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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 그날 (187/304)

추억 속 그날

“그런 걱정은 나중에 하고 얼른 씻고 저쪽으로 가서 자.”

수안이 가리키는 곳은 안방이 아니라 혼자서 잘 수 있는 다른 방이다.

“왜요? 내가 애들 재워야죠.”

“애들 뒤척이면 잠 설치잖아. 오늘은 내가 애들하고 같이 잘 테니까 당신은 편히 푹 자.”

“괜찮은데….”

“촬영이 내일로 끝이면 모를까, 앞으로도 계속 이럴 텐데 미리미리 잠을 보충해 줘야지.”

“…알았어요. 고마워요. 여보.”

“뭘. 지금까지 당신이 날 챙겨 줬으니 이제 내가 당신을 챙겨 줘야지.”

‘내가 어쩌다가 당신처럼 자상한 남편을 만났을까.’

아현은 절로 과거가 떠올랐다.

[우리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날짜 잡읍시다.]

[…네, 네?]

[지금 청혼하는 겁니다. 반지도 준비해 왔습니다.]

‘…당신 정말 대단했지.’

마치 자동차 사고처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재벌 3세가 불러서 간 곳에서 그녀는 충격적인 청혼을 받았다.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남편은 확신에 가득했고 대단한 추진력을 보여 줬었다.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받아 주십시오.]

[…결혼하자고요? 오늘 처음… 지금 방금 봐 놓고 대뜸? 이보세요!!]

‘그때 그냥 오케이했어야지. 멍청이.’

지금의 남편을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이었다. 만약 수안 씨가 그대로 포기했다면 오늘 이렇게 행복한 순간도 없었을 것이다.

[아까 낮에도 말했지만, 나 다른 재벌가 자식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고, 문란하게 살지도 않았어. 당장 당신 손 잡고 있는 것도 엄청나게 떨린다고 나. 그러니까… 이거 꼭 받아 주라.]

청혼 반지를 주며 손을 떨던 남편이었다.

[…생각해 볼게요.]

[고마워.]

‘내가 더 고맙죠. 여보.’

수안이 잡은 손을 놓지 않아 아현이 한마디 했던 기억도 있다.

[…이제 좀 놓죠?]

[에헤이… 그냥 놓은 셈 치자.]

[그럼 잡은 셈 치고 놔요.]

[쳇. 결혼한 셈 치면 안 되나?]

[놓죠? 나 청혼 반지 밖에 던져요?]

[워우. 화끈하시네. 우리 아현 씨.]

‘그때 내 손에 남았던 온기와 그 눈빛….’

남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주고 있었다.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한 눈이다.

자신을 사랑하듯이 아이들도 사랑해 주는 멋진 아빠이기도 했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내 남편이야.’

“여보.”

“응?”

“난 당신이 날 선택하고 끝까지 붙잡아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어휴. 내가 더 고맙지. 당신이 날 허락해 줬잖아.”

“흐흣. 잘 자요. 당신도 내일 회사에서 바쁠 텐데.”

“알았어. 얼른 씻고 자.”

아현은 이번 드라마를 끝내면 한참은 작품을 쉬고 아이들과 남편에게만 집중할 생각이다. 드라마로 복귀하고서야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가족이 마음속 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연기도 좋지만, 가족은 더 좋았다.

* * *

영수는 집안 이사를 위해 회사에 연가를 내고 하루 쉬기로 했다. 이삿짐 센터에서 이사를 돕겠지만, 남의 손에 다 맡길 수 없다는 부모님의 성화 때문에라도 자신이 붙어 있어야 했다.

“가구들과 냉장고랑 TV까지 안 가져가? 그럼 뭘 가져갈 건데?”

영수는 어머니가 집 안 가구들과 가전제품까지 가져가지 않는다는 말에 되물었다.

“이미 다 사 놨다니까. 넌 지금까지 뭘 들었어?”

“나한테 언제 얘길 했는데?”

“…안 했나?”

“여보. 우리가 안 했지. 영수는 매일 야근하는데 언제 들었겠어.”

“그런가? 어쨌든, 그건 여기 그대로 두고 나중에 너 결혼하면 쓰든가. 아직 멀쩡하게 쓸 수 있잖아.”

“나 결혼할 사람도 없는데?”

“자랑이냐?”

“…….”

“네 나이가 올해 몇인 줄 알아?”

그걸 왜 모르겠는가. 올해로 계란 한 판. 서른이다.

“이삿짐이나 옮깁시다. 왜 갑자기 나이 얘기가 나오고 그래?”

“아현이는 애가 둘이야 이것아!”

“여자랑 남자가 같아?”

