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
“내가 알아서 할게. 어차피 내 이름으로 샀잖아.”
아현은 불어난 자산만큼 통도 커져 있었다.
지금도 회사에서 관리해 주는 증권 계좌는 하루가 다르게 평가 금액이 불어나고 있었으며, 얼마 전 BE 인베스트먼트의 보험 상품도 엄청난 금액의 자산을 불려 줬다. 그 금액만 해도 360억. 이 집을 현금으로 샀지만, 300억이 고스란히 남았다.
자주 가진 않지만, 고려호텔의 최대 주주이기도 한 아현이다. 집안일에 사람을 쓰는 일도 꺼려지지 않는다.
그간 살아온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수안과 결혼하고 햇수로 5년 차. 서초동에서 도우미 아주머니들과 부대낀 시간이 5년이다. 이젠 산후 조리를 위해 친정집에 와서 어머니가 주방을 들락거리는 모습이 불편해 보이기도 했었다.
“네가 알아서 한다면… 사람을 쓰려고?”
“사람 쓰는 건 좀…. 집에 다른 사람이 와서 일하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
평범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집에 들어와 일한다는 말에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현은 더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 엄마. 이제 편히 살아도 돼. 내가 일하고 있고 돈도 벌잖아. 그리고 엄마 사위가 누군데 지금 돈 걱정을 해?”
돈이 너무 많아서 걱정하면 모를까 부족해서 걱정할 일은 없었다.
앞으로 계속 배우로 일하면 시댁이나 남편에 손을 벌리지 않고도 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다. 배우로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이미 축적된 자산이 있으니 걱정 없다.
“커도 너무 큰데….”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시 돌아본 집은 너무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집 커도 적응하면 또 비슷해. 오늘은 처음 봐서 그렇다니까. 나도 서초동 시댁에서 처음 며칠이나 어색했지 금방 적응했어.”
산후 조리를 친정집에서 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답답함이 느껴졌던 아현이다. 그래서 아버님이 물꼬를 틔워 줬을 때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흐음….”
“도련님 계속 기다리잖아. 얼른 구경이나 끝내자.”
“아휴. 그래. 알았어.”
수용의 안내에 따라 내부로 들어가자 집은 밖에서 본 것만큼이나 굉장한 넓이를 자랑했다.
“여긴 경호 건설 회장 일가에서 소유한 집이었지만, 회사가 정리되며 집도 매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대지와 건평이 커서 현실적으론 매각이 어려운 물건이었지만, 저희에겐 딱 맞는 물건이었죠.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기는 뭐가….’
‘한 해 난방비만 수억 깨지겠네.’
차마 사돈총각에게 뭐라 할 수 없어 둘은 속으로만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3층은 생각보다 대단한 전망을 보이고 있었다.
“여긴 정말 대단하죠. 앉아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어르신들이 가끔 올라오셔서 휴식을 즐기면 좋지요.”
“여긴 정말 예쁘다. 뷰가 대단하네요. 도련님.”
“다른 집들보다 여기가 약간 고지대에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한강 앞에 있는 집들 너머로 한강이 보이죠.”
노을이 비추는 한강은 너무 아름다웠기에 두 사람은 불만이 없었다.
“오오.”
“…예쁘네.”
“집이 고지대에 있으니 주변 시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사위도 걱정할 필요 없고 우리 딸도 편히 지내고….”
남편이 왔을 때 원활한 경호를 위해서도 이런 집이 필요했다. 아현은 집의 장점을 어필했다.
“정원이랑 나현이 데리고 자주 놀러 올게. 애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간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할까? 매일 오자고 할지도 몰라.”
수용이 말을 보탰다.
“조카들이 뛰어놀기 정말 좋겠습니다. 차도로 나가는 길도 문으로 막혀 있으니 마음 놓고 놔둬도 걱정이 없겠네요.”
“그래. 정원이와 나현이가 마당에서 뛰면서 놀 수 있겠어. 담도 적당하니 밖에서 보일 일도 없고, 잔디 마당에서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을 것이고.”
손주들을 생각하니 집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 그렇겠네.”
“이제 이사 날짜만 잡으시면 되겠습니다. 사돈어른.”
“이 큰집에 살림은 어떻게 채운담.”
“그건 나한테 맡겨 엄마.”
살림은 새로 채워 줄 생각이다.
