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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 (180/304)

신혼여행

수안이 곤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가는 동안 수진과 상준은 공항에 도착해 쇼핑에 빠져 있었다.

“상준 오빠. 이것도 오빠한테 잘 어울리겠다.”

“오오. 역시 수진이 패션 감각은 기가 막히네.”

“호호. 내가 괜히 패션 기업에서 일하겠어?”

수진의 말에 미소를 보이던 상준은 곧 씁쓸한 얼굴로 변해 말했다.

“건설사 아들인 나는 우리 신혼집을 구했어야 하는데 말이야. 자꾸 자기한테 미안하네.”

결국 수안이 준 돈으로 거대한 집을 구한 수진이다. 상준도 처음 그 집에 갔을 때 거대한 집의 위용에 할 말을 잃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지금 가족이 사는 집보다 더 크고 화려했기 때문이다.

상준의 집에선 첫째 아들 결혼을 위해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것마저도 상준이 부득불 우겨서 진행했던 일이다. 새로운 집 덕분에 아파트는 전세를 주기로 했고 둘은 수안이 선물한 집에 신접살림을 차리기로 했다.

“집은 내 돈으로 샀나? 오빠가 결혼 선물로 준 건데 상준 오빠가 왜 미안해? 괜찮아. 괜찮아.”

“에효. 나중에 형님에게 얼마나 잘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오빠 장인어른이 두 분이라고 생각해. 형님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

상준은 어이없어서가 아니라 찰떡같이 잘 맞는 말이라 할 말을 잊었다.

상견례 자리에서도 장인어른이 되실 강운모 회장님만큼이나 수안이 어려웠었다. 동갑인 것은 분명한데 왜 수안 앞에만 서면 쭈구리가 되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 비행기 시간 남았으니까 빨리 움직이자. 살 게 많다고.”

“어, 어. 알았어.”

짧은 시간 쇼핑을 끝낸 둘은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둘이 앉는 좌석은 당연히 일등석이다.

“오예. 좌석 넓은데?”

“오빠. 라면 달라고 할까?”

“비행기에서 퉁퉁 부어서 내리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난 하나 먹어야지~”

“아…. 색시가 옆에서 쫄쫄 굶는데 서방이 라면을 먹겠다고?”

“크큭. 안 먹어. 이따 기내식이나 먹지 뭐.”

둘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준비된 차량이 둘을 태우고 호텔로 향했다. 이 역시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수진이지만, 상준은 살짝 어색한 얼굴이다. 옆에 앉은 수진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야.”

“왜. 오빠?”

“이후 일정은 자기가 잡아 놨다고 안 했나? 지금 어디로 가?”

이번 결혼에 큰돈이 들어간 부분은 오직 왕복 비행기 표가 전부다. 결혼식은 고려 호텔에서 했고, 자잘한 결혼 비용은 수안이 준 50억에서 집을 사고 남은 돈으로 얼마든지 가능했다. 대부분 결혼 비용을 수진이 알아서 처리했기에 상준은 이번 신혼여행 중에 어딜 방문하는지도 모르고 비행기에 올랐다.

“서방님. 나만 믿으라니까요. 내가 미국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그 얘긴 이미 질리도록 들었고요. 이제 도착했으니까 말 좀 해 주라. 너무 답답해서 그래.”

“아…. 사실은 나도 잘 몰라서….”

“몰라?!! 자기도 모른다고?”

그럼 지금 자신들을 태우고 가는 저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상준은 조심스럽게 수진을 품에 끌어안았다. 위험에서 색시를 보호하겠다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상준은 작은 목소리로 수진의 귀에 대고 물었다.

“그럼 저 사람들 누구? 자기도 몰라?”

상준 품에서 좋아죽겠다는 듯이 웃는 수진이다.

상준은 수진이 대답이 없어 눈을 돌렸다가 웃는 수진을 발견했다.

“뭐? 장난이야?”

“큭. 미안. 오빠.”

“에이.”

상준이 품에서 수진을 밀어냈다.

“흐흣. 그래도 내가 잘 모른다는 건 사실이야. 나도 이번 일정은 첫날과 마지막 날만 알지 중간은 몰라.”

“뭐? 그럼 계속 알지도 못하고 일정을 따라다녀야 해? 누가 일정을 짰는데?”

“BE 인베스트먼트에서 알아서 한다고 하더라고.”

“…BE? 그럼 이것도 형님이?”