“그래도 아현이 결혼하고 5년이나 지났잖아. 너도 이제 갈 때가 됐지.”

“알았다니까. 나도 열심히 찾아보고 있어.”

“허이구. 어느 세월에?”

“아예 악담을 하시지? 아들 장가가지 말라고?”

“여보. 좋은 날인데 왜 그래. 영수도 다 생각이 있겠지. 그리고 영수가 어디 못나기라도 했어? 좋은 직장 다니고 멀끔하게 생겼잖아. 괜찮은 신붓감으로 데려올 거야.”

“휴우. 너 올해 꼭 한 명은 데려와. 알았어?”

“…….”

그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왜 대답이 없어?”

“이사나 갑시다. 이 짐이 다 들어갈지 모르겠네. 살림이 워낙 많아야지?”

“들어가고도 텅텅 남아돌아!”

“별소리를 다 하시네. 알았어요.”

영수는 어머니의 말이 그냥 버럭 하는 말인 줄로만 생각했다.

“헐….”

눈앞에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집은 분명 부모님과 본인이 들어가서 살게 될 집이었다. 셋이 살기엔 너무 넓은 집이다.

“여, 여기가 우리 집?”

“그래.”

“아빠… 진짜야?”

“진짜야. 아현이가 샀어.”

“헐…. 집에서 축구 해도 되겠네.”

“지하에 운동 시설도 들여놨더라. 축구까지는 아니고 탁구대랑 당구대도 있어.”

런닝 머신을 포함해 헬스장에서 흔히 보는 운동 기구들을 가득 들여놨다. 부모님이 집 안에서 운동하며 건강하게 오래 살길 바라는 아현의 마음이었다.

“…….”

“들어가자. 가서 짐 정리해야지.”

짐 정리는 둘이 손댈 것도 없었다.

앞에서 인사를 건네는 저 사람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최정숙입니다. 오늘부터 집안 관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사모님이 신신당부하셨어요. 제가 1년 동안은 확실하게 관리해 드릴게요.”

서초동에서 집안을 관리하는 아주머니 중 하나였다.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들이 여럿 있었고 이들을 통솔해 이삿짐을 척척 제자리에 챙기고 있었다. 집 안 청소는 말할 것도 없이 깨끗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사 전에도 그리 더럽지 않았는데 청소가 더해지니 반짝반짝 윤이 날 지경이다.

“…아빠. 저분들은 누구셔?”

“아현이가 보낸 가사도우미라고 하더라.”

“엄마는 괜찮다고 해?”

“적응해 보겠다고 했어.”

“헐. 아현이 고집이 이젠 엄마를 이겨 먹네.”

“아현이가 누굴 닮았겠어?”

“…그야. 당연히 엄마를 닮았지.”

멀리서 어머니가 부자(父子)를 불렀다.

“거기서 놀고 있지 말고 와서 뭐라도 해!”

“우리가 나설 것도 없네. 사람 쓰니까 편하긴 해.”

“그러게. 그래도 하는 척이라도 하자.”

“눼에.”

아현의 가족이 큰 집에 적응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 * *

수안의 지시를 받은 김성우 사장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농산물을 확보하는 일이다. 마트가 재래 시장을 대체하고 자리 잡기 위해서는 신선 식품의 확보가 가장 우선되어야 했다. 다음은 축산물인 육류였다. 이 부분은 쉽게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격만 맞추면 육질은 따라오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축산물에 관한 특별한 정보가 전해졌다.

“오오… 이렇게 하면 최상급과 비슷해진다고?”

김성우 사장이 보고 있는 것은 부회장 수안으로부터 도착한 E-Mail이다.

[숙성의 차이가 품질의 차이를 만듭니다. 마트에서 판매하는 소고기의 경우 1kg 진공 포장으로 워터 에이징을 진행하세요. 2등급 소고기라도 1++등급 소고기와 같은 맛과 풍미를 냅니다. 3등급도 먹을 만한 수준으로 만들 수 있죠.]

메일의 중간엔 숙성을 통해 소고기가 어떤 변화를 겪는지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워터 에이징을 통해 글루탐산, 이노신산, 올레인산 등 감칠맛을 담당하는 성분을 활성화한다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김성우 사장은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젠장. 나도 공부 좀 해야겠네. 부회장님이 이렇게 열심인데….”

[숙성 기간은 2주에서 3주 사이, 물의 온도는 0도에서 3도 사이로 맞춥니다. 김 사장님이 직원들과 숙성육과 일반육을 드셔보시고 확인한 다음 마트에 적용하세요. 소고기뿐 아니라 돼지고기도 비슷합니다. 정확한 숙성 차이는 차후에 따로 연구해 보시고요.]

