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사장님
“…….”
“여보. 왜 말이 없어. 어제 회사에서 좋은 일 있었다며. 뭔데?”
아침에 일어난 박성호는 아내에게 좋은 일이 뭔지 추궁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성호에게 중요한 일은 어제 방문한 사람의 정체다. 가물가물한 기억이 오늘따라 너무 원망스럽다.
“…어제 누가 다녀갔다고?”
“과묵하고 까칠한 총각이랑 무지하게 잘생긴 키 큰 총각까지 둘. 키 큰 총각은 어디서 많이 봤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호, 혹시 이렇게 생겼드나?”
마침 신문에 나온 K-7 광고가 있어 그 면을 보여 줬다. 회장님과 부회장님이 광고 모델로 나온 부분이다.
“오! 딱 이렇게 생겼었어. 그 총각이 이 사람을 닮았었구나? 어쩐지 너무 잘생겼더라. 그래서 얼굴도 익숙했나 봐. 그 사람 결혼은 했나? 잘 어울릴만한 처자가 하나 있는데….”
“아….”
박성호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왜? 결혼했어?”
“아악!”
박성호가 소리를 지르며 다시 허리를 세웠다.
“힉! 깜짝이야!”
“혹시 당신이 어제 실수하진 않았지?”
“실수는 무슨 실수? 실수는 당신이 했겠지. 회사 직원에게 업혀서 들어왔으면서!”
“누, 누가 날 업었어?”
“과묵하고 까칠한 총각.”
“휴우. 그건 다행이네.”
강수안 부회장이 자신을 업고 들어왔다면 생각만으로 끔찍했다.
“회사 직원들인데 실수 좀 하면 어때? 당신 실수가 하루 이틀인가?”
“회사 직원들? 하! 직원들은 맞지. 나보다 직급이 높아서 문제지.”
“뭐? 당신이 차장인데 그 젊은 친구들이 직급이 높다고? 어제 잘생긴 총각이 형님, 형수님 하던데?”
“…부회장님이셔.”
“부해장? 그런 직급도 있어? 차장보다 높아?”
“강수안 부회장님. 어제 당신이 만난 사람이 강운 그룹 강수안 부회장님이잖아! 여기 강운모 회장님 아드님!”
박성호는 신문을 들어 보였다.
“…자, 잠깐!!!”
와락!
남편 손에 들려 있던 신문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제야 어제 만났던 잘생긴 얼굴을 신문 속 광고 모델과 매치시킬 수 있었다.
“내가 어제 강 부회장님과 만나서 술을 마셨거든. 내 술버릇 때문에 부회장님을 집으로 모셔온 것 같아. 아아. 내가 미쳤지.”
“이 화상아!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떻게 해! 진즉에 부회장님과 술자리가 있다고 얘길 했어야지! 당신이 술 먹고 사람 데려오는 일이 한두 번이야?”
짜악!
박성호의 등짝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아악! 내가 부회장님하고 술을 마실 줄 알았나!”
“아직도 할 말이 있어?!”
짜악.
“아악! 아프다고! 그만 때려!”
아침에 일어난 지호는 안방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그러려니 했다. 잠에서 깬 유진이 오빠에게 물었다.
“히잉. 오빠. 엄마랑 아빠가 싸우는 거야? 나 무서워.”
“아니. 좋아해서 그래. 어른들은 좋아하면 크게 소리치기도 해.”
아들 지호는 이제 고작 9살이지만,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아.”
“물 마시고 화장실 다녀와. 조금 있으면 끝날 거야.”
“응. 오빠.”
둘이 찍던 시트콤은 아침 식사 시간에 정점을 달렸다.
“앙~ 여보 반찬 드셔요옹.”
박성호는 입을 벌려 아내가 집어 주는 반찬을 받아먹었다.
“북엇국 싱겁진 않아요?”
“속 풀리고 딱 좋네. 한 그릇 더!”
“금방 가져다줄게용~ 여봉.”
지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듯이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유진이는 오빠에게 조용히 말했다.
“오빠 말대로 아침엔 좋아서 그랬나 봐. 엄마 기분이 되게 좋아 보여. 헤헷.”
“…….”
‘…대체 무슨 일이지?’
아침에 부회장님을 만난 에피소드에 이어 어제 사장으로 보직이 확정된 일을 아내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임시로 맡은 대표라 말하지 못했지만, 이젠 확정이었다.
남편이 사장이 됐으니 아내는 기분 좋을 수밖에 없다.
