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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협상 (178/304)

피곤한 협상

“이쪽입니다.”

고려 호텔 숙소를 빌려 장소를 마련한 것은 칭찬해 줄 일이다. 덕분에 먼 거리를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수안은 반갑게 정 회장과 악수하며 말했다.

“정 회장님. 가족도 아닌데 오래 남아계셨네요? 한참 전에 가신 줄 알았습니다.”

“나야 매일 강 부회장을 기다리는 사람이니 익숙하지. 편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네.”

“…….”

정 회장이 보통 때보다 저자세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뭐지? 음…. 아. 맞다!’

“혹시 특허? 제가 깜빡하고 디자인 특허를 양도하지 않았네요. 제가 이렇게 정신이 없습니다.”

“그걸 이제야 기억하나? 우리 직원들이 디자인 특허 냈다가 혼비백산했잖아.”

그랜저 HG 디자인을 내주기 전에 직원들이 디자인 특허를 신청해 놨음을 잊고 있었다.

“해당 디자인 특허는 직원들에게 지시해 대현에 양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고. 이번에 알았는데 그거 말고 비슷한 디자인 특허가 꽤 있던데 말이야.”

대현 자동차 디자인팀은 유사 디자인으로 2천cc급 중형차와 그 이하 아반떼에 적용할 특허를 출원했지만, 너무 유사한 디자인 특허가 있어 반려된 상황이었다. 수안은 하나의 디자인으로 항상 패밀리 차종 디자인까지 구상하기 때문에 관련 디자인은 여러 종류의 차종에 망라되어 있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양도한 차량 디자인은 분명 하나였는데 말입니다.”

정 회장은 괜히 먼 산을 보며 말했다.

“비슷한 디자인으로 다른 특허를 내려고 했는데 유사 디자인이 이미 등록되어 있다질 뭔가. 그래서 알았지. 전부 넘겨주게.”

맡겨 놓은 물건을 찾듯이 말하는 정 회장이다. 수안은 어림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건 얘기가 다르죠. 제가 드린 디자인은 그랜저 XG급에 적용할 준중형 디자인이었어요. 그 외에 다른 차종 디자인은 거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결이 다른 사항입니다.”

“그럼 이번 기회에 다 같이 양도하면 되겠네.”

“그 디자인들은 조만간 강운 자동차에 써먹으려고 했는데….”

“디자인이 그렇게 비슷한데 강운 자동차에서 출시하려고? 사람들이 오해해 이 사람아.”

수안은 잠시 팔짱을 끼고 고심했다. 정 회장의 말대로 대현의 새로운 그랜저가 나오면 강운 자동차의 유사 디자인은 하위 호환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나머지는 준중형 이하의 중형차와 소형차였기 때문이다.

“생각할 게 뭐 있어? 좋은 값에 넘기고 강운 자동차는 새로 디자인하면 되잖아.”

“돈 준다면 마다할 제가 아니죠. 하나는 아닐 것이고…. 두 개 맞습니까? 중형과 소형.”

“…맞아. 소나타와 아반떼에 들어갈 디자인이야.”

“디자이너들 실력이 상당하네요. 하나를 줬더니 둘을 더 뽑아냅니까? 그것도 저와 비슷한 디자인을?”

“우리 디자이너들이 어디 가서 부족하다 소릴 들을 인재들은 아니야.”

대현의 디자이너 중에 본래 이 디자인을 고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수안은 미래에서 훔쳐 왔을 뿐이고 진짜 주인은 바로 대현이었다.

“어쨌든, 남은 건 가격 협상이네요. 그렇죠?”

“그렇지….”

“좋은 값을 받으라고 하셨으니 기대해도 됩니까?”

“…흐음.”

정영수 회장은 이어서 아쉬운 소리를 또 해야 했기에 말을 줄였다.

“회장님. 오늘 무척 기운이 없으십니다. 빡빡 소리치던 정 회장님이 그리운데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어휴. 괜한 걱정이었네요. 얼마나 생각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회장님 말씀부터 듣고 제가 생각한 가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강 부회장이 먼저 얘기해 주면 안 되나?”

“에이. 제가 너무 높게 부르면 정 회장님 마음만 상하지 않겠습니까. 일전엔 사장 시킬 마음을 먹었던 디자인이라 저렴하게 드렸으니, 이번엔 제대로 치러주시겠거니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훔쳐 온 디자인을 원주인에게 또 팔아먹게 생겼다.

