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도시로 나간 클락슨은 칼슨이 작성한 종이를 사진으로 찍어 약간의 첨언과 함께 이메일로 발송했다. BE 인베스트먼트에 직접 가져다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이다.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다.
이메일을 발송한 클락슨은 일을 해결한 기념으로 스트립바로 향했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전우들과 함께였다.
“예쁜이들을 만나러 가자!”
“예아~!”
드레이크가 지키고 있는 칼슨은 걱정도 되지 않는 걸까.
본래부터 클락슨은 칼슨을 어찌할 생각이 없었다. 드레이크가 칼슨을 놔주건 말건 상관없다는 뜻이다. 상부에서 지시받은 내용엔 칼슨을 처리하라는 내용이 없었고, 잡아서 정보를 캐고 비밀 자산만 회수하라는 내용만 있었다.
칼슨은 이미 잡아놨으니 마음 놓고 술을 마시러 갈 수 있었다. 드레이크에게는 며칠 걸릴 거라고 얘기하고 나왔기에 복귀하지 않는다고 연락할 일도 없다.
“대장. 오늘도 그 방법을 써먹었지? 매번 잘 통하네.”
“크흐흐. 네가 기겁한 녀석 얼굴을 봤어야 해.”
고문 전문가가 아닌 클락슨은 주로 동성애를 사용해 자백받고는 했다.
팀원들은 클락슨의 레퍼토리를 잘 알고 있었다.
“지겨운 연기는 그만하고 아예 푹 찌르라니까. 몇 번만 왕복하면 없는 얘기도 다 튀어나올걸?”
“헛소리하지 마!! 내 물건은 여자만 건드릴 수 있어! 상상만으로 끔찍하다고!”
질색하는 클락슨의 표정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이었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이라 남들도 싫어하리라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 발단이다. 클락슨의 생각대로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은 많았고, 지금까지 매우 고무적인 성과를 보여 줬다.
“킥. 드레이크 녀석이 나중에 알면 무슨 얼굴을 할지 궁금하네.”
“지금쯤 칼슨 녀석에게 듣고 있지 않을까?”
“그거 말고.”
“…일 얘긴 내일 하기로 하지. 오늘은 즐기자고.”
“좋지.”
* * *
“누, 누가 바지를 벗어?”
“누구긴 누구야! 클락슨 그 변태 같은 새끼지. 놈이 내 엉덩이를 노렸단 말이야!”
“미친….”
“그래! 그 새낀 진짜 미친놈이라고!”
“…….”
드레이크는 칼슨이 왜 모든 걸 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클락슨이 녀석을 완벽하게 속였어.’
약점을 파악했으니 똑같이 공략할 수 있었다.
“…녀석이 돌아오면 한 소리 듣겠군. 다음 호위는 녀석에게 양보해야겠어.”
“……!!”
“넌 새로운 애인이 생기겠군. 아주 듬직한 애인이야.”
“이봐. 드레이크. 난 전부 불었단 말이야.”
“크흐흐. 칼슨. 마음 착한 클락슨은 네가 적은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난 아냐. 네가 날 아는 것처럼 나도 널 잘 알지. 넌 네 몫을 포기할 놈이 아니잖아.”
“…….”
“조용히 애인이나 기다리고 있어. 녀석이 돌아오면 재미있게 즐길 방법이나 생각해 놓고.”
드레이크는 칼슨에게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았다.
수갑을 찬 칼슨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저놈은 날 클락슨에게 던져 주고도 남을 놈이야!’
철컥.
다시 문이 열리고 드레이크가 들어왔다.
“내가 이 정도는 미리 준비해 주지. 우리 그동안 알고 지낸 시간이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작은 통을 놓고 다시 문밖으로 사라졌다.
칼슨도 잘 알고 있는 물건이다.
“바, 바셀린(Vaseline)….”
오해는 착각을 불러왔고 상상은 자꾸만 몸집을 불려갔다.
칼슨은 눈앞에 놓인 바셀린이 너무나 두려웠다.
* * *
다음 날 아침 드레이크는 다른 물건을 가져와서 칼슨이 보이는 곳에 올려뒀다.
툭.
“같이 있던 동료들에게 들어 보니까 녀석 취향이 좀 독특하더라고. 난 다시 들어온 배신자라 대장에게 잘 보여야 하는 처지야…. 이해해 줘. 그래도 최대한 덜 아픈 물건으로 챙겨왔어.”
이번엔 가죽 채찍과 부드러운 털로 감싼 핑크빛 수갑이었다.
칼슨의 상상에 새로운 상황이 더해졌다.
촤악! 짜악!