성호의 아내는 남편이 출근하러 가는 길에 아이들을 세워놓고 말했다.
“아들, 딸. 아빠가 회사에서 사장님이 되셨다고 하니 어디 가서 함부로 자랑… 해도 좋아.”
“우앗! 아빠!”
지호는 왜 엄마가 아빠 입에 반찬을 집어넣어 줬는지 알 수 있었다.
지호가 아빠에게 달려들었고, 유진이도 오빠를 따라 아빠에게 달려가 안겼다.
“허허허. 이제 아빠가 회사 사장이야.”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야!”
“최고야!”
박성호의 어깨가 자꾸만 더 올라갔다.
“허허허.”
* * *
수안은 그간 대운 자동차 협력사를 돌아봤고 지금은 다음 자동차 출시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운 자동차 입찰은 당연히 성공이다. 해외 자동차 업체들이 손들고 도망쳤고, 대현 자동차도 인수에 난색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수안은 대운 자동차 입찰에 관한 최종 보고를 받았다.
“대운 자동차 인수에 필요한 최종금액은 20억 달러로 확정되었습니다. 원화가 아니라 달러지만, 수급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달러 수급에 무리가 있을 리가.’
BE 인베스트먼트에서 달러는 얼마든지 들여올 수 있다. 그게 아니라도 이제 원 달러 환율이 안정세로 접어들어 얼마든지 시중에서 달러를 구할 수 있었다.
“정부와 협상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부회장님이 다 차려 주신 밥상에 숟가락만 올린 기분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야죠. 대운 자동차 개발팀 소집하고 신차 개발 추진 일정을 가져오세요. 조만간 방문하도록 하죠.”
“이번 대운 자동차 신차 개발에도 참여하십니까?”
“기화 자동차는 이미 자리 잡았습니다. 국내 점유율 1위를 달성했고, BE와의 계약이 발효되었지요. 강운 그룹이 기화 자동차를 완벽하게 소유했으니 이제 대운 자동차를 키울 차례입니다.”
수안의 말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듣는 사람도 이미 결과를 봤기에 치기 어린 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신차 개발 TFT를 구성하겠습니다.”
“미팅 일정은 미국 출장 후로 잡아주세요.”
미국 출장은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다.
“예. 부회장님.”
수안은 지난 일의 마무리를 위해 미국으로 갈 예정이다.
‘마지막 한 사람이 있으니까.’
이미 해외로 탈주한 칼슨은 아니다. 남은 사람이 또 있지 않은가.
* * *
정영수 회장은 아버지 정택주 명예 회장을 만나고 있었다.
“…….”
대현 자동차가 국내 시장에서 2위로 밀려난 일로 제대로 마음이 상한 정택주 회장이다. 말이 2위지 두 개 회사밖에 없으니 꼴찌라고 할 수 있었다. 예전에 아들이 정신을 차리고 받았던 충격과 새로움은 그때로 끝이다. 경영은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회장님.”
“아직도 변명할 말이 남았어?”
싫은 소리는 들을 만큼 들어 면역이 생길 정도였다. 정영수 회장은 아버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뱉어냈다.
“강운 그룹이 기화 자동차를 먹어 버린 것도 모자라 대운 자동차까지 집어삼켰습니다. 이대로 가면 대현 자동차에 미래가 없습니다.”
“네가 이번 신차만 성공시켰어도 이럴 일은 없었어!”
“K시리즈를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 너무 혁신적인 디자인입니다. K-7은 대현 자동차의 디자인을 한참 앞질렀습니다.”
K-5 이후에 베일을 벗고 등장한 K-7은 다시 대중에 충격을 안겨 줬다. 소비자들은 K-5 다음에 나오는 K-7의 디자인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새롭다 못해 충격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디자인에 다시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K-7을 선택한 소비자를 대현 자동차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당장은 힘들었다.
게다가 K시리즈는 K-7으로 끝이 아니다. K시리즈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K-9이 연말에 출시된다고 했다. K-7이 이 정도라면 K-9은 대체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
정택주 회장도 K-7을 보고 마음이 흔들릴 지경이라 아들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지금 준비 중인 신차로도 부족합니다.”
“그걸로도 힘들어?”
정택주 회장은 수안에게 사 왔다는 다음 세대 그랜저 디자인을 보고 상당히 만족했었다.
싫은 소리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생긴 디자인, 비싼 값을 하는 디자인이었다.
