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이런 수안의 혼란스러운 감정은 다음 날 박성호 사장이 있는 운 테크에 가서 정점을 찍었다.
“오, 오셨습니까. 부회장님. 애들아. 얼른 인사해.”
“안녕하세요.”
“…….”
지호는 얼른 인사했고 유진이는 부끄러운지 고개만 꾸벅하고 오빠 뒤로 숨었다.
“우아. 지호와 유진이가 와 있었네요? 안녕? 너무 보고 싶었어. 얘들아.”
“애들이 꼭 아빠 회사에 와 보고 싶다고 해서…. 얼른 돌려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회사에 온 타이밍에 수안이 도착해 박성호는 안절부절못했다.
“아닙니다. 아빠가 사장인데 회사에 좀 오면 어떻습니까.”
성호의 아내가 화장실에 갔다가 들어와 수안을 확인했다.
“부, 부회장님?”
“형수님. 이제 알아봐 주십니까? 하하하.”
“아, 아휴. 형수님이라뇨. 편히 말씀하세요. 그땐 제가 뭣도 모르고 실수를 해서….”
수안의 뒤에 서 있던 장세진도 박성호 사장의 아내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예전에 과묵한 총각이라고 했던 그 직원이다.
“괜찮습니다. 실수라고 할 만한 일도 없었고요.”
“부회장님이 오실 줄도 모르고 외부인이 회사에 찾아와서….”
본인만 왔으면 모를까 아이들을 데리고 회사에 왔으니 남편에게 크게 잘못한 것 같았다. 아이들이 아빠가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보채서 데려온 것이 실수였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똑같은 소릴 하시네요.”
수안은 대화의 주제를 벗어나려고 장 비서에게 눈짓했다. 장비서는 손에 들고 온 물건을 얼른 탁자에 올려놨다.
“아이들에게 주려고 사 왔는데 마침 잘 오셨네요. 아이들이 좋아할 장난감으로 골라 봤습니다.”
“어머!”
지호와 유진의 취향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지호는 평소 어른스러운 척하지만, 변신 로봇을 좋아하는 제 또래 아이들과 같았다. 유진은 주방 장난감으로 소꿉놀이를 즐겨한다.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우아! 3단 변신 최종병기 블랙 그랜드파워 레인저다!”
“미미 주방 세트!”
“지호야. 이제 친구들하고 같이 놀 수 있겠지?”
“네! 현우한테 자랑할래요!”
지호는 친구 현우가 장난감 자랑을 하면 그렇게 속이 상했다고 한다. 예전에 지호와 친하게 지낼 때 알아낸 정보였다.
“영웅 그랜드파워 블랙! 완전 멋있어!!”
“미미는 음식을 잘해!”
수안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를 들으며 기이한 감정에 휩싸였다.
‘…왜.’
지호와 유진이에게 장난감을 선물하면 정말 뿌듯하고 기분이 좋을 줄 알았다. 예전엔 공책이나 연필 몇 자루를 사 준 것이 전부였지만, 이번엔 더 좋은 장난감을 사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안은 아이들과 함께 기뻐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순수한 아이들과 큰 거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의 검은 마음이 아이들에게까지 물들 것만 같았다.
‘나, 난 대체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었고, 아내와 부모님에겐 믿음직한 남편과 아들이 되고 싶었다. 그것은 수안의 바람일 뿐이었다.
수안은 자신의 이면이 악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순수하게 기뻐하는 아이들이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자신은 세상에서 짝을 찾기 힘들 만큼 못된 악당이었다.
“…….”
수안은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게 위협을 가했다지만, 너무 과했어.’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장난감에 빠져 있었고 수안은 자신의 과오에 빠져 있었다.
“…부회장님.”
“어. 장 비서.”
“방금 아이들이 인사했습니다. 고맙다고요.”
박 사장과 아내가 아이들에게 제대로 인사하라고 해서 인사한 참인데, 수안은 생각에 빠져 듣지도 못했다.
“그, 그래. 너희들이 좋다니까 나도 너무 기분 좋다. 나중에 이 아저씨가 또 선물 사서 집에 놀러 갈게. 알았지?”
““네에!””
박성호 사장의 아내와 아이들이 밖으로 나갔고, 장세진도 자리를 피해 박 사장과 수안만 남았다.
“고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수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의 박성호를 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답했다.
“박 사장님께 티가 날 정도입니까?”
“부회장님도 고민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고민은 저와 같은 소시민이나 하는 줄 알았습니다.”
“돈 많다고 고민이 없진 않습니다.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고민하기 마련이죠.”
박성호는 수안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박 사장님이 왜 소시민입니까? 이제 강운 그룹 계열사 사장인데요.”
“푸흐. 아마 우리 회사가 강운 그룹 계열사 중에 가장 작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건 인정. 급여도 제일 적으니 할 말이 없네요.”
안 그래도 박성호 사장의 급여를 동종 계열사 수준으로 맞추라고 지시해 뒀다. 주주 총회에서 결정된 운 테크 임원 보수 상한선 내에서 적당한 수준으로 결정될 것이다.
“하하하.”
수안은 박성호의 호쾌한 웃음을 따라 웃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웃고 싶어도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비틀린 미소만 보일 뿐이다. 박성호는 수안의 표정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가서 책 한 권을 빼내 왔다.
“무슨 고민이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책을 읽고 인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삶의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나오지 않겠습니까.”
박성호가 건네주는 책은 논어(論語).
‘또 논어를 주시네.’
수안이 박성호에게 이 책을 받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과거 금용으로 살던 때에도 박성호에게 논어를 받았다. 수안은 나름 정을 줬던 사람에게 받은 선물이라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후 현생에서 다시 논어를 읽기 시작한 이유도 박성호와의 추억 때문이었다.
