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대비
드레이크는 칼슨의 꼬리를 잡았다.
칼슨은 숨겨놨던 자금을 찾아 한껏 자신을 꾸미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양복에 번쩍이는 시계를 차고 있었고 방금 내린 차는 보통 차보다 커다란 리무진이다. 유명 레스토랑을 예약했고 그의 새로운 파트너인 젊은 여성은 안에서 그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칼슨은 대범하게도 자신의 모습을 훤히 드러냈고, 주변을 지키는 인물도 고작 두 사람에 불과했다. 드레이크는 칼슨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내게 사기를 쳤다면 더 멀리 도망쳤어야지.’
망원 스코프에 녀석의 가슴이 선명하다.
‘잘 가라 멍청이. 죽어서도 돈을 쓸 수 있을 줄 알았어?’
퓨슉!
드레이크의 총구를 빠져나간 총알은 긴 거리를 소리보다 빠르게 관통해 날아갔다. 총알이 칼슨의 심장까지 도달하는 데 눈 깜빡할 시간이면 충분했다.
칼슨의 심장을 뭉개고 몸통을 통과한 총알이 뒤로 빠져나갔고, 심장은 힘차게 피를 뿜어냈다.
수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완벽한 저격을 성공한 드레이크는 바로 자리에서 몸을 피했다. 당장 자신을 쫓지 않을 테지만,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다시 미국으로 간다.’
클락슨이라면 자신을 다시 받아 줄 것 같았다.
* * *
수안은 한국으로 돌아와 대운 자동차 신차 개발 TFT에서 디자인팀만 따로 모아 미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저희 대운 자동차 디자인팀에서 선택한 차량 디자인은 바로….”
예의 그 모델이다. 그래픽으로 그럴싸하게 보여 주고 있었지만, 전혀 예쁘지 않았다. 저런 디자인이라면 판매는 안 봐도 뻔하다. 다 갈아엎겠다고 했는데도 저 디자인을 그대로 들고나왔다. 발표자는 저 디자인에 자신감이 있나 보다.
‘라세티, 매그너스. 참 안타까운 일이네.’
수안은 손을 들어 발표를 막았다.
“아….”
“최 전무님은 앉으세요. 발표는 더 안 들어도 됩니다. 신차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수안의 말에 최 전무는 자리에 앉지 않고 핏대를 올렸다.
“저희가 심혈을 기울여 지금까지 개발한 차량입니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는데 개발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수고가 아까워서라도 이대로 갈아엎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디자인한 차량을 보고도 같은 말을 하면 당신 뜻대로 하죠. 어떤 디자인이 더 나은지는 최 전무 스스로가 더 잘 알 겁니다.”
“…예. 부회장님. 객관적으로 평가하겠습니다. 만약 부회장님의 차량 디자인이 더 나으면 제가 회사를 나가도록 하죠.”
최 전무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수안은 최 전무의 장담에 속으로만 비웃었다.
‘훗. 고작 저 디자인을 갖고 목숨을 거시나?’
수안은 가져온 화구통에서 두 개의 디자인을 꺼냈다. 하나는 2015년식 소나타 LF 디자인, 다음은 그랜저 HG의 다음 세대인 그랜저 IG 디자인이다. 수안이 약간 변형을 가했기에 둘은 형제라고 생각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정영수 회장에게 그랜저 HG 디자인을 팔아먹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대운 자동차에서 HG 다음 세대를 만들어 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IG가 나올 예정이니 HG는 구식 모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안은 버릴 예정이던 HG 모델을 300억이나 주고 팔아먹은 것이다.
수안은 꺼낸 디자인을 탁자에 펼쳐 최 전무와 디자이너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
“……!!”
“헙!”
“이거 보고도 저 디자인으로 갈 겁니까?”
수안의 말에 디자이너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이후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온 최 전무를 쳐다봤다.
‘전무님 어쩌지?’
‘진짜 나가야겠는데?’
최 전무는 팀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이 쌓아 온 경력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있어 충격이 더 크다.
“조금 전에 사표 내신다는 분이 계셨는데 말이죠.”
“…사표 내겠습니다. 제 능력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안 붙잡습니다.”
“…….”
“그런데 벌써 이걸 보셨네요. 대운 자동차 신차 발표까지는 무조건 남으셔야 하겠는데요? 나가도 이거 끝내고 나가세요.”