“끄응.”

지난번 300억보다 낮은 금액을 생각했던 정 회장이다.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 디자인했는데 말이야….”

게다가 이번엔 대현의 디자이너들이 직접 고안했다가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지난번보다 더 많은 돈을 주기가 너무 아까웠다.

수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나오는 말은 긍정이 아니라 부정이었다.

“다들 그런 경험을 합니다.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판단해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면 누군가 벌써 사업을 진행하고 있죠. 먼저 나서서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임자 아닙니까? 게다가 원래 디자인은 누가 줬는데요? 제가 고안한 디자인 아닙니까. 그걸로 파생된 디자인이면 당연히 제 디자인이 맞죠. 디자인 특허가 제 소유인데 이제 와 나도 생각해 냈다며 지분을 주장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수안은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이 정 회장의 반발을 원천 봉쇄했다.

“금액이나 불러보세요. 제가 후하게 협상하겠습니다.”

“후하게? 저렴하다고 말해야 맞지.”

“저렴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좋은 값 받으라는 분은 방금 여기 계셨는데 말이죠.”

“…….”

수안은 가격을 깎을 수 없도록 또 말을 보탠다.

“있는 창의력 없는 창의력 다 끌어다가 제대로 된 디자인을 뽑아냈는데, 이걸 저렴하게 넘길 수 있나요? 게다가 강운 자동차의 미래를 그려나갈 수도 있었던 차량 디자인입니다. 절대 헐값에 넘길 생각은 없어요. 강운 자동차의 미래일 수도 있었던 디자인이란 말입니다.”

정영수 회장은 추가로 부탁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까마득했다.

‘이거 말고도 더한 부탁이 있는데, 여기서부터 이렇게….’

신차를 개발하며 특별하게 요청한 내용이 있었고, 정 회장이 호기롭게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나선 참이다.

“마음 놓고 지르세요! 제가 “억!”하고 놀랄 만큼 말입니다!”

“이익!”

정 회장은 수안이 밉상이라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기, 기존과 똑같이 가자고! 300!”

정 회장의 마지노선이다. 더 낮은 가격을 생각하고 왔지만, 수안의 태도를 보고 가격을 올린 것이다.

“지금부터 지루한 대화가 시작되겠네요. 체력은 충분하시죠?”

“…….”

기운이 쭉 빠지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차가 작아질수록 마진이 적단 말이야. 디자인에 수백억을 쓰면 다른 개발비용은 어쩌라고?”

“소나타는 전 국민이 애용하는 국민차 아닙니까? 아반떼는 특히 더하죠. 동급 차량 중에 최고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작을수록 많이 팔리죠. 가격이 저렴하니까요. 마진이 적어도 남는 게 많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K-5에 국민차의 아성을 넘겨줬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소나타는 대중의 가장 높은 선호도를 보였다. 그랜저의 경우 성공한 사람의 차라는 인식이 있어 정말로 잘 팔렸다. 아반떼는 중고로 나와도 쉽게 가격이 내려가지 않는 모델이다.

“게다가 그 작은 마진이 다른 대현 자동차 차종에 비해서 적다 뿐이지. 작은 마진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이번에 K시리즈 팔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고작 몇십만 대나 팔렸다고 이익이 어마어마하게 늘더군요.”

“요즘 K시리즈에 전부 밀린 거 몰라?”

“지금까지 번 돈은 다 까먹으셨습니까? 그리고 이미 책정된 개발비에 몇백억 더 올린다고 크게 표 안 납니다.”

“…….”

그렇게 비용을 키우는 것은 총수 일가의 비자금을 만들 때나 사용하는 방법이다.

“각각 420억. 이걸로 끝냅시다. 회장님. 디자인 하나당 500억은 받고 싶었는데, 저도 크게 양보했습니다.”

“휴우….”

가격 협상에서 끌려갈 수밖에 없음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디자인 특허까지 직접 확인한 다음이었다. 다른 사람의 특허라면 얼마든지 유사 디자인으로 우회하거나 법적인 소송으로 승부할 수 있었지만, 이젠 대현보다 재계 서열 윗줄인 강운 그룹에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회사 망하지….’

집요한 수안의 성격을 생각하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었다. 정 회장이 생각에 잠긴 사이 수안은 한술 더 떠서 가격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420억은 너무 저렴해요. 조금 더 쳐 주시면 안 됩니까? 450억이면 좋겠습니다. 두 대니까 딱 900억이네요. 숫자 참 예쁘죠?”

