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디스 (179/304)

하이디스

“난 진정으로 우리 직원들과 가족들을 생각해서….”

“들통난 감성팔이는 그만두시고, 다시 일 얘기로 돌아갑시다. 지금 해외 자동차 업계에서도 저희 기술을 웃돈 줘서라도 사려 합니다. 기화 자동차와 부품사는 당연히 철통 방어를 하는 상황이고요.”

“그렇겠지….”

특히 중국에 관련 기술이 알려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중국엔 핵심 부품 생산 공장도 지을 생각 없었다.

“기화 자동차의 기술을 함께 지켜 주신다면 대현 자동차에도 일정 부분 부품 사용을 허락할 수 있습니다.”

“……!!”

“물론 관련 부품은 사전에 저희와 협력사, 대현 자동차가 삼자 협상을 통해 납품하는 방식입니다. 기화 자동차의 허락 없이는 부품이 출고되지 않을 겁니다. 안전장치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정도야 물론이지! 나 같아도 그렇게 할 거야.”

“가격은 기화가 납품받는 금액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래야 저도 임원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흠. 너무 비싸지 않게만 해 주게.”

“미리 말씀드리자면, 대부분의 핵심 부품은 기화 자동차 연구 개발팀이 직접 고안하고 발명했습니다. 부품 협력사는 연구 개발팀에서 만들어 달라는 대로 만들어 줍니다. 그게 전부죠. 사용료는 협력사에서 본사로 지급하는 형태입니다. 이 부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개발자의 수고비를 줄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못 깎아 준다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하는군.”

대부분의 협력사 사용료는 수안의 주머니로 들어온다. 모든 개발품의 핵심 개발자가 수안이기 때문이다. 작동 원리와 이로 인한 결과물의 디자인까지 대부분 수안의 머리에서 나왔고, 개발자는 수안이 시키는 대로 숙제를 해결했을 뿐이다. 수안과 개발자의 관계는 연구 개발팀과 협력사의 관계와 비슷했다.

그래도 정 회장은 긍정적인 답이 나왔다는 것에 절반의 성공이라 자평했다.

“주긴 준다는 뜻이지?”

“어쨌든 필요 기술은 기화 자동차에 협조 공문으로 발송하시고, 내부에서 검토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최대한 많은 기술을 공동 사용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야 국내산 자동차가 해외에서도 인정받지 않겠습니까?”

수안이 정영수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중의 하나가 해외 시장 진출이다. 해외에 나가면 둘은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손을 잡아야 했다.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 양해 각서)부터 체결하고 시작하는 건 어떤가?”

“저도 회사에 가서 임원들하고 논의는 해 봐야죠. 왜 이렇게 급하세요?”

“그만큼 마음이 급하니 그렇지.”

“알았으니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이제 할 말은 끝입니까? 저 오늘 온종일 돌아다녀서 집에 가고 싶은데 말입니다.”

“제일 중요한 안건이 남았네.”

“제 체력이 일반인과 같았으면 벌써 곯아떨어졌을 겁니다. 요약해서 빨리 말씀하세요. 5분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5분 지나면 저 일어납니다.”

수안은 진짜로 시계 분침을 보며 시간을 재고 있었다.

“일전에 강 부회장과 논의한 쌍륭 자동차. 우리가 인수하겠네! 자금이 부족해! 2조 원 대출 부탁하네.”

“…얼마요?”

“정확하게 2조. 이 자금이 필요해.”

수안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쌍륭 자동차 부채가 대체 얼마여서 2조가 필요합니까?”

“거의 5조에 육박해. 대출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지금은 인수 금액이 더 시급해. 자체적으로 조달한 금액도 있지만, 대출은 필수적인 상황이란 말이네. 해외 은행에서 거액의 대출을 일으키려면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1년 반 전에 3조 원 정도였던 부채가 그사이 5조 원까지 불어났음이다.

수안은 고개를 들고 잠시 계산했다.

‘누굴 빙다리 핫바지로 보시나….’

쌍륭 자동차를 인수하는 데 생길 문제는 대출이 전부다. 그것도 부실 채권으로 분류되는 쌍륭의 거대한 부실 채권만 해결할 수 있으면 인수는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그리고 최근 대현 그룹이 흔들리고 있다지만, 예전부터 재벌 그룹 최상위에 랭크되어 있었던 저력이 있는 기업이다. 문어발식으로 확장한 계열사가 아니라고 해도 전통의 대현건설은 많은 일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도 아예 대출을 뺄 필요는 없지.’