“크흡…. 부회장님!”
최 전무는 결국 자신을 붙잡아 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수안은 디자인팀 총괄에서 내보내고 일반 서무로 써먹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좋을 대로 생각하시고….’
저렇게 감격한 표정으로 울먹이고 있는데, 괜히 초를 칠 순 없었다.
못 본 척 일 얘기로 돌아갔다.
“전부 주목하세요. 이쪽은 3천cc급 준대형차, 이쪽은 2천cc급 중형으로 생각했습니다. 2천cc급 매그너스는 두 번째 디자인으로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 차명은 당연히 바꿔야 합니다. 매그너스라는 이름은 쓰지 마세요. 3천cc급 대형차는 이번에 기화 차 개발팀과 협업, 새로 개발해서 같은 시리즈 모델로 나오면 되고요. 그런데 라세티는 1.5로 나올 예정이었지 않습니까.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해요. 여러분의 능력을 보여 줄 때입니다.”
디자이너들의 눈이 열의에 가득했다. 수안이 바라는 바였다.
“이 두 디자인을 기반으로 막내를 만들어 주세요. 어렵지 않죠?”
“예! 부회장님! 맡겨 주십시오!”
대운 자동차 개발 팀장인 최 전무가 가장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 전무님만 믿겠습니다.”
수안이 어깨를 두드려 줬더니 황공하다는 듯이 허리를 접는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 *
“누가 돌아와?”
-드레이크가 BE security로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알려왔습니다. 클락슨은 저희 쪽에 의견을 묻고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미국에 있는 이방효의 전화였다.
“하! 그 사람은 형체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거야? FBI는 뭐 하느라 아직도 안 잡아 갔는데?”
드레이크는 FBI에 수배 중인 인물이다. 그런데도 버젓이 공항을 통과하고 도착해 클락슨에게 연락했다.
-이런 일에 능숙한 놈이라 잡히지 않은 모양입니다. 돈을 밝히고 자주 문제를 일으키지만, 능력만큼은 좋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능력만큼은 정말 대단한 놈이다.
“드레이크가 칼슨과 같이 있다고 안 했어? 칼슨은 어쩌고?”
둘은 예전부터 일을 함께해 온 사이. 탈출 후에도 한동안 같이 숨어지내겠거니 생각했었다.
-…정리하고 왔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깔끔하게 제거하려고 자신이 데려갔다는 핑계를 대고 있는데, 저희 쪽에서 먼저 계좌를 정리해서 칼슨을 오해했다고 판단합니다. 이 부분은 클락슨 대장의 분석입니다.
“…내 판단에도 그게 맞다 싶네.”
수안은 드레이크와 더 엮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다시 돌아왔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클락슨을 통해 FBI에 위치를 전달하는 쪽으로….
“받아들여. 그리고 해외로 내보내.”
드레이크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은 앞으로도 이런 일에 자신을 써 달라는 의미로 들렸다.
-네?
“해외에도 보안 요원이 필요한 일이 많을 거야. 우리와 거래하는 오일 자본도 그렇잖아. 그쪽에 보안 사무실을 세우고 PSD(Protective Services Detail: 근거리에서 무장 보호하는 경호 업무)를 위한 파견 근무 형식으로 보내. 미국엔 당연히 못 들어오게 해야겠지. 어차피 FBI에서 수배 중이라는 핑계도 있으니 딱 좋네.”
-이런 위험한 자를 왜 품에 들인단 말입니까. 회장님.
“위험하니 위험한 일을 맡기면 되겠지.”
2001년 9‧11테러까지 고작 2년 남았다.
본래 클락슨을 활용할 생각이었지만, 희생당할 염려가 있다.
하지만 드레이크가 이 일을 진행한다면 희생된다 해도 크게 아쉽지 않다. 당시 테러리스트들이 하이재킹한 비행기는 총 네 대. 세 대는 목표한 지점에 충돌했고, 한 대는 승객들의 저항에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문제는 저항한 승객들과 승무원이 살아남지 못했다는 점이다. 테러리스트를 제지해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비행기에 탑승한 사람들이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다.
‘드레이크라면 뭐….’
능력은 좋다고 하니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9‧11 대비는 너로 끝이다. 드레이크. 동료를 많이 채용해 놔야 할걸?’
