.
“어허. 과하다. 과해. 거기까지만 하자.”
-예. 회장님. 조만간 골드만삭스 임시 주주 총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먼저 골드만삭스 대표를 겸하는 회장으로 로버트가 선출될 것이다. 이후 골드만삭스는 모건 스탠리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발표하고 BE에서 차입한 자금으로 모건 스탠리 지분을 인수하게 된다.
“골드만삭스 이사회는 문제없다고 했었지?”
-예. 우리의 접촉을 달갑게 여기지 않던 위원들도 우리가 추대할 인물이 로버트 전 재무부 장관이라는 말에 다들 찬성으로 돌아섰습니다. 만장일치로 결정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여간 로버트도 난 사람이지.”
-아. 로버트 씨가 프랭크 전 회장의 샷건 컬렉션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래? 처치 곤란이었는데 받아 줘서 다행이네.”
-샷건 가치가 상당합니다. 한 정에 대부분 억이 넘습니다. 로버트 씨의 입이 쩍 벌어지는 걸 옆에서 보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로버트에겐 돈 아까워하지 마. 앞으로 우리가 금융 시장을 뒤에서 조정하는데 얼굴마담으로 그만한 사람이 없어.”
-저도 로버트 씨의 이름값이 그렇게 높을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회장님이 선택하신 사람답습니다.
미국의 전 재무부 장관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을 어디서 또 구하겠는가. 그리고 수안을 대신해서 어려운 일(?)까지 해결해 준 사람이다. 지금까지 쓴 돈과 앞으로 쓸 돈도 아깝지 않았다.
“내년 3월 잊지 않았지? 그 전에 정리하고 공매도로 넘어가자고.”
-예! 회장님.
IT 버블 쇼크가 대단한 사건이긴 했지만, 수안이 직접 일을 처리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이방효 사장이 알아서 잘 진행할 것이다.
지금 수안이 시선을 둬야 하는 곳은 국내. 그것도 정치 일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