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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한 사람 (176/304)

남은 한 사람

수안은 미국 월스트리트 근방의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이 그 사람과 약속한 장소였다.

“클락슨. 주변 정리 끝나면 바로 연락하길 바랍니다.”

“예. 스티븐 회장님.”

수안의 말에 클락슨은 직원들이 잠입한 곳으로 돌아갔다.

“그가 안에 도착해 있습니다. 경호원들은 분리시켰습니다.”

수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배영성이 거대한 문을 활짝 열어준다.

수안은 크게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큰 걸음으로 들어갔다.

“잭 회장님. 처음 뵙습니다.”

“…….”

모건 스탠리의 잭 피에타 회장이다. 수안이 클락슨과 아서 마틴을 고용해 지키던 마커스를 죽여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다.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지만, 상당히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유명하신 분이라 그렇겠지요?”

평소 기행으로 타블로이드지에 자주 등장하는 잭 회장이다. 플레이보이 모델과 어울린 사진들이 대부분이고, 거대한 별장에서 벌거벗은 여성들과 밀회를 즐기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유명한 파티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잭 회장은 미국의 유명인사였다.

“날 왜 보자고 하셨는지 모르겠소. 스티븐 회장.”

“아. 별일 아닙니다. 앞으로 세계 금융 시장의 미래를 논의해 보고자 금융계에 이름 높으신 잭 회장님께 뵙자고 부탁했습니다. 프랭크 골드만 회장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젠 잭 피에타 회장님이 가장 이름 높은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잭 회장님까지 죽으면 전 누구에게 가야 할까요.”

“지금 날 협박하는가? 감히 프랭크 회장을 죽인 자들이 나까지 협박해?”

“…….”

수안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답변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잭 피에타 회장의 말로 확신을 얻은 수안이다. 말을 아껴야 했다.

띠링.

수안은 문자를 확인하고 거짓 미소를 진실한 미소로 바꿀 수 있었다.

“저런…. 안타까운 일입니다.”

“뭐라는 거야! 네가 죽였잖아! 네가 시켰잖아!”

노골적으로 수안의 입에서 사실이 나오길 바라며 묻는 잭 피에타 회장이다.

수안은 잭 회장이 아니라 배영성을 보고 말했다.

“여기 내부는 점검했나?”

“예. BE가 소유한 호텔입니다. 예약 전부터 검토했고, 이후에도 영상으로 감시를 진행해 왔습니다.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저 사람 몸수색만 하면 끝이겠네.”

“하지만 외부는 아직….”

“방금 클락슨이 외부 정리를 마무리했어. 세 팀이나 있었다고 하네.”

“그럼 걱정 없습니다.”

수안은 잭 회장을 힐끗 보고 고풍스러운 소파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앉지. 잭.”

“…….”

잭 회장은 방금 다른 나라 말로 오간 대화의 진위를 알지 못해 긴장한 모습이다.

“자리에 앉아. 잭.”

“나한테 명령하지 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잭. 지금 죽여 줄까?”

“…….”

살해 협박이 나왔음에도 잭 회장은 당당했다.

“오늘? 아니면 내일? 원하는 방식을 말해 봐. 되도록 들어줄게.”

“큭. 네가 죽인 프랭크 회장처럼 잠들 듯이 죽여 주면 좋겠군.”

잭은 수안의 입에서 죽인다는 말이 나오니 오히려 좋아했다.

“프랭크 회장을 누가 죽였다고 하던가? 처음 듣는 소리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끝까지 거짓말을 할 셈이야?! 난 다 알고 있어! 어서 말하란 말이야!”

“큭. 혹시 밖에서 카메라와 도청 장치로 이곳 대화를 기록하는 존재들을 믿고 있나?”

“……!!!!”

“그들의 정리는 벌써 끝났어. 헛된 기대는 하지 마. 잭.”

그제야 잭 피에타 회장의 얼굴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수안이 눈짓하자 배영성이 잭 회장의 등을 치며 말했다.

퍽.

“회장님이 자리에 앉으라고 했어. 지금 자리에 앉지 않으면 마루에 무릎을 꿇어야 할지도 몰라.”

잭 회장은 후들거리는 발을 떼어 소파로 갔고 털썩 자리에 앉았다.

잭 회장이 자리에 앉자마자 배영성은 잭 회장의 몸을 더듬거려 소지품을 빼내기 시작했다.

“이, 이거 놔! 저리 안 가!”

배영성의 손길을 뿌리치기엔 잭 회장이 너무 나이가 들었다.

“찾았습니다. 다른 물건은 없습니다.”

“굿.”