“그건 확인을 해 보고 나서….”

[추신. 워터 에이징을 전국 마트에 적용하려면 특수 수조 설비가 필요할 겁니다. 관련 숙성 설비 개발해서 마트에 일괄 배포할 수 있도록 준비하세요.]

“어디 시작해 볼까?”

김성우 사장은 마트 관리를 맡은 직원들과 함께 진공 포장된 고기를 적정 온도에 맞춘 물에 넣어 워터 에이징을 진행했다. 그리고 2주가 지나 숙성이 끝난 숙성육이 탄생했다. 비교 대상은 같은 시간이 지난 동일 등급 고기였다.

오늘은 시식으로 두 종류 고기를 비교할 시간이다.

촤아악.

불판에 고기가 올라가 익는 소리가 예술이다.

“크흐. 술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사장님.”

“장 본부장. 오늘은 회식이 아니라 시식이야. 술 먹고 무슨 시식을 해?”

“비닐에 싼 고기를 물에 담근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어차피 똑같겠죠.”

“그야….”

김성우 사장도 숙성에 확신이 없었다. 부회장님이 지시한 일이라 하긴 했지만, 달라 봐야 얼마나 다르겠나 싶은 마음이 있었다.

‘2등급 고기에 아무리 금칠을 해 봤자 2등급 고기지 뭐.’

차가운 물에다가 2주 동안 넣었다고 달라질 고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냉장고에 들어간 고기들 전부가 다 맛있어야 했다.

“다들 한 점씩 집어서 먹어 봐. 우선 2등급 미숙성 일반육이야.”

“예.”

적당히 익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먹는 직원들은 평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부는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김성우 사장도 고기 한 점을 씹어 삼키고 물었다.

“…어때?”

“그냥 소고기네요.”

“육즙이 조금 아쉽긴 합니다.”

“저는 질기다고 느꼈습니다.”

“평범합니다. 특색이 없어요.”

“어딜 가나 살 수 있는 고기라는 느낌입니다. 소고기 특유의 향도 약간 역합니다.”

시식을 위해 소금도 찍지 않고 먹어서 좋은 평이 나오질 않았다.

“나도 감상은 비슷해. 나라면 이런 고기를 선택하지 않아.”

숙성하지 않은 고기는 돈을 주고 사 먹기에 아깝다는 느낌이다.

“다음은 숙성육을 올려보자.”

진공으로 포장된 비닐에서 꺼낸 숙성육을 적당하게 구워 다시 한 점씩 들었다.

전혀 기대하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먹어 봐.”

우물우물.

“……!!”

“……!!”

“……!!”

“……!!”

모두가 눈을 한껏 치켜뜨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직원들 표정을 본 김성우 사장도 얼른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

‘헙! 녹았다!’

고기가 입에서 녹아 버렸다. 분명 최고등급 한우 고기를 판매하는 음식점에서나 맛볼 수 있는 맛이었다. 육질은 연했고 고기의 풍미가 최고조로 끌어 올려져 있었다.

직원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육즙이 터집니다! 고기가 미쳤어요!”

“이렇게 부드럽다니! 이게 진짜 2등급 소고기였습니까?”

“부족합니다! 더 올려서 시식해 보죠!”

“맞아. 시식하기엔 양이 너무 적어.”

직원들은 알아서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걸신들린 듯이 소고기를 시식(?)했다.

숙성육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1kg이 넘는 고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쉽네요.”

“다음엔 더 많은 고기를 숙성해서….”

“어때? 이 정도면 시장에서 먹히겠지?”

김성우 사장의 말에 장하용 본부장이 장담했다.

“먹히기만 하겠습니까? 소비자가 우리 마트만 찾아올 겁니다. 2등급 소고기가 1++등급 소고기와 같은 맛을 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고기를 저렴하게 판매하는 마트라면 저라도 당장 마누라 손 잡고 장을 보러 갈 겁니다.”

“…우리 마트의 워터 에이징 비법은 마트의 특급 기밀로 지정한다. 2등급 소고기는 됐으니까 1등급과 3등급에도 적용해 보자. 그리고 돼지고기에도 적용해! 장 본부장은 각 마트에 제공할 워터 에이징 수조를 강운 전자 개발팀에 의뢰해. 최대한 빨리 워터에이징 냉장 수조를 전국 마트에 공급해야 해. 급해!”

“예! 사장님.”

강운 무역의 홈플러스는 돌풍을 일으키며 마트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선식품을 포함해 판매하는 대부분의 물품 가격이 저렴했고, 고기의 육질은 미쳤다. 소문이 안 날 수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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