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월드와 크로스
뉴월드 그룹 정지훈 전무가 수안을 찾아왔다.
안 그래도 지훈을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찾아와주니 수안은 절로 웃음이 났다.
“형님이 어인 일로 여기까지 걸음 하셨을까? 하하하. 우선은 잘 오셨어.”
“너 대체 소고기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웃는 낯에 침을 뱉고도 남을 사촌이다.
“무슨 짓이라니…. 그리고 소고기는 또 무슨 소리야?”
“하도 소문이 자자해서 나도 사다가 먹어 봤다.”
뉴월드는 유통으로 성장한 그룹.
뉴월드 마트는 경쟁 마트를 따돌리며 성장하고 있었다. 처음 강운 무역이 홈플러스를 인수했을 때만 해도 대단치 않게 생각했었다. 이미 국내 유통업은 뉴월드 마트가 확실하게 자리 잡아 경쟁까지는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장에 괴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홈플러스의 판매 물품이 가장 저렴하고 신선 식품은 다른 어떤 마트보다 신선하다는 소문이다. 특히 육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했다. 정지훈도 하도 소문이 시끄러워 홈플러스의 소고기를 사다가 먹어 봤고 육질의 풍미에 놀라고 말았다. 자신 같아도 이렇게 저렴하고 맛있는 소고기를 사 먹을 것 같았다.
“그건 분명 1등급 소고기였어. 그것도 투뿔 최상급! 그런데 어떻게 마트에서 그 가격에 팔 수 있어? 손해 보려고 작정한 거야? 아무리 홍보를 해도 그렇지 그건 너무하잖아.”
품질과 가격은 정비례해야 정상이다. 이렇게 반비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원인은 단 하나. 손님을 끌어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소고기를 원가 이하로 판매한다는 결론이었다.
“아. 홈플러스에서 파는 소고기? 진즉에 그렇게 말을 하지. 그거 2등급 소고기야. 그러니 그 가격에 팔 수 있지.”
워터 에이징으로 숙성을 거쳐 추가 비용이 들었지만, 1등급에 비해서는 상당히 저렴했다. 게다가 축산물 도매 법인을 인수해 홈플러스 계열사로 편입했기에 시중의 2등급 소고기 판매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출 수 있었다.
“그게 어떻게 2등급이야? 너 뉴월드 마트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어?”
지훈의 머리엔 아직도 소고기를 속여(?) 판다는 결론만 확고하게 들어차 있었다.
“설마 내가 고모님 사업을 노리고 그랬겠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판매할 건데 어떻게 손해를 보고 팔아. 진짜 2등급이라니까.”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득을 본다고도 하지 않았다.
“진짜? 그게 진짜로 2등급이라고?”
“속고만 사셨나?”
“…….”
정지훈은 다 토설하라는 눈빛으로 수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안이 아니라면 아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거짓말은 하지 않는 놈이었다.
“뭐? 왜?”
“다 불어. 뭔데? 무슨 방법을 쓴 거야?”
“회사 영업 기밀을 유출하라고?”
“그러지 말고 그냥 얘기해 주면 안 되냐?”
“어허. 형님이 지금 하는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거 잘 알지? 내가 이거 말하면 배임이야.”
“수안아!”
“형님. 나한테 묻지 말고 연구를 해 봐. 뉴월드 마트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야.”
“힌트. 힌트!”
힌트라도 달라는 말이다. 수안은 어쩔 수 없이 작은 힌트를 주기로 했다.
어차피 일정 시간이 지나면 시장에 공개할 숙성법이기도 했다.
“고기가 신선하면 끝일까? 그럼 도축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고기는 어떻지?”
“그야…. 사후 경직으로 질긴 상태가 되지.”
그래도 유통업을 맡았다고 축산업에 관해서 공부한 모양이다.
“맞아. 그래서 필요한 건?”
“…숙성?”
“정답. 형님이 알아서 답을 찾아냈네.”
“숙성이 답이라고?”
설마 지금까지 숙성도 안 한 고기를 판매했겠는가. 뉴월드 마트에서도 일정 시간 숙성을 거친 축산물을 유통했었다.
“그게 무슨 답이야?!”
“아예 밥을 떠먹여 달라고 하려고? 여기까지 알려 줬으면 나머지는 형님이 알아서 찾아야지.”
