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DAY (168/304)

D-DAY

최근 재무부 장관직에서 내려온 로버트는 일전에 수안이 선물한 말리부 별장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조용한 거실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가족까지 잠시 멀리하고 혼자 별장에 내려온 것이다.

사라락.

띠리리리.

깊은 밤 정적을 깨는 벨 소리가 울렸고 로버트는 휴대 전화를 받았다.

“그래.”

-목표 확보.

“좋군.”

-청소 진행합니다.

“세상이 깨끗해지겠어.”

로버트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여유로운 일상으로 돌아갔다.

거실은 정적을 되찾았다.

* * *

다음 날 미국 금융계의 큰 별이 떨어졌다는 속보가 전해졌다.

골드만삭스 회장 프랭크 골드만의 사망 소식이다.

사인은 심장 마비. 평소 운동을 하는 등 건강하게 지냈지만, 갑자기 찾아온 심혈관 질환이 목숨을 앗아갔다고 한다.

“…상당히 일을 잘하는 친구들이군.”

로버트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TV를 껐다.

“추수까진 아직 시간이 필요하겠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니 기다릴 일만 남았다.

“어서 내게 골드만삭스를 가져와 주시게. 스티븐.”

* * *

수안은 이방효를 통해 프랭크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휴우. 그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수안의 연기력이 날로 늘어간다.

-사람은 내일 일을 모르는 법이죠. 안타까워야 정상인데 그동안 당한 것이 있어서 좋은 마음이 들질 않습니다.

로버트와의 일은 아는 사람이 없을수록 좋은 일이다. 아버지 외에 이 일을 공유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이젠 긴장을 좀 내려놔도 되잖아. 이 사장도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회장님.

이제 계획을 실행으로 옮길 시간이다.

“골드만삭스 채권에 사망한 프랭크 회장의 보증이 들어가 있지 않나?”

-아. 예. 맞습니다.

“프랭크 회장의 유산에 권리부터 행사해야 해. 그래야 돈을 떼이지 않지.”

-지분 말씀이십니까?

“지분으로 끝이 아니야. 지금까지 귀족처럼 살아왔으니 다른 자산도 상당할 거야. 프랭크 회장의 유산 처리를 관리하는 변호사부터 찾아가. 프랭크 회장의 보증 내용을 알려 주고 상속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 달라고 해. 채무를 확인하고 나면 유산을 상속받을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지지 않을까?”

프랭크 회장이 사인한 대출 계약서에 효력은 500억 달러의 절반인 250억 달러에 해당한다. 지분과 모든 유산을 더해도 250억 달러에 도달하긴 어려웠다.

-미국 내 유능한 로펌을 통해 진행하겠습니다.

골드만삭스가 모건 스탠리보다 조금 이를 뿐. 수안과 이방효는 둘이 결국 같은 결과를 맞이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프랭크 회장의 지분과 유산을 우리가 인수한다고 가정하고 움직여. 추가로 골드만삭스 이사회 위원들을 포섭해야 해. 골드만삭스 경영진을 우리가 임명해야 해.”

-오!

“BE에 친숙한 인물을 골드만삭스 회장 자리에 앉히기로 하자고. 아! 얼마 전 퇴직한 로버트가 좋겠어. 골드만삭스 출신에 고위공직까지 지낸 사람이니 이사회에서 얼마나 좋아하겠어?”

-미국 금융계에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금융사를 늘려나가면 BE가 미국 금융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우리 BE는 전면에 나서지 마. 총알받이는 JP모건이나 골드만삭스, 모건 스탠리를 내세워. 우리가 변방에서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해.”

어느 나라 사람이건 자국이 우선이다. 여기에 유대인이 장악했던 미국 금융계를 한국 국적의 금융사가 장악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BE의 영업이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언제 어디서든 태클이 들어올 수 있음이다.

-…운용 자금 규모를 더 축소해서 외형을 줄이겠습니다. 위기가 만연한 참이니 어렵지 않은 일이죠.

이럴 때는 몸을 바짝 낮춰야 한다.

“그래. 그리고 프랭크 회장의 비서인 칼슨을 찾아 놔.”