“이봐! 수안이! 깎아 주지는 못할망정 왜 더 올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싸다 싶어서 그러죠. 900억은 받아야 그 디자인 가치를 최소한이라도 보상받는 것 같단 말입니다.”

“400!!”

“이왕 쓰시는 김에 조금만 더….”

“400! 두 개에 800억. 끝! 이 이상은 절대로 불가능해! 돈 없어!”

애초에 400억을 생각했던 수안이다.

‘얼씨구 좋구나~’

“아…. 안 되는데….”

“이미 끝났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고!”

수안은 다음이라는 말에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네? 하실 말씀이 또 있어요?”

“내가 고작 디자인만 갖고 지금까지 강 부회장을 기다렸겠어?”

“정 회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예상하기가 힘드네요. 우선 듣겠습니다. 말씀하세요.”

“…….”

정 회장은 몇 초간 할 말을 다시 정리하고 입을 뗐다.

“일전에 내가 대현 서비스 센터 공유와 부품사 공유에 관해서 얘기했잖은가.”

“아. 예. 그러셨죠.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은 것 같아서 미루고 있었습니다.”

기존 기화 자동차 중요 협력사를 재건했기에 크게 아쉽지 않았다. 그리고 K시리즈에 워낙 특별한 부품이 많아 함부로 외부 업체와 부품사를 공유할 수 없었다.

“…K시리즈에 들어간 부품. 우리도 쓰게 해 줘.”

“네?”

개발팀에서 무조건 성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 회장도 당연히 가능하다고 장담하고 나왔다.

“K시리즈에 들어간 첨단 장비들 말이야. 그거 우리 대현도 좀 같이 쓰자고.”

K시리즈는 아름다운 디자인이 전부가 아니었다.

기화 자동차와 대현 자동차의 판매량을 뒤집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기화 자동차에 대거 적용된 첨단 부품이다.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차량을 사이드미러로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센서와 차량 내부 전면에 아름답게 비춰 주는 HUD 헤드업 디스플레이는 지금까지 출시된 차와 K시리즈를 차원이 다른 차로 만들어 줬다. 이 외에도 다수의 첨단 기술이 새로 적용되어 있으니 사람들 눈이 뒤집히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전 국민의 가슴에 뽐뿌가 오게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번엔 맨입으로 부탁하는 거 아니야. 사용료를 내라면 낼 것이고, 지정 부품사를 이용하라면 그렇게 하지.”

“맨입이고 뭐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이번에 K시리즈에 적용된 최신 사양들은 향후 5년간 공유하지 않습니다. 이미 기화 자동차에서 내부적으로 결정된 사항입니다.”

관련 기술의 공유를 원하는 것은 대현 자동차뿐이 아니다. 해외 자동차 업계에서도 너도나도 러브 콜을 보내고 있었다. 수안이 직접 연락을 받지 않아서 그렇지 내부에선 관련 부서 직원들이 전화기 벨 소리만 들어도 경기할 지경이란다.

“…이봐. 강 부회장. 부탁 좀 하세. 이러다 대현 자동차 직원들이 다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단 말이네.”

“…….”

수안도 마음에 걸리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것도 아닌 기술과 디자인을 마음대로 훔쳐 써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술과 디자인으로 돈을 벌었는데, 정작 본래 기술과 디자인을 개발해 사업을 영위하던 회사가 힘든 지경이라는 말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했다.

“자네와 경쟁해 보기도 전에 회사가 먼저 무너질 판이야.”

“정 회장님.”

“내가 얼마나 절박했으면 몇 시간이고 자넬 기다렸겠나. 기다리는 시간이 하나도 지겹지 않았어. 내가 고개를 숙여 회사를 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숙이겠네.”

“…회장님.”

“그래. 말해 보게.”

“설정이 너무 과하셨어요. 아까 길바닥에 직원들 나앉는다고 한 말까지가 좋았는데 말입니다. 그런 건 동생분에게나 써먹으세요. 저한테는 쉽지 않습니다.”

“큼.”

정영수 회장은 태생부터 대감 집에서 태어난 도련님이다. 귀하게 자랐다는 뜻이다. 거기다 욕심은 많고 고개는 뻣뻣한 사람이었다. 직원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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