“좋습니다. 6천억까지는 씨티 은행에 얘기해 보죠.”

“6천억이라니! 2조가 필요하다니까!”

“남의 돈이라고 막 쓰지 마십시오. 분명 정택주 회장님이 쌍륭 그룹 회장을 만나 적당히 후려치셨을 줄로 압니다. 두 분 만났다는 것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고요.”

강운 그룹 비서실과 더블 스타 비서실이 동시에 운용되고 있었고, 여기에 국정원의 정보망까지 장세진을 통해 한 다리 걸치고 있었다. 수안은 상당히 많은 정보를 미리 접하는 편이다.

“…….”

도무지 수안을 속일 수가 없었다. 2조를 대출받아 회사 자금을 최소한으로 소진하고 쌍륭 자동차를 인수하려 했는데, 이대로 가면 인수 계획이 다 틀어진다.

“부채가 5조 원이라도 일정 부분은 쌍륭 그룹이 떠안기로 했을 겁니다. 대현 그룹은 국내 도급 1순위의 초대형 건설사이니 쌍륭에서 생산하는 건축 자재를 납품받는다는 조건을 걸었겠죠. 아니면 쌍륭이 무너질 판이지 않습니까? ”

‘젠장. 이건 또 어떻게 알았어? 누가 끄나풀이야?’

수안의 말이 정확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수안은 정영수 회장의 표정을 읽으며 말했다.

“추측이니까 애먼 사람 잡지 마십시오. 정보만 있으면 누구나 이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까지 읽었어?”

수안은 정 회장의 말을 무시하며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뭐 하러 거액의 대출을 받습니까? 이런 식으로 부채 늘리면 정부에서 요구하는 그룹 부채 비율 200%를 못 맞춥니다.”

“부채야 이쪽에서 알아서 맞추면 돼. 조만간 CB 발행도 계획하고 있으니까.”

“그러지 마시고 여러 계열사 몇 개 정리한 돈으로 쌍륭자동차 매입하세요.”

“계열사?”

“GL 반도체 인수하고 지금 대현이 휘청거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계열사 팔려고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들리던데, 제가 헛소문을 들었을까요?”

김대준 정부에서 재벌의 구조 조정 방안으로 재벌 기업 간 사업 교환, 소위 빅딜이라고 불리는 사업 맞교환 정책을 실행했다. GL은 사업 맞교환 정책으로 반도체 사업을 대현에 넘겨야 했다. 대현 전자는 GL 반도체 인수 금액에 허리가 휘고 있었다.

“그거야 대현 그룹에서 할 일이지. 내가 무슨 상관….”

“그룹 공동 회장님이 되신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세요?”

“다 양보하라며?! 동생에게 다 맡겨 두고 있단 말이야.”

“이번엔 목소리 좀 내세요. 하이디스 매각하면 그 자금은 자동차에서 가져가겠다고 하세요.”

“팔리지도 않는 하이디스 얘길 뭐 하러 꺼내나? 언제 팔릴 줄 알고 그걸 기다려?”

“…흐흣.”

수안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정영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강 부회장이 사 줄 거야?”

수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수안은 하이디스를 살 생각이다.

“오!”

천덕꾸러기 사업부를 정리하고 돈을 마련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나설 수 있었다.

“정 회장님이 전면으로 나서서 안 팔리는 사업부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세요. 그룹에서 인기가 조금은 더 올라가겠습니다. 왕 회장님도 오랜만에 아들이 회장 노릇을 한다고 좋아하시겠네요.”

수안이 하이디스를 인수하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자동차 이후에 시작할 디스플레이 산업 때문이다. 하이디스는 TFT-LCD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핵심 디스플레이 기술을 여럿 보유한 기업이다.

새로운 핵심 기술의 적용 방향은 대운 자동차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번에 대운 자동차를 인수하며 차량용 페인트 제작과 채색 기술도 기화 자동차와 공유할 수 있었다. 아직 대현은 15겹의 페인트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대운 자동차는 무려 20겹에 가까운 기본 페인트층을 형성한다. 기술의 차이는 품질로 나타난다. 경쟁 차종은 페인트 속에 녹이 생기는 일이 많지만, 대운 자동차는 녹이 생기지 않고 윤기를 오래 지속시키는 채색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를 기화 자동차와 강운 자동차에 적용해 품질 경쟁력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

이처럼 하이디스의 핵심 기술을 강운 디스플레이에 적용하면 LCD 기술의 진보를 불러올 수 있었다.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있으니 좋은 기회라 여기고 얘길 꺼낸 것이다.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이후 하이디스가 국내 업체가 아닌 중국 업체에 팔려나가게 되면 엄청난 기술 유출이 시작된다.