일의 원흉이 죽었다고 해도 실제로 업무를 담당했던 비서 칼슨이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그자를 그냥 놔줄 생각은 없었다. 이 자를 잡아야 모든 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

“클락슨을 시키면 되겠네.”

클락슨의 경호 업체는 BE Security로 이름을 바꾸며 BE 산하 보안 업체로 거듭났다.

-예. 회장님.

* * *

클락슨은 이방효의 지시에 BE Security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찾아낸 인물은 칼슨이 아니라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는 지금까지 골드만삭스의 일을 맡아왔지만, 프랭크 골드만 회장이 사망하며 자연스럽게 일거리도 떨어진 상태였다.

둘이 만나는 장소는 예전 클락슨이 술을 마시던 바였다.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정하고 드레이크를 불러냈다.

“드레이크. 전우들의 믿음을 배신한 대가는 달콤했나?”

“난 배신하지 않았어. 당신 업체에 들어간 것은 작전일 뿐이야.”

본래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고 더 오래 머물러야 했지만, 나중의 의뢰는 훌륭하게 성공시켰다.

“…….”

“당신에게 피해를 준 것은 미안하게 생각해. 내가 성공해서 당신들이 실패한 셈이니까. 큭.”

드레이크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했다.

“앞으로 갈 곳은 있나?”

“무슨 소리야?”

“내 전우들을 다 따돌리고 작전을 성공시키지 않았나. 나름 유능한 인재라고 할 수 있으니 스카우트하려고.”

“이봐. 클락슨. 나 같은 놈은 언제든 배신할 수 있어. 돈이면 뭐든 하지. 그런 날 스카우트하겠다고? 날 놀리려는 건가?”

드레이크의 말에 클락슨은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크흐흐.”

“뭐가 웃겨? 다들 돈 때문에 움직여!! 너라고 다를 것 같아?!”

“비웃는 걸로 들렸다면 미안하네. 비웃은 건 아니….”

잠시 멈칫한 클락슨은 말을 바꾸고 다시 웃었다.

“비웃은 게 맞을지도 모르겠군. 크흐흐.”

“…….”

드르륵.

드레이크는 린치를 당하지 않을지 걱정했었다. 약속 장소에 나오면서도 주변을 꼼꼼하게 정찰했다. 하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클락슨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기분 상한 드레이크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클락슨은 아무렇지도 않게 맥주잔을 들며 말했다.

“내가 BE 인베스트먼트 아래로 들어간 이유가 바로 그 돈 때문이야. 자네 말대로 우린 돈이면 뭐든 하잖나.”

드레이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클락슨의 말이 이어진다.

“돈을 원했으면 이쪽에 붙었어야지. BE보다 많은 돈을 주는 곳은 많지 않아.”

“…….”

드레이크가 몸을 돌려 클락슨을 보고 있었다.

“앉아. 이번엔 작전이 아니라 네가 스스로 들어오는 걸로 하자고.”

“자세히 설명해.”

“골드만삭스, JP모건, 모건 스탠리. BE 인베스트먼트는 이 셋을 더한 것보다 많은 돈을 가졌지. 그런데 돈이면 뭐든 한다던 네가 돈 때문에 내 스카우트 제안을 거부했어. 웃기지 않아?”

“……!”

“골드만삭스는 이번에 큰 변화를 맞이할 거야. 아마 BE의 힘으로 새로운 사람이 회장직에 오르겠지. 그 사람이 자네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짐작하리라 생각하네. 자네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내 밑에 있어야 할 거야.”

“…퇴로까지 막았나?”

“자네를 위한 배려라고 해 주면 좋겠는데? 설마 내가 BE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잖아.”

“…….”

클락슨의 말대로였다. 클락슨은 BE가 골드만삭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빼내려 한 것뿐이었다.

“내가 착각했군.”

“큰 착각이지. 이제 자네 대답을 들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

답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다.

“고맙군. 이제 자네도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으니 일을 시작해야지?”

“하! 내 대답은 듣지도 않았으면서….”

“차를 타고 가면서 얘기하지.”

클락슨이 수신호를 보내자 바 곳곳에 숨어 있던 이들이 은폐를 풀고 밖으로 나왔다.

“……!!”

‘젠장. 있는 줄도 몰랐는데….’

모두가 완전 무장 병력이었다.

“가자. 드레이크.”