배영성이 찾은 물건은 소형 녹음기.

이 정도 대비도 안 하고 만날 사람이 아니었다. 밖에 준비시켜 놓은 사람들 말고도 자신이 준비를 해 뒀으니 이렇게 혼자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이런….”

회심의 수단까지 빼앗긴 잭 회장은 나라를 잃은 표정이다.

“잭. 마커스를 왜 죽였나.”

“…….”

잭 피에타 회장은 이번에 스티븐 회장의 약점을 잡아 BE 인베스트먼트를 미국에서 퇴출할 생각이었다. 골드만삭스 회장의 살해를 지시한 인물이라는 정보라면 미국 금융계에서 퇴출하고도 남았다. 오늘 정보 습득은 물 건너갔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치부를 까발릴 정도로 머리가 나쁘진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관련 증거는 다 확보해 놨으니까.”

“…….”

수안이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배영성이 관련 자료를 탁자에 펼쳤다.

탐정인 아서 마틴과 BE security가 지금까지 모은 증거 자료였다.

드레이크의 사진부터 시작해 드레이크와 칼슨이 함께 얼굴을 마주한 사진이 있었고, 이후 칼슨과 프랭크 회장의 관계, 프랭크 회장과 잭 피에타가 함께 있는 사진도 있었다.

“사진 잘 나왔군.”

사람들과 만난 사진만 가지고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자신은 누구든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다. 이런 증거로 유죄가 가능했다면, 자신은 애초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사진도 잘 나왔지만, 녹음된 음성이 더 재미있지.”

배영성이 녹음기를 재생하자 잭 피에타의 음성이 들려왔다.

-드레이크. 자네가 마커스의 처리를 맡았다고?

-그렇소. 잭 회장.

-언제지?

-내일.

-자살로 처리할 수 있나?

-지키는 이들이 많아서 그건 힘들어. 새뮤얼은 준비가 확실했으니 가능한 일이었어.

-어쩔 수 없군. 그럼 마커스는 어떻게 죽게 되지?

-음주 운전 정도?

-나쁘지 않군. 부탁하네.

-…….

“이건!”

이 대화는 전화가 아니라 직접 드레이크를 만나 나눴던 대화였다.

“마침 드레이크가 우리 회사로 들어왔거든.”

“……!!”

‘증인이 확보되었어.’

드레이크는 잭 피에타 회장과의 대화까지 녹음해 뒀고 이를 모조리 클락슨에게 넘겨 버렸다. 칼슨이 숨어 있는 곳까지 불어 버린 판에 증거를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프랭크 회장의 지시와 당신이 부탁한 일까지 모두 우리가 확보했지. 아! 얼마 전에 우리가 칼슨을 잡았다는 것도 알고 있나?”

“……!!”

그러고 보니 프랭크 회장이 죽고 나서 칼슨의 소식을 듣지 못한 잭 회장이다.

‘칼슨! 놈이 프랭크 회장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는데….’

거기엔 잭 회장의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슨은 아는 것이 참 많더군. 전문가의 고문과 자백제를 이겨내기란 참 힘든 일이지.”

“…….”

“그리고 칼슨은 상당히 꼼꼼한 성격이더군. 자신이 위험할 때를 위해 증거를 참 많이도 남겨놨어.”

칼슨이 작성한 기록 중에는 대여 금고도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프랭크 회장과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똑같았지만, 아까완 표정부터가 다르다.

푸들푸들 떨리는 볼살은 잭 회장이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당신도 모건 스탠리 대출에 보증을 서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뉴욕 카멜에 개인 섬을 잘 꾸며 뒀더군. 플로리다에 있는 별장도 참 좋아 보였어. 인도네시아 개인 섬에도 휴양 시설을 예쁘게 건립했지? 좋아. 좋아.”

수안은 잭 회장의 자산이 이미 자신의 것인 양 말하고 있었다.

“나, 날 어찌할 셈인가.”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으면 그만 아닌가? 그간 프랭크 회장과 함께 잘도 법망을 빠져나갔더군. 이젠 프랭크 회장이 가고 없으니 당신이라도 법의 심판을 받아야지. 미국에선 200년이 넘는 형량도 나온다지? 당신은 얼마나 나올지 아주 궁금해. 한 500년쯤 받을 수 있도록 힘써주지.”

“아, 안 돼!”

“당신이 법원의 판결로 사회와 분리되는 순간, 당신이 사인한 대출 서류는 당신 자산을 강제 집행하기 시작할 거야. 계약서 내용이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 당신의 섬들과 모건 스탠리는 머지않아 우리 품에 들어오겠군.”

대출의 보증에 관한 집행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도 강제 집행이 가능했다.