“에효….”
힌트를 너무 박하게 준 모양이다.
“형. 왜 숙성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 전 세계에 고기 숙성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겠어? 외국 사례를 뒤져보시란 말이야. 미국부터 찾아보면 금방 답 나와.”
“오!”
“미국 유학도 다녀온 사람이 미국 소식이 어둡나?”
“그게 언제 적 일이냐?”
근래 미국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숙성법이 있었다. 워터 에이징이 아니라 드라이 에이징이지만, 나름 깊은 풍미를 만드는 숙성법이다. 고기의 풍미를 극대화하지만, 원육의 손해가 상당량 발생하고 따로 숙성 냉장고가 필요하기도 했다. 거기다 제대로 된 숙성법을 완성하기까지 시행착오도 필요했다.
“좋아. 좋아. 홈플러스도 그 숙성법을 따른다는 말이지?”
“아니. 홈플러스는 따로 개발한 숙성법을 적용하고 있지.”
정확한 숙성법은 아직 공개하기에 이르다. 시장에서 홈플러스가 제대로 된 축산물 강자로 등극한 다음에나 알려 줄 수 있다.
“…….”
수안은 노려보는 지훈의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냈다.
“뭐? 내가 진짜 기밀이라도 유출할 줄 알았어?”
“너…. 두고 보자.”
“에헤이. 내가 악당 같잖아. 두고 보긴 뭘 두고 봐?”
“고기는 그렇다 치고! 전체적으로 물건들 판매가는 왜 그 모양이야? 입점한 상점들 수수료는 왜 그 수준이고?”
홈플러스는 대대적으로 판매가를 낮춰 염가 판매를 진행하고 있었고 마트에 들어온 아울렛 형 브랜드 상점들의 입점 수수료도 저렴하게 다시 책정했다.
“그거 시장 교란이야. 이대로 가면 다 같이 망해.”
“그러게… 누가 그렇게 비싸게 팔고 입점 수수료를 많이 받으래?”
많은 사람이 오는 마트의 특성상 마트에 입점한 상점은 기본 판매 금액이 보장된다. 백화점도 마찬가지. 백화점에 입점한 브랜드 상점은 매월 매출액의 30%가 훌쩍 넘는 입점 수수료를 지불하고 백화점에서 영업하고 있었다. 그래도 수익이 남기 때문이다. 마트는 그보다 못한 20% 중후반의 수수료를 책정하지만, 점차 수수료를 올리는 추세에 있었다. 홈플러스는 올라가는 수수료를 오히려 거꾸로 낮춰 버렸으니 불만이 나오고도 남을 일이다.
“…….”
“형. 남들 따라가면 시장을 선도할 수 있겠어?”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은 뭔가 달라도 다르기 마련이다.
후발 주자를 따돌릴 정도로의 초격차 기술력을 보유하든지, 특별한 디자인의 제품을 선보이든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소비자에 친근한 기업이라도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남들을 따라 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처음엔 누구나 선발대를 따라가며 기술력을 성장시키고 경쟁력을 마련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따라갔다면 넘어설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홈플러스는 새로운 시장의 지배자로서 지배자다운 모습을 보이려고 할 뿐이다.
“아직 IMF 체제가 끝나지 않았어. 우리 소비자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대한민국은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잖아. 홈플러스가 선발대야. 난 뉴월드 마트도 홈플러스의 기조에 동참해 주길 바라고 있어.”
상생을 향한 흐름을 만들어가는 기업이야말로 시장을 선도할 자격이 있었다.
‘물론 아버지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하아…. 땅 짚고 헤엄치면 되는 유통인데, 너도 참 어렵게 산다.”
“어차피 국내 마트 사업에서 독점은 어려워. 하지만 두 개의 유통 업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시장의 반은 홈플러스가 먹고 나머지 반은 뉴월드 마트가 먹는 거지. 지금보다 나은 미래 아니야?”
“…그건 좀 솔깃하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겠는가.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나섰다간 다른 마트의 집중포화를 견뎌야 한다. 하지만 둘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뉴월드 마트는 유통의 강자였고 홈플러스는 떠오르는 신성이다. 둘이 연합해 가격을 내리면 다른 마트들은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낮춰 비슷하게 발을 맞춰야 한다.