“내가 어디로 가야 하지?”

“칼슨이 숨어 있는 곳.”

“……!”

“첫 임무야. 여기서 실패하면…. 그땐 자네가 좋아하는 돈을 만져 보지도 못하겠지.”

“젠장!”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밀렸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다.

* *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일이 수월하게 해결되었을 뿐입니다. 선배님.”

이현창은 국정원을 통해 수안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야쿠자를 잡아들이는 일본의 일에도 도움을 주고 청부 살인을 지시한 사람을 찾는 일에도 나름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미국에 있다는 칼슨을 잡는 것도 힘들었고, 미국에 공조를 부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끝내야 했기에 수안을 볼 낯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나온 미국발 뉴스를 보고 수안에게 연락했다.

-어떻게 딱 맞춰서 그 사람이 죽느냐 이 말이야. 칼슨이라는 놈이 프랭크 회장의 심복이라 하지 않나?

“이젠 끈 떨어진 연이죠. 앞으론 문제 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이번 일에 발을 들였어도 로버트의 일까지 발설할 수는 없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잘 지켜지는 법이다.

-내가 마무리를 해야 했는데 말이야.

“충분히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안 하기로 했으니, 다른 방법으로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맞아. 그 얘기를 한다는 걸 깜빡했어. 왜 자꾸 거기다 대왕님을 모시나?

이현창은 수안이 감사를 표하는 방식은 이미 아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나중에 대선 가실 때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미리미리 만들어 둬야죠.”

수안은 이현창의 아들들이 일하고 있는 대한 공조에 따로 현금을 보내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었다. 꾸준하게 자금을 보내 나중에 이현창이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향후 대선까지 무려 8년이나 남았지만, 미리부터 준비해 둬야 잡음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말이야.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생각하세요. 요즘 기화 K-5가 얼마나 잘나갑니까.”

-…그래도 그렇지.

“에헤이. 제가 뭐 바라고 선배님 지원하지 않습니다. 아시잖습니까.”

바라는 거 정말 많다.

-큼.

“그럼 다음에 부탁드릴 일 있으면 가장 먼저 선배님께 연락드릴게요. 그럼 됐죠?”

더 얘기하기 민망한지 이현창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스위스에 있는 그 녀석 일은 나 퇴임하기 전에 마무리할 거야. 그렇게만 알아둬.

“…회유는 별로였던 모양이죠?”

-싹수가 보여. 아무래도 정리해야 할 것 같아.

“무운을 빌겠습니다.”

-방법이야 많으니 걱정할 것 없어.

수안은 그 방법이 궁금했지만, 참기로 했다.

“저야 모르는 게 약이죠.”

안 그래도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했는데, 또 다른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민국당 다음 주자는 대체 누구야?

“…그야 민국당에서 결정할 일이죠.”

내년 총선에 도전했다가 낙마하고 장관으로 돌아올 인물이다. 뻔히 알고 있지만, 지금 아는 척할 수는 없었다.

-윤곽도 안 나와?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지금 대통령의 인기라면 누가 나와도 됩니다.”

-하긴. 그렇지.

“민국당 후보들을 압축해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걸리겠죠.”

-크흐흐.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좋군.

“…….”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은 수안도 마찬가지다. 그저 얼굴이나 한번 보면 족하다.

일은 역사대로 흘러갈 것이고, 훗날 다시 야당을 이끌 이현창이 대통령 중임제 헌법 개정에 찬성만 하면 된다. 이후 국민 투표에 부쳐 결정되어야 하는데, 국민들에게 얼마큼 공감대를 얻을지는 두 정당이 알아서 할 일이다.

“장세진 보좌관은 곁에 두고 선배님과의 창구로 활용하겠습니다.”

-마음대로 쓰시게. 대신 반납은 필수야.

“설마 장 보좌관이 이쪽으로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후배가 사람 마음을 오죽 잘 훔치면 내가 이런 걱정을 하겠어?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틀림없이 반납하겠습니다. 하하하.”

한참 통화 후 전화를 끊은 수안은 바로 다음 사람에게 연락했다.

“다음은 정영수 회장….”

수안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다.

“돈이나 좀 뜯어 볼까?”

향후 선거 자금으로 나갈 돈이라면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는 편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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