“흡!”
방금 저 채찍으로 등짝과 엉덩이를 맞는 상상을 했다.
“드레이크!”
“내가 도로 들고 가도 소용없을걸? 내가 안 가져왔어도 클락슨 녀석이 들고 왔을 거야.”
“그, 그게 아니야. 혹시 문밖에도 동료들이 있나?”
“큭. 내가 만만해 보였어? 날 쓰러트리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칼슨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거래하자. 드레이크. 넌 돈이면 다 하잖아.”
‘이래야 칼슨이지.’
이 제안을 받으려고 지금까지 칼슨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마침 친구들은 날 믿고 자리를 비워 줬지. 제안을 들어 볼까?”
“평생 BE에서 일해도 받지 못할 돈을 주지.”
“정확하게 말해.”
“100만 달러.”
“…저 채찍은 아무래도 내가 써야겠군.”
거래가 아니라 고문으로 방향을 틀겠다는 말이다.
“200만!”
“채찍이라니…. 내가 생각을 잘못했지. 전용 가방이 필요했는데 말이야.”
이번에도 어림없다는 뜻이다.
“천만!”
드르륵.
드레이크는 의자를 끌고 와서 칼슨 앞에 앉았다.
등받이 팔을 올리고 턱을 기댄 자세로 밉상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런 소모적인 대화는 질색이라. 내가 제안하지.”
“…….”
“넌 최소한 두 계좌 이상을 숨겼어. 난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하나만 깨끗하게 포기해. 넌 나머지를 갖고 여생을 편하게 살면 되는 거야.”
“…….”
클락슨에게 불어 버린 거액의 계좌는 엄두도 나지 않을 큰돈이기 때문에 말했을 것이다. 칼슨이 적당한 금액의 계좌 몇 개를 감췄으리라 짐작했다. 그중의 하나라고 해도 천만 달러는 우습게 넘어갈 것이다.
“아니면 네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상류층 사람들이 후환을 남기던가? 프랭크 회장도 그랬고 BE의 스티븐 회장도 마찬가지야. 넌 아무리 애를 써도 여기서 살아남기 힘들어. 클락슨이 보고하고 돌아오면 곧장 너를 쏴죽일지도 모르지. 네가 공개한 계좌가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야.”
칼슨은 드레이크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날 어떻게 풀어 줄 계획이지?”
드레이크는 칼슨이 비밀 계좌에 관해 반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속으로만 환호성을 질렀다.
‘계좌가 있어! 역시 있었어!’
확신하진 못했다. 그저 칼슨의 성격과 프랭크 회장의 은밀한 일들을 생각해 볼 때 분명 더 있을 거로 추측했을 뿐이다.
“네가 나에게 줄 계좌의 금액부터 알려 주는 건 어떨까? 대화가 조금 더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지 않아?”
고민하던 칼슨은 계좌 하나에 들어 있던 금액을 불렀다.
“3천만 달러가 든 계좌가 하나 있어.”
“고작 그게 전부는 아닐 테지?”
더 많은 돈이 든 계좌를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드레이크다.
“벌써 말을 바꾸는 놈과 거래하란 말이야?”
“오케이. 난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드레이크는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여기 계좌와 비밀 번호를 적어. 난 네 녀석을 고문한다는 핑계로 옥수수밭으로 데려갈 테니까. 조금 걸어가면 내 차가 있어.”
“여기서? 지금? 날 뭐로 보는 거지?”
“날 못 믿겠다는 뜻인가?”
“너 같으면 이 상황에 믿을 수 있겠어? 우선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 그때 적어 주지.”
서로가 믿지 못하는 상황이다.
“어디에 있는 은행인지 미리 알려 주지 않겠어?”
“홍콩. 사람이 직접 가서 찾아야 해.”
“머리 쓰긴….”
“그럼 자국에 그런 계좌를 만들었겠어? 골드만삭스 회장인 프랭크가? 국내는 불가능에 가까워.”
“국세청에 걸리면 끝장이지.”
“나도 우선 살아야 그 돈을 쓸 수 있어. 넌 돈만큼은 배신하지 않는 놈이라는 걸 알고 있지. 날 빼내 주면 정말로 계좌를 알려 줄 거야.”
“너도 홍콩일 것 같은데, 나와 같이 가지?”
“……!”
“BE의 눈을 피해 출국할 방법은 있고?”
“…….”
끝까지 칼슨을 믿지 못하는 드레이크다. 돈을 찾는 그 순간까지 칼슨을 붙잡고 있으려는 심산이었다.
“난 홍콩이 아냐.”
“거짓말.”
“…….”
