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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결론 (182/304)

간단한 결론

박성호는 설마 하며 수안을 배웅했지만, 수안은 정말로 돈을 돌려주지 않고 사라졌다.

‘진짜로 그냥 갖고 가냐.’

“재벌이 뭐 그래? 몇 푼이나 된다고 정말….”

아쉽지만 이미 준 것을 돌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루를 마무리한 박성호는 퇴근하려다가 차 손잡이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트렁크를 열어 보시오.

“트렁크? 누구지?”

장난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다.

반신반의하며 차 뒤로 돌아가 키로 트렁크를 열었다.

덜컹.

본래 그의 트렁크에는 오래된 낚싯대만 있는 것이 정상이었다.

“억!”

트렁크에는 처음 보는 골프가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골프채 풀세트!”

가방에는 아이언과 드라이버, 우드, 퍼터까지 모든 세트가 들어 있었고, 박성호 사장의 발 사이즈에 맞는 골프화와 골프 장갑도 들어 있었다.

수안의 선물임은 따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방에도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연습하고 나랑 라운딩 한번 돌아봅시다. 골프장 사용료는 내가 낼 테니까 형수님 잔소리 들을 일도 없을 겁니다.

“푸흐. 형수님이라뇨. 부회장님.”

박성호의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이거 엄청 비싼 브랜드네. 이걸 어떻게 연습용으로 쓰냐. 하하하.”

수안이 가져간 비상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 * *

골프채를 품에 안고 집에 돌아간 박성호는 또 다른 선물을 확인했다.

“이, 이게 다 뭐야?”

“…부회장님이 보내셨어.”

집안 세간살이가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TV와 냉장고가 강운 전자에서 나온 최신형 제품으로 바뀌어 있었고, SJ 컴퓨터에서 나온 고사양 PC와 컴퓨터 책상도 거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펜탁에서 최근 출시한 휴대 전화도 식탁에 두 개나 놓여 있었다. 거기다 뉴월드 백화점 상품권을 봉투에 가득하게 챙겨 보냈다고 한다.

형수님 선물을 잊지 않은 수안이다.

“당신 들고 있는 건 뭔데?”

“골프채…. 이, 이거 내 돈 주고 산 거 아니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비싸 보이는 골프채였다.

“당신…. 대체 회사에서 얼마나 잘나가는 거야?”

“어, 어?”

“부회장님이 당신을 왜 이렇게 예뻐하는데? 부회장님 목숨이라도 구해 준 적 있어?”

“…….”

그런 적 없었다. 회사에 수안이 방문한 그 날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

“어쨌든! 앞으로 회사에 목숨을 바치란 말이야! 골프 칠 시간이 어딨어?”

“부회장님이 배워서 같이 가자고 하셨는데? 골프채도 부회장님이 선물해 주셨어.”

“…아. 그럼 열심히 해야지. 개인 지도부터 받아야겠네? 그치? 부회장님과 골프 치러 가는 거라면 업무라고 할 수 있잖아.”

“어, 어. 업무의 연장이지. 암.”

수안의 이름이 앞에 들어가면 뭐든 무사통과였다.

* * *

누구든 자신의 감정을 쉽게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와 같이 웃고 즐기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수안도 자신을 잘 감춰왔다고 믿었지만, 아내에겐 어림도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여보.”

“뭐가?”

“당신 요즘 우울해 보여요. 괜찮아요?”

“…….”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회사와 집을 오갔지만, 작은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드라마 복귀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남편의 표정에서 어색함을 느낀 아현이다.

“배 사장님께 연락해서 물어봤더니 아무 일 없었다고만 하고…. 나한테 숨겨야 할 일이라도 있어요? 지금 말하고 싶지 않으면 나중에 얘기해도 되고요. 당신이 말해 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게요.”

수안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그냥. 내가 좀 변했나 싶어서 그래.”

아현은 가만히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회사 일에 손대기 시작하면서 내 속에서 뭔가 조금씩 뒤틀린 것 같아.”