잭 피에타 회장이 자연인에서 수감자로 바뀌면 그때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보증서류였다.

“스티븐 회장!”

수안은 호텔에 마련된 술을 잔에 따르며 말했다.

“죽여 달라고 부탁하진 말아 줘. 오늘은 그저 통보하러 온 거야. 당신 인생이 끝났다는 걸 미리 알려 주는 친절한 안내자가 되고 싶었어. 마커스의 복수로 제격이라고 생각했거든. 마커스의 영면을 위하여.”

수안의 눈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크리스털 잔도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스티븐 회장.”

“…살고 싶나? 어디 부탁해 봐. 생각해 보지.”

“사, 살려 주게. 뭐든 다 내주겠네! 섬을 원하나? 가져가게! 원하는 걸 다 내주지.”

“큭. 미안해. 농담으로 물어본 거야. 너도 살려 준 적은 없을걸? 그들은 목이 쉬도록 애원했을 거야. 살려 달라고 빌고 또 빌었겠지. 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정리한 과거 가정부들도 그랬을 것이고, 당신들 약점을 잡고 돈을 뜯어내려던 사기꾼들도 그랬겠지.”

그간 잭 회장이 죽인 사람 중 일부였다. 수안은 살려 주기 위해 물어본 것이 아니다. 깊은 절망감을 느껴보라고 일부러 물어봤다.

“게다가 날 죽이려 했잖아? 난 조금의 돈과 작은 권력을 가졌기에 버둥거리며 살아남았지만, 다른 이들은 돈도 없고 권력도 없었지. 너 같은 놈을 정리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야. 고작 통보로 끝이라 아쉽군. 네 처분은 다른 이가 맡게 될 거야.”

잭 회장은 부탁이 먹히지 않는다 생각하고 태도를 고쳤다.

“…절대로 쉽지 않을 거야. 스티븐.”

“맞아. 쉽지 않겠지.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을 거야. 나름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당신 자료를 넘겼으니까.”

조만간 FBI가 출동하고 관련 증거를 수집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수안이 제출한 증거 자료는 칼슨이 자료를 모아 둔 비밀 금고에서 찾아낸 것. 프랭크 회장과 칼슨의 치부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칼슨과 드레이크는 해외로 출국해 없었지만, 둘이 아니라도 다른 살해 증거가 차고 넘친다.

잭 피에타가 법의 심판을 받는 사이 모건 스탠리는 BE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내 뒤에 누가 있는지 두고 보면 알겠지! 내가 바로 모건 스탠리의 잭이야!”

“자부심이 대단하군. 행운을 빌어 주진 못하겠어.”

오바마가 있는 민주당에 이미 자료가 넘어갔다. 수안은 오바마를 먼저 만나고 돌아와 잭 회장을 만나고 있었다. 미국 정부가 금융계에 쓴맛을 보여 줄 수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잘 부탁해. 클린턴.’

“대신 다른 걸 빌어 주지. 교도소에서 좋은 애인 만나길 바라네.”

“FXXX YOU!!”

잭 회장이 붉은 얼굴로 자리를 뜨고 수안은 배영성에게 자리를 권했다.

“배 사장도 앉아. 좋은 술을 혼자 먹을 순 없잖아.”

수안은 배영성 몫의 크리스털 잔에 호박빛 술을 따랐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직접 처리를 못 해서 아쉽네.”

“그런 일은 이제 안 하기로 하셨잖습니까.”

배영성과 최장호는 과거의 살인을 공유하는 측근이다.

“그땐 나와 직접적인 원한 관계가 아니라 다수의 행복을 위한 결정이라서 그렇지. 이번엔 다르잖아. 나와 내 가족이 위협을 받았으니까. 솔직히 저대로 보내 준다고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어. 지금도 클락슨에게 쏴 버리라고 하고 싶을 지경이야.”

“클락슨이 설마 쏘겠습니까.”

“그러니까. 장호가 총 잡고 있으면 바로 쏴 버렸을 텐데 말이야.”

“큭. 안 데려오시길 잘하셨네요. 미국에선 콩밥이 아니라 빵이 나오겠죠? 장호 밥 없으면 식사도 힘든 놈입니다.”

“아. 장호는 올해 둘째 낳는다고 했지?”

“예. 둘째도 딸이랍니다.”

“…장호 모친이 아들 바란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낳겠답니다.”

“장호 와이프는 무슨 죄야?”

“그러게요. 저희는 아들, 딸 하나씩 잘 낳았는데 녀석만 어째서….”

수안은 배영성과 두런두런 과거 이야기와 최근 집안일을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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