“강운 그룹은 기존 강운 자동차에 기화 자동차를 입찰로 사들였고, 삼디 자동차까지 집어삼켰습니다. 게다가 대운 자동차 인수까지 성공하며 규모 면에서 대현 자동차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사전에 수안과 약속되어 있었다지만, 그래도 대현 자동차의 권위에 도전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자동차 산업을 시작했다 해도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인정받는 일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대현 자동차가 국민의 사랑을 받아 왔으니 수안이 대현 자동차라는 벽을 느낄 기회가 될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기화 자동차는 K시리즈를 발표하며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을 씹어먹고 있었다.
여기에 삼디로부터 삼디 자동차를 인수했고, 이번 대운 자동차 입찰까지 성공했다. 정택주도 아들과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대현 자동차가 시장에서 도태되고 맙니다.”
아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가져온 방법이나 꺼내 봐.”
정영수 회장은 무조건 진행하겠다는 듯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쌍륭 자동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이미 쌍륭도 강 부회장과 얘기되어 있잖아.”
정택주 회장은 수안에게 씨티 은행 대출을 보장받으며 기화 자동차, 대운 자동차, 쌍륭 자동차 인수 기회를 양보한다고 약속했었다. 지금은 왜 그따위 약속을 했는지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양보를 확답받았습니다.”
“……!”
예전 수안은 쌍륭 자동차를 인수할 의향이 있느냐 물었던 적이 있다. 정영수 회장은 수안의 말을 기억하고 얼마 전 연락해 확답을 받았다. 수안은 쌍륭 자동차까지 인수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생산 공장을 확보했기에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다.
“이미 국내 자동차 산업 지분 대부분을 강운 그룹이 챙겼습니다. 쌍륭까지 인수할 필요도 없고 여력도 없습니다. 쌍륭 자동차는 우리 대현 자동차가 인수하겠습니다.”
“쌍륭은 계륵이야.”
강운 그룹이 인수하지 않고 양보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들의 말대로 필요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강운 그룹에 BE 인베스트먼트까지 생각하면 여력이 없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쌍륭 자동차를 인수하지 않는 것은 입찰이 아니라 쌍륭 그룹에서 직접 매각을 진행하는 바람에 부채를 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멀쩡하게 매물로 나온 회사인데 무슨 이유로 부채를 감액하겠는가. 쌍륭 그룹이 부채 일부를 떠안지 않는 이상 부채가 줄어들 일은 없었다.
먹자니 거액의 부채가 부담스럽고 안 먹자니 강운 그룹이 채갈까 걱정이다. 계륵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쌍륭 자동차였다.
“대현 자동차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쌍륭 자동차를 인수해서 외형을 확장해 둬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강운을 추격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 넋 놓고 있으면 대현 자동차는 삼류로 전락하고 맙니다.”
“…….”
정택주 회장은 아들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강운은 이미 국내 자동차 시장을 잠식하고 있어. 강운이 쌍륭 자동차를 인수해 고급 자동차 시장과 SUV 시장까지 접수하게 되면….’
그땐 정말로 답이 없었다. 아들의 말대로 대현 자동차는 이류가 아니라 삼류로 전락할지도 모를 일이다. 부채가 부담스럽더라도 미래를 준비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 지금 준비해야 미래에 강운 자동차를 따라잡을 가능성을 만들 수 있었다.
“…돈이 부족해?”
아들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쌍륭 자동차 인수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인수 자금도 필요하고 회장님의 인맥도 필요합니다. 쌍륭 자동차 회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 주십시오. 제가 백번 만나서 얘기하는 것보다 명예 회장님의 말 한마디가 더 낫습니다.”
“너…. 수안이 만나고 다니더니 입에 발린 말만 늘었어.”
인수 자금 수혈이 주된 이유일 텐데도 자신을 추켜세우며 의뭉스럽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걸 콕 짚어서 말씀하시네….’
정영수 회장의 노림수가 맞았다. 인수 자금 부탁을 쉽게 넘어가려고 뒷말을 붙였다.
“그래도 쌍륭 그룹 회장을 잘 아는 건 사실이지. 내가 만나 보고 금액을 확정해 주마.”
“감사합니다. 회장님.”
대현 그룹은 위기의 쌍륭 자동차를 인수해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고, 수안은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하하하. 해외로 안 팔리면 그걸로 족하지!]
쌍륭 자동차도 중국 회사에 팔려 기술만 쪽쪽 빨리고 버림받는 것보다 대현 자동차 산하로 들어가 국내에 남는 편이 더 나은 선택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