“오빠는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는데, BE 인베스트먼트 미국 지사 사장님이 우리 신혼여행 일정을 맡겨 달라고 하셨나 봐. 우리 돌아오는 비행기는 일본 공항에서 출발하잖아. 거기선 BE 인베스트먼트 일본지사에서 맡아 준다고 하네?”

“허. 뭐야. 그럼 당신도 모르고 형님도 모르겠네?”

“호텔에 도착하면 브리핑해 준다고 했어.”

“오오.”

둘은 곧 호텔에 도착했고, 한국말에 능숙한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숙소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곧 방에 방문한 사람들을 만나 브리핑을 들을 수 있었다.

“미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는 앞으로 일주일 동안 두 분의 쾌적한 여행을 책임질 클락슨입니다. 일전에 우리 만난 적이 있죠?”

“반갑습니다. 클락슨.”

“아! 클락슨 씨. 오래전에 오빠와 같이 왔었죠? 잘 부탁해요.”

클락슨이 주변에 함께 들어온 인물들을 소개했다.

“여기 두 사람을 포함해 BE security에서 차출한 20명의 경호원이 항상 두 분을 보호하게 됩니다. 경호원들이 평소 근접 경호를 하더라도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여긴 한국이 아니라 미국입니다.”

“그래도 너무 심하게 자유를 강제하는 건 아니다 싶은데요….”

수진의 말에 클락슨은 추가 정보를 더했다.

“스티븐 강 회장님께서 그간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스티븐 회장님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살해 청부가 있었습니다.”

“……!!”

“……!!”

둘은 처음 듣는 말이다.

“일이 해결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해외 어디도 안심되지 않아 밀접 경호는 어쩔 수 없습니다.”

둘의 신혼여행을 수안이 책임지려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방효 사장과 차진호 사장의 생각도 같았다. 그래서 둘의 신혼여행에 참견하려 마음먹었고, 그 결과가 지금의 브리핑이었다.

“우, 우리 가족이 살해 청부 대상이었다고요?”

“예.”

“헙!”

상준도 깜짝 놀라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누가 그랬죠? 누가 우리 가족을!!”

“누굽니까! 누가 우리 수진이를!”

“이미 일은 해결됐습니다. 더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누군지만 알려 주세요. 아무리 해결했다지만, 안심하기 쉽지 않아요. 어서요!”

“살인 청부를 지시한 최종 혐의자 둘이 있었고 둘은 사망했습니다.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 둘이 죽었다는 말에 수진은 머리칼이 쭈뼛했다.

“사, 사람이 죽어요? 누가…. 누가 죽였죠?”

‘설마….’

수진은 자신의 오빠가 일을 지시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 명은 자연스럽게 병으로 사망했고, 한 명은 친구를 잘못 사귀고 은닉 자금 차지로 다툼을 하다 사망했습니다.”

“아.”

“일이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알겠어요.”

“그럼 경호는 이해하셨다 판단하고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두 분의 일정은 휴양과 관광을 편안히 즐기는 일정입니다. 중간에 항공편을 이용하셔야 하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

브리핑이 끝나고 수진은 집에 전화를 걸어 잘 도착했다고 연락했다. 상준의 집에도 연락을 끝내고 나서 오빠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어. 수진아.

“나 잘 도착했어.”

-다행이네. 푹 쉬고 재미있게 놀아.

수진은 클락슨에게 들었던 사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모르는 사이에 큰일 있었더라? 언제 우리 가족이 그런 위험에 노출됐어?”

-클락슨에게 들었어? 미안하다. 내가 잘 처신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엉뚱한 놈들이 있을 줄도 몰랐고…. 아버지께는 미리 말씀드렸었다. 덕분에 아버지도 한참 귀찮은 일을 겪으셨지.

“…그래도 고마워. 우리 모르는 사이에 가족을 지키느라 오빠가 수고했겠어.”

-너도 이제 결혼했으니까 잘 기억해. 네 인생에서 첫째는 바로 너고 다음은 가족이야. 네가 결혼해서 남편이 생겼으니 서로 감추는 일 없이 열어 놓고 의지하면서 살아.

“오빠가 할 말은 아니지. 중요한 일은 가족에게 맨날 숨겨 놓고선.”

-…….

BE 인베스트먼트를 숨겼던 일이 크긴 컸다.

아버지께 강운 그룹 사장단을 몰래 이끌어온 일도 말할 수 없었다.

