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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수안의 전화를 확인한 비서실은 곧장 정영수 회장에게 연결해 줬다.

-강 부회장. 왜 이렇게 통화하기가 힘들어?

“누가 자꾸 바쁘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해결사 노릇 하느라 좀 바빴습니다.”

정영수는 수안의 첫 마디부터 대꾸할 말이 없었다.

-…….

“별고 없으시죠?”

‘없긴 개뿔.’

이번 그랜저 XG 판매 부진으로 아버지께 불려가 된통 한 소리 들었다.

국내 차량 판매에 집중하겠다는 사람이 이제 막 기화 자동차를 인수한 상대에게 제대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체 뭘 준비했냐는 타박에 정영수 회장은 할 말이 없었다. 문제는 연이어 생겼다. 국내 소비자에게 애국심을 들먹인 일과 품질 이슈를 수면으로 끌어올린 자충수로 인해 다시 판매량에 타격을 입었다. 다시 전화로 귀청이 떨어지도록 아버지에게 욕을 먹었다.

“당장 강 부회장하고 관계 개선하고 판매고 원상태로 회복시켜!”

아직도 귓가에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메아리치는 기분이다.

-국토교통부엔 언제 그렇게 사람을 심었어?

“모르셨습니까?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강운 그룹에서 가장 역점을 둔 부처가 바로 국토교통부입니다.”

-끄응.

“저는 정 회장님과 공정한 경쟁을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거야. 이번 일을 기획한 홍보이사 사직서도 받아놨네.

“…….”

‘엄한 사람은 뭐 하러 사직서를 받아?’

“그건 그렇다 치고…. 기화 자동차 디자인팀엔 왜 기웃거리세요?”

-큼큼….

기화 자동차 디자인팀에 대현 자동차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사람이 수두룩했다.

.

.

.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약속한 상대방을 찾던 여성이 손을 든 사람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좋은 제의를 주신다고 해서 나왔어요.”

“아마 만족스러운 연봉을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대현 자동차에서 특별히 디자이너분들을 모시고 있거든요.”

대현 자동차의 헤드헌터는 기화 자동차 디자이너의 연락처를 구해 개별 접촉을 시작했다.

눈앞의 여성 디자이너가 첫 번째로 접촉한 사람이다.

“게다가 보너스까지 두둑합니다. 근로 계약서에 사인하자마자 2천을 쏴 주기로 했습니다.”

“오오.”

“다만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해 주시면 됩니다.”

“뭐죠?”

“이번 K시리즈의 디자인. 누가 주도했습니까?”

“……!”

“이것만 확인하면 됩니다. 그 사람과 같이 가는 조건입니다.”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참신하시게 하시는지….”

“네?”

“됐어요.”

여성 디자이너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깐. 본인이 생각 없으면 누군지 알려만 주십시오.”

“…그 사람을 보너스 2천 주고 데려가시려고요?”

“더 줄 수도 있습니다! 1억! 1억까지 가능합니다.”

“풋. 정말 기가 막힌 소릴 들었네요. 수고하세요.”

그 뒤로 대현 자동차 헤드헌터는 만나는 디자이너마다 코웃음 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헤드헌터는 마지막 스카우트 대상자도 그냥 일어나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그 사람이 얼마나 받아서 1억도 우습단 말입니까?”

“큭. 대외비라 말씀 못 드립니다. 아마 지금까지 당신이 접촉했던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였을 텐데요?”

“좋습니다.”

헤드헌터는 마지막까지 꺼내지 않았던 쇼핑백을 테이블 밑에서 발로 밀어 건넸다.

“누군지만 알려 주십시오. 알려만 주면 이 쇼핑백은 당신 것입니다.”

직원은 곁눈질로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고 흡족하게 웃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네. 역시 강 사장님 말대로야.’

디자인팀장인 박정진은 쇼핑백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누가 봐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기화 자동차 사장을 고작 1억으로 스카우트하겠다는 당신이 왜 우습지 않겠습니까?”

“네?”

“K시리즈는 강수안 사장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했어요. 디자인팀은 그저 지시에 따른 것이 전부입니다. 이 돈은 디자인팀 회식비로 쓰죠.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K시리즈의 모든 차량 디자인은 수안이 직접 관여했다. 수안이 크게 얼개를 짜두었고, 나머지를 기화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손본 것이 전부다.

“아….”

이 말이 사실이면 돈 천만 원은 허공으로 날린 셈이다.

.

.

.