* * *
수현은 당당한 걸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또각. 또각. 또각.
멀리 보이는 상대의 겉모습은 그럴싸했다. 우선 자세부터 반듯했고, 얼핏봐도 상당한 키에 운동을 즐겨 하는지 체구도 단단해 보였다.
‘오~ 오빠가 신경 좀 썼나?’
수현은 미소를 보이며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일찍 도착하셨네요.”
“안녕하세요. 저도 금방 왔습니다.”
수현이 도착한 곳은 선을 보는 곳으로 애용되는 커피숍이다.
주변에는 어색한 분위기의 남녀가 많이 보였다. 대부분 맞선을 보고 있었고 일부는 주선자와 함께 있는 이들도 있었다.
“대현 중공업 정경수입니다. 반갑습니다.”
수현은 상대의 말에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호호. 저도 회사 이름 붙여서 소개해야 하나요? 뉴월드 호텔 강수현입니다.”
수현은 만나자마자 상대를 평가하고 있었고,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럴 땐 강운 그룹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수현 씨는 뉴월드 호텔 사장의 딸이 아니라 강운 그룹 강 회장님의 자제분이 아닙니까.”
수현의 가치는 뉴월드 호텔에서 일하는 강 실장이 아닌 강운 그룹 회장의 딸이 더 크다는 말이다. 정경수는 수현이 뉴월드 호텔 과장이라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다. 강운 그룹 둘째 딸이라는 간판을 보고 나왔기에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앞에 붙이신 대현 중공업이 집안 가업을 붙이셨단 말씀이네요?”
수현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회사를 소개하려고 붙인 줄 알았더니 결국 “내가 이런 집안사람이다.”라고 알리기 위해 붙였다는 말이었다.
“그렇죠. 수현 씨는 강운 그룹 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저는 대현 중공업이 자랑스럽습니다.”
“서로 다 아는데 왜 붙여야 하죠? 차라리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라면 이해가 가는데, 이름 앞에 일부러 회사 이름을 붙이는 건 이해가 안 가는 일이네요. 지분만 갖고 집에서 놀고 있다면 모를까….”
“그야…. 그런데 수현 씨 태도가 너무 공격적이시네요? 여자는 자고로 다소곳한 태도를 보여야….”
더 들어 볼 것도 없었다. 수현은 손을 들어 정경수의 말을 잘랐다.
“다소곳한 여자는 딴 데 가서 찾는 게 좋겠네요. 시간 낭비는 그만합시다. 아저씨는 갈 길 가시고, 나도 내 갈 길 가겠습니다.”
“허. 아저씨라니…. 예의를 지켜 주시죠.”
“쓰읍. 내가 당신이 “여자는 자고로”라고 시작할 때부터 커피 부어 주려다가 말았는데…. 진짜 커피로 따귀 한 번 맞아 볼래요?”
“커피 나왔습니다. 손님.”
수현은 방금 나온 뜨거운 커피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가, 갑니다. 내 갈 길 가죠.”
정경호가 후다닥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수현은 커피잔을 예쁘게 들어 호로록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세 번이나 저런 놈이 나오냐.”
맞선이 세 번째라는 뜻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상대가 세 번째라는 뜻이다. 실제로 맞선은 열 번 이상 봤다.
“오빠 말대로 멀쩡한 놈이 많지 않네.”
또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수현은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봤다.
‘요즘 이런 커피숍이 생기던데….’
괜히 사업 아이템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거…. 돈 되겠는데?”
고퀄리티 커피의 납품과 유통, 계절마다 바뀌는 신선한 음료, 예쁜 케이크와 디저트에 이어 판매하는 영업장의 실내 인테리어와 대리점 확장까지 주르륵 이어지던 생각은 마케팅까지 이어졌다.
“여성들이 부러워할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에 광고를 집행하면…. 이거 정말 괜찮잖아?”
* * *
수안은 갑자기 쳐들어와 사업성을 평가해 달라는 수현의 질문에 당연한 질문을 먼저 던졌다.
“맞선은 어쩌고 혼자 와? 정경수씨 는 나름 괜찮은 것 같았는데.”
‘선보라고 보냈더니 커피 프랜차이즈를 떠올리다니….’
“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 몇 마디 대꾸했더니 여자는 자고로 다소곳해야 한다잖아. 오빠 같으면 그런 놈하고 말을 섞고 싶겠어?”
