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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의 회동 (163/304)

셋의 회동

잠시 후에 굳은 얼굴로 들어오는 부장님과 동료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영수는 벌떡 일어나서 인사했다.

“아. 예. 아니, 그래. 어…. 좋은 아침이군.”

이어서 차장님과 과장님께도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박 차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김 과장님.”

둘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 나한테 인사한 거야? 왜?’

마지막으로 최 대리가 남아 있었다.

“안녕하십-”

“쉿.”

“무슨 일 있습니까?”

“잠깐 나 좀 봅시다. 영수 씨.”

“…예.”

영수는 불안한 마음으로 최 대리를 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치익.

“후우….”

담배에 불을 붙인 최 대리가 깊이 한 모금 빨고 뱉어냈다.

“제가 어제 큰 실수라도 했습니까? 도무지 기억이 안 나서….”

“아…. 기억이 없구나?”

“예.”

“나도 기억을 잃었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어제 얼마나 큰 실수를 했길래 그러시는지….”

“아냐. 영수 씨가 따로 실수한 일은 없었어. 평소랑 비슷했어.”

“평소라면…. 아. 또 제가 대리님께 반말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대리님.”

“괜찮아. 살다 보면 그런 것도 추억이야.”

“…….”

“예전에 별일 아닌 걸로 화내서 내가 반성을 참 많이 했어. 앞으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일을 가르쳐 줘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래도 부회장님께 고맙다는 말은 대신 전해 줘라.”

“아. 예…. 예?”

“강수안 부회장님이 네 매제라며?”

“…제가 그런 말도 했습니까?”

“너 데려다주다가 집 앞에서 직접 만났어. 부회장님이 너 잘 데려다줬다고 용돈 주셨다. 회장님도 가까이서 뵈니까 참 듬직하시더라. 그리고 네가 회장님 앞에서 춤추는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나 같으면 혀 깨물고 죽었을지도 몰라. 기억을 못 하니 얼마나 다행이니.”

“아으….”

“앞으로 넌 함부로 술 먹지 마. 소주도 아니고 맥주를 소주잔에 먹고 취하면서 왜 자꾸 술을 먹니? 물론 가성비야 기가 막힌다만은…. 아차! 여기까지만 하자.”

최 대리는 저도 모르게 자동으로 발휘되는 갈구기 스킬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부서에서 앞으로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다들 걱정이야.”

“부장님도 아실까요?”

“그럼 부장님한테 숨겨?”

“아….”

“넌 왜 이런 중요한 말을 안 해서….”

최 대리는 다시 시작되려는 타박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사람이 신뢰가 가. 입이 무거워.”

“죄송합니다. 괜히 회사 일에 지장이 있을까 봐 조심했습니다.”

.

.

.

동생은 결혼 후에 신신당부했다.

“오빠. 앞으로 돈 필요하면 나한테 얘기해. 수안 씨나 강운 그룹엔 절대로 안 돼. 그랬다간 오빠만 죽는 거야. 알았지?”

“보통 너 죽고 나 죽고라고 하지 않니?”

“내가 잘난 남편 두고 누구 좋아하라고 죽어? 난 오래오래 잘난 남편하고 같이 살 거야.”

“너 잘났다. 알았어! 나도 매제 덕 볼 생각 없었으니 잘됐네.”

강운 그룹을 통해 뭔가를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였다. 영수 본인도 동생 덕 볼 생각은 없었기에 괜한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켰었다.

.

.

.

“…….”

본인 같으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것 같았다.

“저 이제 어쩌죠?”

“부장님에게 가서 자초지종 설명하고 평범하게 지내고 싶다고 해. 영수 씨가 바라는 일이 그거 아냐?”

“예. 최 대리님 말이 맞습니다.”

“…너도 사서 고생이다. 매제가 부회장님이면…. 어휴. 나 같으면 진즉에 말하고 편하게 지내는데 말이야.”

“…부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장님 성격 알지? 아마 지금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으실 거야.”

평소엔 상당히 신사적이고 멋진 상사지만, 윗사람에겐 달랐다.

부장은 파리가 되도록 손을 비벼 대는 부류에 속했다. 자신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변할까 걱정이다.

* * *

영수는 옥상에서 사무실로 내려와 부장님 자리로 갔다.

“부장님. 잠시 시간 되실까요?”