정영수 회장도 보고를 받아 K시리즈 디자인이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 직원이라도 데려가시려고요? 이렇게 저를 바쁘게 만드시는데 언제 정 회장님께 전화를 드리겠습니까?”

-진짜 강 부회장이 직접 디자인했어?

“그럼 거짓말이겠어요?”

디자인팀 박 팀장은 자신과 팀원들이 대현 자동차 헤드헌터에게 받은 제안을 고스란히 보고했다. 받은 돈은 박 팀장의 생각대로 회식비로 충당했고 나머지를 나눠 가졌다.

-끄응.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으신가 보네요. 뭐 좋습니다. 어차피 헛심 쓰셨으니 디자이너 건은 제가 이해하고 넘어가죠.”

-…대신 이번에 대운 자동차는 확실하게 들러리 서 줄게.

“옛날 옛적에 결론 낸 일을 두고 생색내시면 참 난감합니다.”

-…….

이것도 할 말이 없다. 아버지와 자신이 함께 약속한 일이 아니던가.

-그래. 좋아! 내가 다 미안함세. 내가 어떻게 사죄하면 되겠는가.

“이제야 대화가 통할 여건이 마련되었군요. 조만간 한번 뵙죠. 중요한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전화로 하긴 적합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또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는지….’

강 부회장의 의중은 도무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의심하지 마시고 그냥 나오세요. 저도 정 회장님과 날을 세우면서 지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이번 일은 대현 자동차가 먼저 시작했어요.”

-…일정 잡아서 비서실에 전달해 주게.

“그때 그 한정식집에서 뵙지요.”

* * *

수안은 약속 장소에 느긋하게 나와서 정 회장을 마주했다.

“어휴. 일찍 나오셨습니다.”

“아냐. 적당히 나왔지 뭐….”

수안이 제시간에 도착했을 뿐이다. 정 회장은 항상 수안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일전에 공항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평소엔 누구도 정 회장을 기다리게 하지 않지만, 수안만큼은 예외에 해당했다.

수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정 회장의 속을 후벼팠다.

“요즘 대현 자동차 판매 대수가 처참하던데요? 마케팅에 힘 좀 쓰셔야겠어요.”

“…….”

정영수 회장은 부들거리는 주먹을 애써 숨겨야 했다.

수안은 젖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디자인은 참 잘 나왔던데 아쉽네요. 차라리 후속 차량 빨리 내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새로운 차량을 생각하고 있었어.”

이미 판매가 뒤처진 그랜저 재고를 빨리 떨어 버리고 다음 차량을 내보이는 것이 수였다.

“좋지요. 저도 무주공산에 깃발 꽂는 건 사양이라.”

“기화 자동차는 한동안 신차 안 나오지?”

“다 아시잖습니까. K-3와 K-7이 최근에 나왔으니 남은 차량은 K-9으로 끝입니다. 한동안은 이걸로 계속 먹고 살아야죠.”

‘그사이 빨리 치고 나가야 해. K시리즈를 넘어설 새로운 디자인으로 대결한다.’

“대현 디자이너들이 괜찮은 디자인 뽑아 줍니까?”

“그야….”

이걸 자신이 왜 얘기한단 말인가.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우리 디자이너들도 유능해!”

“필요하시면 하나 넘겨 드리려고 그랬죠. K시리즈 안 팔리면 써먹으려던 디자인이 있는데 너무 잘 팔려서 쓸모없어졌거든요.”

“……!!”

“필요 없으시면 이번 차량 디자인은 그냥 사장시켜야겠네요.”

“자, 잠깐. 보여 주면 안 되나? 어차피 사장시킬 디자인이면 내가 봐도 괜찮지 않아?”

“맨입으로요?”

“…….”

또 나왔다.

‘맨입으로 주면 어디가 덧나?’

“제 디자인 값이 좀 비싼데 말입니다.”

“…얼마나 생각하나.”

“이번에 빌딩 사는데, 돈이나 보태 주시죠. 한 300억이면 충분하겠네요.”

“…….”

큰돈이지만, 이번 K시리즈 판매량을 본다면 적당한 금액으로 여겨졌다.

“수천억 개발비에 300억 보태는 정도야 괜찮겠죠?”

“그야…. 디자인 나름이지.”

수안은 이현창의 비자금을 모으는 차명 계좌가 적힌 종이를 정영수 회장 앞으로 밀었다.

“입금하시면 전체 디자인 보내드리겠습니다. 디자인은 보안이 생명이라 먼저 보여 드리진 못하겠네요.”

“…….”

“식사나 듭시다. 여기서 포식하려고 아침도 굶고 왔다는 거 아닙니까.”