수안은 자신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는 것과 이후에도 자신이 얻은 것을 완벽하게 지키며 살아왔다는 과거 자신의 삶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주위에 나눈 것은 자신이 생각한 선 안에서 나눈 것뿐이라는 말도 더해졌다.

성인이 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돈에 매달렸다. 돈이 되는 일은 무조건 손을 대고 봤고 실제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하지만 더블 스타와 BE 인베스트먼트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들여도 돈에 집착하지 않았다. 집착의 대상은 따로 있었다.

“…돈은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가족에 대한 집착은 자꾸만 커졌어. 자꾸만… 자꾸만 집착이 커졌지.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 그리고 당신과 만나 결혼하고 우리 아이까지 태어나면서 이제 내 이기심이 괴물로 변한 느낌이야.”

수안은 마른세수로 양심을 콕콕 찌르는 감정을 털어내려 애썼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던 금용의 삶과 현재 수안으로 살아온 삶이 충돌하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은 가난하게 살았을지라도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피해 준 적은 없었다. 사채까지 써가며 밀린 고시원 월세를 낸 것도 같은 이유였다.

왜 도망치고 싶지 않았겠는가. 야밤에 얼마 안 되는 짐을 옮기고 몰래 도망치면 붙잡을 사람도 없었다. 금용은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끝까지 양심을 지켰다.

그 양심은 새로운 삶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수안으로 삶을 살며 사람들을 살린다는 명목 아래 삼풍 그룹 회장을 처리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사람 한 명을 죽임으로써 무고한 수백의 인명을 살릴 수 있었지만, 수안의 마음은 회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후 다단계 사업으로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두 사람을 사전에 처단했고, 마음은 더욱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북한의 차기 지도자를 처리하도록 이현창에게 신상 정보를 넘겼으면서도 이후엔 모른 척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본능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프랭크 골드만과 칼슨을 처리하면서 오히려 억울한 마음이 먼저 떠올랐다. 수진과 통화하던 수안의 마음속엔 그간의 위협을 갚아 준 것에 불과했다는 자기 위안이 오히려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내에겐 그동안의 살인에 관해 털어놓을 수 없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알아요. 당신이 가족을 얼마나 아끼는지.”

“…….”

“당신 지금까지 잘했어요. 아버님 어머님도 당신을 믿지만, 나도 당신을 믿어요. 게다가 정원이와 나현이가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당신은 좋은 남편, 아빠이기도 하고 좋은 아들이기도 해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난 당신 편이에요.”

아현은 수안의 손을 잡아 왔다.

“당신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우면 말해요. 회사 업무는 잠시 내려놓고 혼자 여행을 다녀와도 좋아요. 기분 전환이 되지 않겠어요?”

아내의 말대로 해 볼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회사 업무야 나 없어도 어찌어찌 돌아가겠지. 하지만 애들 보고 싶어서 그렇겐 못 하겠어.”

태어나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은 나현이와 아빠 바라기인 네 살 정원이를 놔두고 혼자 어딜 간단 말인가. 게다가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수안 자신이 그리워서 멀리 가진 못한다. 가끔 가는 출장도 아이들이 얼마나 눈에 밟히는지 모른다.

감정의 기복이 있어도 수안이 있어야 할 곳은 가족 곁이다.

“풋. 당신은 그런 사람이죠.”

“애들 보고 기운 얻어서 내일을 시작해야지.”

그래도 아이들을 떠올리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죄는 내가 떠안고 간다. 더럽고 힘든 일은 전부 내가 해야 해.’

세상이 자신을 살인자라고 손가락질해도 가족이 자신을 믿어 주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가장의 책임감이 양심의 가책까지 이겨내고 있었다.

“쳇! 이제 난 찬밥이네요. 애들만 중요해요?”

“곧 전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될 여배우께서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데?”