“어! 물론이지. 회의실로. 아니다. 밖에 커피숍 새로 생겼던데 거기로 갈까?”

“잠깐이면 됩니다. 회의실도 좋습니다.”

“그게 좋겠군.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부장의 태도를 보니 대화가 제대로 진행될지 벌써 막막하다.

영수는 부장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자신이 할 말을 먼저 했다.

“강운가와 사돈지간인 것은 사실이지만, 회사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래서 강 부회장님이나 강 회장님이 제가 여기서 일하고 있음에도 모른 척하고 계시고요. 만약 제가 회장님과의 사적인 관계를 이유로 불합리한 행동을 한다면 아무리 인척 관계라고 해도 바로 잘릴 겁니다. 회사 들어오기 전에도 강 부회장님을 만나 확답을 들었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이유로 인해 우리 강운 무역에 필요 이상의 혜택은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눈 딱 감고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영수는 조용한 분위기를 느끼고 슬며시 눈을 떴는데, 부장님은 희미하게 웃고 계셨다.

“자. 정리하자. 영수 씨는 특별대우를 원하지도 않고 그분들도 여길 주시하지 않는다. 맞나?”

“예. 짧게 요약하면 맞습니다.”

“휴우. 괜히 걱정했잖아. 난 또 뭐라고….”

이후 부장의 말을 들어 보니 괜한 걱정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부장은 자신의 인사권을 쥔 바로 윗사람에만 태도를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영수로 인해서 무역팀 인사에 큰 변화가 생길지 몰라 걱정이 컸다고 한다.

“위에 선임들이 잔뜩 있는데, 주임도 못 단 영수 씨가 이사로 발령 나는 줄 알았다고.”

“아…. 그럴 리가요.”

매제가 해 준다고 해도 여동생이 허락할 리 없다.

여동생이 부탁한다 해도 매제가 허락할 리 없다.

매제와 여동생이 허락해도 회장님 선에서 자를 것이다.

이래저래 불가능한 일이었다.

“회장님이나 부회장님이 그렇게 생각 없는 분들이 아닌데 말이야. 내가 괜한 생각을 했어.”

“그럼요. 능력 없으면 자식이라도 가차 없는 분이죠. 저는 제 분수를 잘 알고요.”

매제 반만큼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부탁이라도 해 볼 수 있었겠지만, 영수는 스스로가 가진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강운 무역 영업 2팀에서 일을 배우는 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쏟아부어야 했다.

“오케이. 오케이. 이제야 속이 후련하네. 크하하하.”

부장은 영수에게 궁금했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강운 그룹 계열사에서 회장님과 부회장님은 스타나 다름없었다.

“혹시… 영수 씨는 회장님이나 부회장님 자주 뵙나?”

“회장님은 뵙기 힘들고 부회장님은 요즘 매일 뵙습니다.”

“매일?”

“요즘 집에서 출퇴근하시거든요.”

“우아. 부회장님이 영수 씨랑 같이 사신단 말이야?”

“동생이 둘째를 낳아서 집에서 산후조리 중입니다. 그래서 부회장님이 잠시 처가로 오신 거죠.”

밤마다 둘째 조카가 울어 대는 통에 잠을 몇 번이나 깬다. 그래도 감히 불만을 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 얼마 전 부회장님이 득녀하셨지?”

“예.”

이후로도 부장은 강운 그룹 로열패밀리의 생활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바로 위 상사라고 할 수 있는 이사들이나 회사의 사장은 겁나는 존재들이지만, 가장 꼭대기에 있는 총수 일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았기 때문이다.

“부회장님도 자식들 예뻐하고 아내가 화나면 긴장도 하고 그래요.”

“하하하. 그래? 난 집에서도 회사에서처럼 명령도 하고 그러실 줄 알았더니?”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합니다.”

“크흐흐. 영수 씨는 다음 회식에 술은 먹지 말고 집안 얘기나 해.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소식을 들어 보겠어?”

“부회장님께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억! 그러고 보니 내가 물을 일이 아니잖아?”

영수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부장이다.

“아니다. 어디 가서 영수 씨 집안 얘기는 안 하는 걸로 하자고. 회장님 일가의 일이 함부로 외부에 돌면 큰일이야. 앞으로 영수 씨는 부서에서도 입조심 하자. 알았지?”

“…예. 조심하겠습니다.”

영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회의실에서 나와 강운 무역 영업 2팀으로 돌아갔다.