수안이 맛있게 식사하는 동안에도 정영수 회장은 고민을 이어 갔다.

‘어림도 없는 디자인으로 돈을 뜯어낼 위인이 아니지. 분명 눈이 돌아갈 디자인일 거야.’

정영수 회장의 생각대로 수안이 준비한 차량 디자인은 시대를 앞서 나간 디자인이었다.

대운 자동차를 인수하고 내보일 새로운 차량 디자인을 이미 정해 두었기에 남은 디자인이 있었고, 이번 기회에 팔아먹으려고 나온 것이다.

남은 디자인이라고 해도 현시대에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킬 만한 디자인이다.

‘원래 대현 자동차 디자인이기도 했고….’

수안은 대현 자동차가 훗날 출시할 차량 디자인을 돈을 받고 팔아먹을 생각이었다.

“돈 입금하고 마음에 안 드신다고 반품은 안 됩니다. 아시죠?”

“…정말로 괜찮아?”

“보자마자 감이 올 겁니다. 대현 자동차의 구세주가 될 거라는 감 말입니다.”

수안이 선택한 디자인은 5세대 HG 그랜저의 디자인이다. 정 회장이 충분히 마음에 들 디자인이었다.

‘K-7이 나왔으니 그랜저 HG가 나와 줘야 격이 맞지.’

“오늘 바로 송금하지. 디자인이나 얼른 가져와.”

“역시 결단력이 대단하시네요. 입금 확인되면 저도 서류 보내겠습니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고, 정 회장은 입금을 서둘렀다.

수안은 정 회장의 연락을 받고 통장에 돈이 제대로 들어왔음을 확인했다.

“급하긴 급하신가 보네.”

수안이 보낸 디자인은 인편을 통해 대현 자동차에 당일 전달되었다.

* * *

다음 날 대현 자동차 디자인팀과 신차개발총괄 이사까지 전원 모여 있었다.

대현 자동차 회장이 직접 이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정영수 회장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분분히 일어서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고, 정영수 회장은 화구통을 열어 디자인이 담긴 서류를 꺼냈다.

“우리가 새롭게 출시할 차량 디자인이야. 비싼 돈 주고 사 왔으니 나머지는 자네들이 마무리해 줘야 해.”

디자인팀 직원들은 속으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맨날 우리가 제출한 디자인을 반려했으면서….’

정 회장은 그제까지도 K시리즈를 넘어설 디자인을 가져오라고 역정을 냈었다.

그런 회장이 결국 자신들을 믿지 못하고 외부에서 디자인을 사 왔다는 말은 그간의 야근은 아무런 가치도 없이 낭비한 시간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보고 혹평을 해 주지.’

신차 개발을 맡은 최 이사는 정영수 회장이 건네주는 종이를 펼치며 단단히 마음먹었지만, 그의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

“왜. 이상해? 보기에 좋던데?”

다른 직원들도 팀장 곁으로 가서 새로운 디자인을 확인했다.

“우아…. 미쳤네.”

“허! 이거면 K시리즈도 비빌 수 있겠는데?”

K시리즈 때문에 성능보다 디자인이 차량 판매에 더 강점을 갖는다는 점이 증명됐다.

디자인만 제대로 뽑으면 일정 부분 성능을 감수하며 탄다는 뜻이다. K-5는 그 성능마저 꿀리지 않았지만, 디자인의 강점이 확실히 우위에 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대체 누구지?”

“디자인만 해도 밥 먹고 살 사람이겠지.”

디자이너들의 말에 정신을 차린 최 이사가 정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 디자이너가 누굽니까?”

“알면 어쩌려고?”

“앞으로도 대현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야인이라면 무조건 대현 자동차로 데려와야 합니다. 제 자리를 줘서라도 데려와 주십시오.”

“…….”

‘보는 눈이 다 비슷하네.’

정영수 회장은 수안이 보낸 디자인이 영 아니다 싶으면 어떻게 해서든 반품을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디자인을 보자마자 300억이 아깝지 않음을 알았다. 이 디자인이라면 충분히 K시리즈에 대항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무려 12년을 앞선 디자인이다. 당시에도 상당한 매출을 올린 대현 자동차의 효자 모델이었다. 당시 디자인 평가는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지금이라면 전혀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단발성 계약이니까 이거나 잘 다듬어 봐.”

“다듬을 곳이 없습니다! 이대로 출시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만 알려 주십시오. 제가 빌어서라도 데려오겠습니다.”

<『재벌가에 끼어들었다』 9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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