“아…. 또 그런 놈이야?”
인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후보는 제외했고, 기업과 가족들에 문제가 있는 후보도 갈려 나갔다. 그중에 적당한 놈들만 남겨서 수현에게 붙여 주고 있었는데, 수현의 마음에 드는 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최 사장님이나 배 사장님이나 제대로 거르고 있는 거 맞아? 맨날 엉뚱한 놈들만 만나는 기분이라고.”
맞선에 관해서는 앞으로 자신도 챙겨 보겠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조금 더 신경 써 볼게. 어째 남은 놈들이 다 그따위냐….”
“아! 그건 됐고. 커피 사업 사업성이나 평가해 줘 봐. 어때 오빠? 커피 프랜차이즈 성공할까?”
“…….”
커피 프랜차이즈는 무조건 성공이다.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게 되지만, 현재 시점에서 시작하면 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강운 그룹에서 투자한다면 얼마나 더 대단한 프랜차이즈가 탄생하겠는가. 커피 프랜차이즈 전체에 커피를 공급하는 상위 기업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다.
“안 될 것 같아?”
“되기야 되겠지. 그런데 우린 강운 그룹이잖아. 대기업이 그런 분야까지 손을 대면 욕먹어.”
문제는 강운 그룹이 대기업이라는 점이다. 못할 건 없지만, 골목 상권까지 노린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 강운 그룹이야? 내가 한다니까.”
“네가 강운 그룹 딸내미잖아. 그게 그거지.”
“나 해 보고 싶어. 우리 호텔 체인에만 들어가도 엄청난 숫자야. 그리고 각지에 퍼져 있는 골프장과 스키장, 리조트, 콘도까지 계산하면 이걸 그냥 놓칠 수 없다고. 거기다 강운 그룹 모든 계열사 빌딩 1층에 이런 커피숍이 생긴다고 생각하면…. 안 하는 게 이상하지!”
“…….”
“지금 국내에 커피 프랜차이즈가 떠오르고 있어. 해외에 유학했던 젊은 사람들이 국내로 들어와서 우아하고 깔끔한 커피숍을 찾는단 말이야.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야.”
“그거 시작하면 너 결혼은 언제 하냐?”
“지금 내 결혼이 문제야? 새로운 사업이 눈앞에 있는데.”
“…에효. 네 마음대로 해 봐. 네 나이도 아직 있고 맞선 상대도 더 찾아봐야 하니까.”
“오예!”
“제대로 사업 구상 짜 보고 필요한 자금이 있으면 미리 얘기해. 강운 그룹 차원에서 지원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투자할 수는 있으니까.”
“큭. 좋았어!”
“하여간. 너도 일 벌이는 거 좋아해서 큰일이다.”
수안은 수현의 결혼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저렇게 사업에만 관심이 있는데 결혼이 중요겠는가.
* * *
수현을 보내고 다시 일정대로 방문자가 들어온다. 먼저 강운 무역 김성우 사장이 들어왔다.
“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김 사장님. 요즘 고생하신다는 얘긴 들었죠.”
“회사의 곪은 부분을 도려내고 있을 뿐입니다. 진즉에 했어야 하는데 늦었습니다.”
형님을 통해 회사 안에 숨겨졌던 문제점이 제보되었고 제보된 문제점들을 경영진이 직접 파악, 해결하는 중이다. 강운 무역은 해외 거래처에 대금 지불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라 돈이 유출될 구멍이 상당했는데, 해외 커미션 쪽에서 일부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관련된 직원들에 관용을 베풀지 마세요. 회사의 이익을 사적으로 빼먹던 놈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봐야 나쁜 선례만 남기게 됩니다.”
“예. 부회장님. 검찰에 고발해 법적인 절차까지 밟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안건은 홈플러스 운영에 관해서입니까?”
“예. 강운 무역은 삼디 물산으로부터 홈플러스를 인수, 운영을 시작했고….”
세부적인 운영이야 얼마든지 강운 무역에서 진행해 나갈 수 있지만, 마트의 영업 기조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김성우 사장이 원하는 것은 향후 홈플러스를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인지에 관한 큰 줄기였다. 이 부분은 경영진에서 결정할 수도 있지만, 상의가 우선이었다.
수안은 마트 운영에 큰 줄기를 이미 생각해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