‘형님이 날 좀 도와야겠소.’
본래 수안은 뉴월드와 연합해서 다른 마트와 대응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딱 맞게 찾아온 지훈이다.
“우린 범 강운 그룹이잖아. 서로 돕고 살아야지.”
“치킨 게임이라는 말이지?”
경쟁사를 나락으로 빠트릴 치킨 게임의 시작이다. 시장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면 잠시 손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 마트 시장은 초기에 가까워서 어렵지 않을 거야. 특히 샤롯 마트는 철저하게 깨부숴야 해.”
“큭. 넌 샤롯 그룹을 특히 싫어하더라.”
“걔들은 국내 기업도 아니잖아. 일본 기업이 국내 기업이라고 포장했을 뿐이지.”
“오케이. 오케이. 좋았어.”
“가서 고모님께도 잘 말씀드려 줘. 내가 뉴월드 마트 잡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고 꼭 전해야 해.”
“콜. 기한은 언제까지야?”
“기한이 어디 있어? 샤롯 마트 망할 때까지 하는 거지.”
“야…. 샤롯 마트가 언제 망할 줄 알고?”
“샤롯 마트 철수 못 시키면 치킨게임 안 하느니만 못해. 다른 마트는 몰라도 샤롯 마트는 무조건 젖히고 보자고.”
“하아. 마트 수익률 개판 나겠네.”
“수익은 다른 데서 찾으면 되지. 먹거리가 넘치는데 마트만 보고 있을 거야?”
“…너 따로 신사업 구상이라도 하고 있냐? 있네. 있어. 얼른 말해 봐.”
“헐. 이제 사촌 동생 사업구상까지 빼먹으시려고?”
“아까 네 말대로 우리 범 강운이야. 있으면 공유 좀 하자. 같이 먹고 살아야지.”
“맨입으로?”
“썩을.”
“크큭. 형님이 무슨 선물을 주는지 확인하고 나서 내 아이디어를 공유할게.”
“…외상 안 되냐?”
“내가 다른 사람 같으면 외상 사절인데, 형님이라 받는 거야. 집에 가서 고모님한테 정확하게 말씀드려. 나한테 외상 걸고 사업 아이템 받아 왔다고 꼭 얘기해야 해.”
“알았으니까 얼른 썰이나 풀어 봐.”
수안은 구상했던 적당한 사업 하나를 거론했다. 본래 뉴월드 그룹에서 진행했으면 했던 사업이다.
“프리미엄 복합 아울렛. 요즘 백화점이 예전만 못하잖아. 백화점보다 하위로 보는 아울렛이지만, 언제까지 아울렛이 저렴한 이월 상품만 다루겠어? 미국의 복합 아울렛을 한국에 적용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리고 돈 많다고 저렴한 옷 안 좋아해? 다들 싼 물건만 찾잖아. 그러니까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월 명품을 다루는 복합 매장 몇 개와 식당, 극장까지 넣으면 사람들이 그냥 막….”
“넌 X발 왜 머리까지 좋아?”
듣자마자 돈이 되겠다는 계산이 섰다. 미국 유학 시절에 자주 갔던 아울렛이 지훈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대로 프리미엄 아울렛을 세우면 백화점 못지않은 매출이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왜 거기에 욕이 들어가는지 모르겠네. 값은 톡톡히 쳐 줘야 해. 형. 내가 포기하고 형한테 넘겨주는 사업이니까.”
“아휴. 이 복덩이. 회장님이 왜 널 예뻐하는 줄 알겠다.”
“이제 사업 얘기 그만하고 좀 쉽시다. 하도 말을 많이 해서 목이 아파.”
수안의 말에 지훈은 얼른 문을 열고 비서에게 말했다.
“여기 아무거나 시원한 주스로 두 잔!”
“예. 알겠습니다.”
수안은 목을 축이며 지훈의 근황을 물었다.
“고모님은 별일 없으시지?”
“홈플러스 말고는 없지.”
고모님이 홈플러스로 마음고생을 하긴 하신 모양이다.
“다시 말하는데 가서 진짜 잘 얘기해 줘야 해.”
“알았어. 인마.”
“형은. 형수님하고 괜찮고?”
“요즘 아주 미치겠다.”
“왜?”
‘설마…. 벌써 이혼?’
예전과 달리 잘 사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