수진의 말처럼 수안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우리를 위협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죽었다는 얘기도 들었어. 난 계속 이렇게 알고 있을 거야. 내 오빠는 누구보다 가족을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매우 착실하고 선량한 사람이거든.”

-…….

수십 년을 한집에서 살아온 가족이다. 수안이 가족을 위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한 살 아래 동생인 수진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고 조그맣게 의심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일이다. 여동생 수현이가 중학교 1학년에 다닐 때 수현에게 추근거리던 남학생 중에서 한 명이 며칠 뒤 학교에 나오지 못한 일이 있었다. 좋아한다는 고백 수준이 아니라 협박 수준으로 위협을 느꼈다는 수현의 고자질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중학교 선배도 아닌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수현이 강운가 딸인 것을 모르고 실수를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수현이 고자질을 할 때 남학생이 다니는 학교와 이름을 언급한 것은 더 큰 실수였다.

학교에 나오지 못한 남학생이 있는 곳은 병원이었다.

의사는 전치 10주 이상의 진단을 내렸는데, 팔과 다리의 뼈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부서졌다고 했다.

아무도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다. 경찰은 나중에 정신을 차린 학생으로부터 어두운 곳에서 후드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진술만 얻을 수 있었다.

경찰은 진술을 토대로 큰 키의 용의자를 특정했지만, 어디서도 용의자를 찾지 못했다. 큰 키만 갖고 용의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수진은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오빠가 늦은 밤 후드를 눌러 쓰고 달리기를 한다며 나갔다 돌아온 어느 날. 오빠 몸에서 녹슨 철 냄새가 났었다. 그게 피 냄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제 오빠는 결혼해서 아내와 아이까지 있는 몸. 가족을 향한 살해 위협이 있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확신은 없지만, 더 이상 오빠를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오빠는 그럴 사람이 아냐.’

하지만 다른 위협이 남았을지 걱정해서 물었다.

“이제 진짜 위험은 없는 거지? 오빠도 괜찮은 거고?”

-…그래. 다 해결됐어. 그런데 정말 우연일 뿐이야.

수안은 정말 억울했다.

“그거면 됐어. 오빠는 선량한 사람이니까.”

-…너 신혼여행이잖아. 마음 무거운 생각은 지우고 편하게 쉬어.

“오빠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어. 세상에 악당은 전부 사라졌겠지?”

-악당은 무슨 악당.

“미국에서도 오빠의 흔적이 느껴져서 좋아. 완벽하게 보호받는 기분이야.”

-클락슨이 하라는 대로 일정 다 맞출 필요 없어. 가고 싶은 관광지가 있으면, 언제든 일정 바꿔 달라고 해.

“큭. 알았어. 오빠.”

수진은 오빠와 통화를 마치고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놨다. 이제 신혼만 즐겁게 즐겨도 좋을 것 같았다.

* * *

“…….”

수안은 수진과 통화를 끝내고,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진짜로 내가 안 했는데….’

프랭크 골드만은 로버트가 처리했다.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수안이 중간에 역할을 하긴 했으니 그래도 반쯤은 혐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칼슨의 경우 죽일 생각도 없었는데, 드레이크의 오해를 불러와 살인으로 이어진 것이 원인이다. 수안은 칼슨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저 둘이 다투거나 거리가 멀어지는 걸로 충분하다 생각했었다.

“그나저나 얘는 지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아주 작은 의심일 뿐이었지만, 죽이지 않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하니 무척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곧 자신에게 놀라게 됐다.

‘…내가 그랬잖아. 전부 내가 계획한 일이잖아.’

수안의 양심은 예전부터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지킬 것이 많아져 자꾸만 잔인하게 변하는 것이다. 남의 손을 빌려 처리한 일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었다.

프랭크 골드만의 처리는 아무리 로버트가 행했어도 자신의 계획이다. 확실하게 수안이 주범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칼슨의 일도 다르지 않았다. 서로 다투고 끝날 거라는 예측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수안의 생각 깊은 곳에 이번 결과와 비슷한 예상이 있었다. 속았다고 생각한 드레이크가 칼슨을 처치할 수 있다는 가정은 분명 수안의 기억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수안은 칼슨이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결국 전부 내가 한 일이야. 내가 바로 살인자야.’

그만큼 새로운 삶에 길든 탓이다. 예전엔 사람을 살린다는 대의만 갖고 위험을 감수했지만, 지금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남의 손으로 실행한 살인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알아서 감춰 주니 더욱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

수안은 스스로의 양심까지 속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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