“고맙습니다. 한 자 한 자 의미를 곱씹으며 읽어 보겠습니다.”
“부회장님께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수안은 책을 한쪽에 놓고 오늘 방문한 목적을 꺼냈다. 자신의 감정이 혼란하다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박 사장님 비서는 대체 언제 뽑을 겁니까?”
“비, 비서요?”
“아무리 작은 계열사라도 비서실 직원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오늘 여기 온다는 메모를 남기려고 해도 비서실이 있어야 남기죠. 안 그렇습니까?”
“아…. 음….”
박성호는 비서를 들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장으로 일하는 것이 처음이기도 했고, 자신이 조금 더 열심히 움직이면 비서까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다.
“예전의 회사 직원 중에 내보내고 싶지 않았던 퇴직 직원이 있으면 생각해 보세요. 이번 기회에 복귀시킨다는 명목으로 채용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까칠한 경리 송민희.
수안은 이 직원을 데려오게 만들려고 비서 얘길 꺼낸 것이다.
까칠하고 냉랭한 모습만 기억난다.
과거에 살면서 애인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민희는 금용의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애태웠다. 가진 것이 없어 용기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진 돈이 없다고 용기를 잃을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용기 내서 고백은 해 봤어야 하는데….’
“아!”
“생각난 직원이라도 있습니까?”
“예. 한 명 있습니다. 기존 경영진과 약간 트러블이 있었지만, 지금은 경영진이 다 나가고 없으니 다시 들어와도 좋겠습니다.”
수안은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경영진과 트러블이요? 그 직원 이름이 뭡니까?”
“송민희라고 경리부 여직원이 있었습니다. 트러블은 어쩌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본래는 업무 처리가 확실하고 숫자 감각도 있었던 친구라….”
수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안이 원했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행이네.’
첫사랑을 만나서 어쩌겠다는 생각은 아니다. 예전 민희가 사장의 불합리한 지시를 거절하면서 퇴직한 일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직원들이 퇴직하면서 미처 챙기지 못한 중도 퇴직 소득세와 주민세를 자신 통장으로 입금해 정리하라고 지시했지만, 민희는 모든 퇴직자에게 연락해 미지급 소득세와 주민세를 공지해 버렸다. 개별적으로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모인 금액이 수천만 원에 달했다.
이후 민희는 사표를 썼고, 마지막까지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사장의 법인 카드 사용 명세를 사내에 뿌려 버리고 나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장은 민희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아마도 똑 부러지는 성격의 민희가 사장의 또 다른 약점을 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 사장이 애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증거까지 있었을지 몰라.’
사장은 유부남이지만, 따로 애인을 두고 있었다. 술집에서 만난 여인이라고 들었다. 사장은 아주 완벽하게 숨기고 있다 여기지만, 사내 직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로 통용됐다. 민희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기면 사장에게 관련 증거를 사모님께 보내겠다고 했을 것 같다.
‘녀석이면 그러고도 남아.’
상념의 끝에 남아 있는 것은 굳은 얼굴의 박상호였다.
“…제 마음대로 채용해도 괜찮습니까?”
“박 사장님. 운 테크는 회사의 장인 박 사장님이 온전히 관리하는 영역입니다. 운 테크의 모든 것은 박 사장님이 결정해야 하는데, 누구 허락을 받으려고 물어보십니까? 회사를 책임지는 사람, 그 사람이 회사의 장입니다.”
“예. 부회장님. 회사 대표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기억하며 업무에 임하겠습니다.”
“맞습니다. 회사를 대표하는 일은 큰 책임이 따릅니다.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고 자신의 영달을 바라는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죠. 송민희 씨는 경영진과 트러블이 있었다고 하니 박성호 사장님도 긴장하며 지낼 수 있겠네요. 그런 직원이라면 저는 대찬성입니다.”
박성호는 따박따박 말대꾸하던 민희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다른 직원을 뽑고 싶어지는데요?”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으실 분은 아니지 않나요?”
박성호는 문득 궁금해졌다. 부회장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성향은 쉽게 알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일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정보가 어디까지 파악됐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강운 그룹 비서실에서 제 신상이 어디까지 파악됐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말씀하기 힘드시면 안 하셔도 되고요.”
“박 사장님이 평소 기억하지 못할 부분까지 전부 망라되어 있답니다. 예를 들면 골프를 좋아하지만, 골프채값과 라운딩 피가 비싸서 차마 엄두를 못 내고 있다는 것?”
예전 박성호와의 술자리에서 몇 번 들었다. 골프를 치고 싶기는 한데, 차마 시작하기가 힘들다는 푸념이었다. 박성호는 사장님이 없는 틈에 골프채를 들고 휘두르며 아쉬움을 달래곤 했었다.
“헙! 그걸 어떻게!”
“그리고 낚시를 좋아해서 가끔 월차를 내고 가족들 몰래 낚시 다녀온다는 것 정도?”
술자리뿐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들었던 일이다.
“크읍!”
“마지막으로 여기 책에 비상금을 숨겨 둔 일도 자주 잊어버리시죠.”
예전 박성호에게 받은 논어책에도 비상금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수안은 박성호에게 받은 논어책을 열어 비상금을 보여 줬다. 책 사이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배춧잎이 빳빳했다.
“아악! 내 돈!”
탁.
수안은 야속하게 책을 덮었다.
“이미 제 손에 들어온 돈은 나가지 않습니다. 재벌이 괜히 재벌인 줄 아세요? 들어온 돈은 쉽게 안 나가니 돈이 모일 수밖에요.”
박성호는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잘 쓰겠습니다. 동생 용돈 줬다고 생각하세요.”
수안은 정말로 돈을 돌려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중한 논어책은 옆구리에 단단히 끼워 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