“밖으로 나가면 어차피 우린 한배를 탄 동지라고 할 수 있어. 네가 믿음을 받고 싶다면 나도 더 믿어 줘야지.”
칼슨은 잠시 드레이크의 눈을 노려보다가 펜을 들고 종이에 계좌 정보를 휘갈겨 썼다.
계좌의 비밀 번호까지 전부 써 버렸다.
“아무렇게나 쓰지 않았어. 계좌 정보는 진짜야. 내가 먼저 널 믿었다. 이제 네 차례야.”
“큭. 내가 선금을 받으면 서비스가 확실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군. 기다려. 바로 시작하지.”
칼슨이 작성한 계좌 정보는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선명하게 녹화되고 있었다.
* * *
“그래? 벌써? 역시 드레이크 녀석은 행동이 빠르네.”
클락슨은 도시에서 전화로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칼슨을 지키던 드레이크가 칼슨을 빼돌려 사라졌다는 보고였다. 두 번 당할 일은 없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녹화한 계좌 정보는 대장 휴대 전화로 보냈어.
“좋아. 여기서 BE에 전송하면 녀석보다 빠르게 자금을 인출할 수 있으니까 걱정 없지.”
드레이크가 거액의 자금을 손에 쥘 일은 없었다.
-여기 흔적 정리하고 대장이 있는 곳으로 빨리 출발할게.
“천천히 와. 어차피 놈들은 놔주려고 했으니까.”
칼슨은 스스로 겁에 질려 숨어 살 놈이고, 이미 대부분의 은닉 자금도 회수한 다음이었다.
드레이크는 원한이라고 할 만한 일도 없었다. 오히려 배신했던 놈이 다시 동료를 배신하고 도망가는 중이니 앞으로 얼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 * *
“멍청한 놈들. 당하고 또 당하네.”
칼슨을 옆에 태우고 질주하는 차 안이다.
엉덩이 순결을 잃을 위기에서 빠져나왔지만, 아직 불안에 가득한 칼슨이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지?”
“여권 만들러. 돈이 좀 들긴 하지만, 어렵지 않아.”
“바로 출국할 수 있어?”
“급행료를 지급하면 더 빠르게 만들 수 있지. 물론 비용은 내가 낼게. 3천만 달러를 선물해 준 소중한 고객님이니까.”
“휴우.”
“아직 안심하지 마. 언제 BE에서 뒤를 밟을지 몰라.”
아무도 이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 * *
긴장 속에 출국해 홍콩에 도착한 두 사람은 변장까지 한 상태였다.
“자넨 정말 능력 있는 용병이었어.”
칼슨은 이제 위험이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뒤를 밟힌 적이 없었고, 드레이크는 완벽하게 일을 수행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선금을 받으면 서비스는 확실하다고 말이야.”
“그래도 오늘을 끝으로 더는 마주치지 않기로 하지. 함께 있으면 위험만 가중되니까.”
“내가 할 말이야.”
드레이크는 칼슨이 알려준 은행으로 함께 들어갔고, 칼슨은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뭐야? 왜?”
“나도 이 은행이거든.”
“뭐?”
“안내 고마웠어. 드레이크.”
“…….”
많은 사람이 모인 은행이다. 드레이크는 칼슨을 붙잡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칼슨은 벌써 은행원과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돈을 빨리 찾아야 해.’
같은 계좌를 알고 있으니 녀석이 먼저 계좌를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드레이크는 계좌 정보가 든 종이를 품에서 확인하고 얼른 은행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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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드레이크는 창백한 얼굴로 은행을 나오고 있었다.
“칼슨. 이 새끼가 감히….”
계좌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계좌 자체가 사라졌다. 계좌는 며칠 전 출금이 끝났고 폐기했다고 한다. 두 사람보다 이르게 누군가 계좌에서 자금을 인출한 것이다.
드레이크는 아직 은행에 남아 있을지 모를 칼슨을 찾아다녔지만, 은행의 다른 출구로 사라졌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칼슨은 아까 다른 은행원에게 화장실 안내를 부탁했다고 한다.
“…….”
드레이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칼슨. 왜 죽음을 자초하지?”
돈에 관한 욕심도 분노로 날아가 버렸다.
가슴이 분노로 가득했지만, 드레이크의 이성은 차갑게 유지되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살인을 감행하고도 쉽게 증거를 남기지 않는 이유였다.
드레이크는 홍콩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겼고, 일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일을 처리하고 출국하려면 완벽한 준비가 필요했다.
‘이 좁은 홍콩에서 네가 날 피할 수 있을까?’
분노한 용병이 칼슨을 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