* * *
수진의 결혼식 날이다.
수안은 고려 호텔 대형 연회장에서 도착한 손님들과 인사하고 있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 회장님.”
“강운 그룹 첫째 딸이 결혼하는데 내가 빠질 수 있나. 나와 자네가 보통 사이도 아니고.”
대현 자동차 정영수 회장은 수안과 한 번이라도 얼굴을 더 마주할 요량으로 결혼식에 걸음 했다.
‘따로 부탁할 일도 있고….’
특별한 목적도 여럿 품고 있었다.
“허허. 정 회장이 여기까지 오셨소? 이렇게 고마울 데가.”
“강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은 신부의 아버지로 사람들을 맞이하는 강운모 회장이다.
수안은 정영수 회장을 아버지에게 인계하고 다른 손님을 받았다.
“지훈 형 왔어?”
“수진이가 결혼을 하긴 하는구나.”
수안은 사촌인 뉴월드의 정지훈과 악수하고 옆에 아이 손을 잡고 있는 형수에게도 인사했다.
“형수님도 반갑습니다. 우리 조카는 쑥쑥 잘 크네. 당숙 기억하니?”
조카는 부끄러운지 윤혜린의 뒤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얘가. 어른을 만나면 인사를 해야지.”
“하하. 괜찮아요. 지훈 형도 어려서 얼마나 부끄러움이 많았다고요.”
“그래요?”
“내가 언제 그랬어?”
수안은 지훈의 과거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집에 가족들 외에 손님이 오면 맨날 고모 치마 뒤에 숨었잖아. 오랜만에 사촌들 모이면 형만 고모랑 고모부 옆에 붙어 있고 그랬어. 내가 과자로 꼬드겨서 겨우 사촌들과 친하게 지냈을걸?”
“…넌 왜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고 그래?”
“기억이 나는 걸 어쩌라고. 얼른 가서 자리 앉으세요. 형수님.”
“예. 가요. 여보.”
수안은 바쁘게 움직였고, 결혼식을 회사 업무를 보듯 처리해 나갔다. 결혼식은 예나 지금이나 바쁘다. 하나씩 일을 처리하다 보니 막 신혼여행을 떠나는 웨딩카 미등이 보인다.
“…갔네.”
“네. 고생했어요. 여보.”
수진은 결혼식이 끝나고 바로 공항으로 떠났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결혼식 내내 방긋방긋 웃었던 수진이다.
“수진 아가씨 첫째는 분명 딸이에요. 결혼식에서 웃으면 첫째가 딸이래요.”
아내도 수진이 웃는 모습을 눈여겨본 모양이다.
“그거 믿기 힘든 얘긴데? 당신도 웃지 않았나?”
“난 무표정이 대부분이었어요.”
“설마. 그날 당신 웃는 모습이 정말 예뻤는데 말이야.”
“정말이에욧! 얼마나 걱정이 많았다고요. 강운 그룹에서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남편이 결혼하고도 날 좋아해 줄까. 애를 못 낳으면 어쩌나. 별생각이 다 들었다고요.”
“정말 별걱정을 다했네.”
지금은 집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첫째 며느리였고, 자식은 아들, 딸 둘을 낳아 기르는 다음 대 강운 그룹 안주인으로 자리 잡았다. 남편 수안과의 애정 전선은 결혼 후 5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렇죠. 당시엔 걱정만 한가득 안고 있었어요.”
“이젠 걱정 놓고 당신 복귀만 생각해.”
아현은 드라마 복귀가 확정되어 있었다.
“알았어요.”
“우리 애들 기다리겠다. 얼른 들어가자.”
배웅을 마치고 아현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데, 수안을 찾는 인물이 있었다.
“부회장님. 정 회장님이 잠시 뵙기를 바라십니다.”
정영수 회장의 말을 전하러 온 비서 중 하나였다.
수안은 미안한 얼굴로 아현에게 말했다.
“어쩌지? 결혼식 끝내니까 바로 일 시작이네. 당신 혼자 가야겠는데?”
“알았어요. 정원이랑 나현이 데리고 집으로 갈게요. 아버님, 어머님과 같이 가면 되니까 괜찮아요.”
아내를 혼자 보내고 수안은 곧이어 따라붙은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정영수 회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