아내는 강운 그룹 산하로 들어온 SBS가 아니라 MBC 드라마로 복귀할 예정이다. 그것도 시청률 60%를 넘어설 명품 드라마 [동의보감 허준]의 중요 배역으로 복귀한다. 복귀작부터 엄청난 작품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남편의 관심은 다르죠.”

수안은 장난기 넘치던 태도를 버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아내를 보고 말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할게. 위로해 줘서 고마워 여보.”

“…내 마음이 잘 전해지긴 했어요? 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

“음. 그러고 보니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내가 뭐 더해 줄까요?”

“이따 애들 재우고 잠깐 볼까?”

아현은 수안의 가슴을 콩콩 치고 정원이와 나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안방으로 향했다. 그래도 마지막 대답은 잊지 않았다.

“…이따 봐요.”

“응.”

아내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수안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혼란했던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다.

‘금용으로 살아온 나도 나고 수안으로 사는 나도 나다. 살려야 할 사람은 살리고, 죽어야 할 놈이 나타나면… 또 죽인다.’

아주 깔끔한 결론이었다.

* * *

미국은 요즘 금융가 스캔들로 시끄럽다.

금융가의 스캔들이라면 돈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돈이 아니라 잔혹한 살인 혹은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수안이 상원 의원 오바마에게 전한 자료가 민주당을 통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된 모건 스탠리 잭 회장의 기사는 이제 타블로이드지가 아니라 주요 언론에 소개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1급 살인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게 될 경우의 법정 형량은 최소가 가석방 없는 무기 징역이고 최대 형량은 사형이었다.

게다가 잭 피에타 회장이 살인에 연루된 정황은 한 건이 아니라 여러 건에 이른다. 잭 회장이 연루된 살인 사건들이 언론에 자세히 소개되었기에 대부분의 미국 시민은 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잭 피에타 회장의 유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잭 피에타 회장의 첫 재판이 열리는 날엔 시민들이 법원 밖에서 잭을 사형시키라는 문구를 들고 시위하기도 했다.

이방효와 로버트 전 장관은 같은 자리에서 TV로 중계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잭 피에타 회장도 끝이군.”

“중요한 부분은 잭 피에타가 책임을 전가하는 부분입니다. 로버트.”

잭 피에타는 언론을 통해 살인은 자신이 아니라 골드만삭스의 프랭크 골드만이 자행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죽은 사람이니 거리낌도 없겠지. 프랭크 회장은 예전에 잭 회장과 피를 나눈 형제와 같다고 자랑했었네. 웃기지 않는가?”

“잭 피에타는 잘못된 선택을 했어요. 이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어야 합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살인 혐의를 자신의 입으로 자인한 셈이죠. 이제 잭 회장은 프랭크 골드만 회장의 연쇄 살인에 연루되었다는 혐의가 절대로 벗겨지지 않을 겁니다.”

잭 피에타 회장과 인터뷰한 기자는 BE 인베스트먼트의 사주를 받은 기자였다. 잭 피에타의 입에서 저 대답을 듣기 위해 질문 시나리오까지 짜 둔 상태였다. 잭 피에타는 BE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잭 회장과 BE 때문에 골드만삭스가 누더기가 되겠어.”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해야 할 골드만삭스다. 평판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골드만삭스는 물론이고 모건 스탠리도 마찬가지입니다.”

“BE는 어쩔 생각이지? 두 거대 금융사를 저렇게 시궁창에 처박아 버리면 BE는 무슨 이득이 있어?”

“스티븐 회장님은 골드만삭스가 향후 3년 이내에 모건 스탠리를 흡수하고 미국 최대 은행으로 성장하길 원하십니다. 기업투자와 증권을 중심으로 하는 골드만삭스에 글로벌 투자 은행인 모건 스탠리 그리고 향후 보험사를 추가하면 어떻게 될까요? 미국 최대 규모의 금융 그룹이 탄생하게 될 겁니다. 이 모든 과정이 5년 이내에 이뤄질 테고요.”

“……!!”

로버트가 생각지도 못한 비전이다.

그의 상상할 수 있는 한계는 골드만삭스 회장 자리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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