중국에 LCD 디스플레이 시장을 내주는 시발점이 바로 이 하이디스였다. 김대준 정권의 크나큰 정책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수안은 이를 막으려고 하이디스를 인수하겠다 결정했다.

“디자인 값이 아깝지 않구먼!”

“그럼 900억 채워 주시면 되겠네요.”

“그건 좀….”

“농담입니다. 대현 하이디스의 가치 평가나 잘해 주세요. 후려치진 않겠습니다. 적당한 가격이면 됩니다.”

‘그래놓고 또 후려치겠지. 놈은 손해 보고 넘어갈 놈이 아니야.’

수안은 정 회장의 믿기지 않는 표정을 보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저 사람은 이제 날 너무 잘 알아. 앞으론 가끔 만나야겠어.’

괜히 진짜로 900억을 내준다고 하기 전에 얼른 대화를 끝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하이디스를 인수할 때 다시 가격을 후려칠 수 있었다.

“얘기 끝입니까? 이제 나머지 자세한 논의는 나중에 다시 하죠. 오늘은 피곤해서 안 되겠습니다. 5분이 아니라 20분도 더 지났네요.”

“그래. 그래. 어서 들어가. 나도 이제 허리가 뻐근한 참이야. 아! 그래도 6천억 대출은 유효한 거지?”

“받지 마시라니까요.”

“그 정도는 괜찮아.”

“알겠습니다. 6천억 대출은 얘기해 두죠.”

마무리가 나쁘지 않았던 탓에 정 회장과 웃으며 악수하고 헤어질 수 있었다.

수안은 차에 올라 피곤한 몸을 옆으로 푹 뉘었다. 온종일 동생 결혼식에 온 손님들을 맞이하며 진을 뺐더니 기절하기 직전이다.

“괘, 괜찮으십니까?”

놀란 운전기사가 뒤를 돌아봤지만, 수안은 그저 눕고 싶었을 뿐이다.

“피곤해서 그럽니다. 얼른 집에 갑시다.”

“아…. 예. 부회장님.”

“아니다. 잠깐!”

수안은 다시 뉘었던 몸을 일으켜 차 문을 열고 나왔다.

깜빡한 일이 있었다.

밖에는 수안을 배웅하는 강운 그룹 지원팀 직원들이 여럿 있었다.

오늘 결혼식을 돕기 위해 차출된 인원들이기도 했다. 강운 그룹 맏딸의 결혼식인 만큼 많은 방문객을 호텔의 서비스에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안은 품에 준비해 놨던 봉투를 여럿 꺼내 맨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맡겼다.

“최 팀장이 수행할 마지막 임무입니다. 수고한 직원들과 인별로 똑같이 나눠주세요. 오늘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차 시트에 몸을 뉘었다가 품에서 준비했던 봉투의 감각을 느낀 수안이다. 오늘 강운 그룹 지원팀 직원들이 고생할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 뒀었다.

“아, 아닙니다. 부회장님!”

“이런 날은 그냥 받아도 됩니다.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이렇게 개인적인 이유로 써먹었으면 보상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야 내 맘이 편해요. 괜히 회식한다고 고생한 직원들 붙잡지 말고 돈 나누면 바로 집으로 보내 주세요. 부탁합시다.”

수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차에 올라 누웠고, 차는 부드럽게 출발해 고려 호텔을 빠져나갔다.

“얼마나 주셨어요? 팀장님?”

“어디 보자~~ 오오! 우리 부회장님 손이 엄청나게 크네!”

봉투 하나에 십만 원권 수표로 50장이 들었다. 네 개의 봉투에 2천만 원. 오늘 수고한 직원들의 보너스로 넘치게 충분한 금액이다.

“오늘 고생한 기억이 눈 녹듯이 사라지네요. 흐흐흐.”

“가서 직원들 다 모아! 모이면 분배 시작하자!”

“옙!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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