영수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후다닥 일하는 척하는 김 과장과 곁눈질로 보는 박 차장이 보인다.

‘아…. 끝이 아니구나.’

자리에 돌아와 앉아 있는 최 대리가 보여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 대리님. 박 차장님, 최 과장님이랑 같이 끽연하러 안 가십니까?”

질문에 숨겨진 의미는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다.

“자리 마련해 달라고?”

“네. 부장님과 대화는 아주 유익했습니다.”

“…내가 말씀드리고 같이 올라갈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자신이 받은 용돈 값을 하려면 멀었다.

최 대리는 영수가 자리를 비운 다음, 자리에 돌아온 부장이 이마를 치면서 하는 말을 들었다.

“아차! 아까 이사님께도 말씀드렸는데! 어쩌지?”

영수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자꾸 늘어가고 있었다.

‘이사님이 설마 혼자 알고 계시진 않을 테고… 영수야. 부장님 윗급은 나도 힘들다. 쏘리.’

사장님까지 소식이 전달되는 것도 순식간일 터였다.

* * *

배영성은 산후조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아내에게 선물을 준비했다. 큼지막한 꽃다발 바구니와 꽃 속에 숨긴 통장이 바로 선물이다.

아내는 꽃바구니를 받아 좋으면서도 아까운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큰 것도 사 왔네. 이거 대신에 차라리 하린이 분유를 사지.”

“그 선물 대신에 분유를 사면 100년 치는 살 수 있을걸?”

배영성은 꽃 속에 숨겨진 통장을 꺼내 아내에게 보여 줬다.

“정산금 입금됐어. 확인해 봐.”

“정산금?”

아내는 통장에 찍힌 숫자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120억!!!”

2억의 투자가 120억으로 불어나 있었다. BE에 투자한 보험 상품이 발효되어 정산된 투자 금액이 입금된 것이다. 일부 수수료를 제외하긴 했지만, 기존에 예상했던 금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 기회가 좋았어. 원천 징수로만 세금 떼고 나니까 딱 그거 남아.”

기타의 이자 소득으로 구분되어 22%의 세금과 주민세 2.2%를 원천 징수했고 이후 다시 세금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되는 때였다. 이번 금융 위기로 금융 소득 종합 과세를 유보했기에 기회가 좋았다고 표현한 것이다.

“2억이 120억이 됐다고? 미쳤어! 미쳤어!!”

“확률이 100%라고 했잖아.”

“어쩜 좋아!!”

배영성은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우리 주원이랑 하린이 키우는 데 걱정 없겠지?”

“애들 걱정이 뭐야? 우리 노후까지 다 해결이지!”

“그런 의미에서 내 용돈은 인상 안 해 주나?”

“얼마 줄까? 말만 해!”

아내는 엄청난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져 있었다.

“하하하. 그럼-”

말하라고 해 놓고 얼른 먼저 용돈을 못 박아 버리는 아내다.

“내가 통 크게 10만 원 올려준다!”

“…10만 원?”

누구 코에 붙이라고 10만 원이란 말인가.

“너무 많아? 줄여?”

“…아, 아니야. 그게 어디냐.”

배영성의 집무실 통장에도 같은 금액이 입금되어 있다. 아내가 투자한 금액과 같은 금액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따로 하길 천만다행이지.’

* * *

오랜만에 셋이 모였다.

수진과 수현 그리고 수용이다.

“다들 통장 확인했겠지만, 오빠가 또 이러네.”

툭.

수진은 오라비에게 받은 통장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내년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만, 오빠에게 돈까지 받을 만큼 궁하진 않았다. 강운 패션에서 잘나가는 신 사업팀 실장이다.

“이 돈을 어떻게 받아? 상준 씨도 돌려주라고 했어.”

“나도 이건 못 받겠다. 내가 회사에서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고….”

수현도 통장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수현은 호텔에서 기획한 여성 골퍼 지원에서 대박이 터지면서 요즘 회사에서 크게 인정받고 있었다. IMF로 시름에 잠긴 국민에게 희망의 불씨를 안겨 준 바로 그 여성 골퍼를 수현이 직접 지원했다.

하지만 수용은 팔짱만 끼고 말이 없었다.

“뭐야. 넌 그냥 꿀꺽하려고?”

“꿀꺽이라니 말 좀 가려서 하자. 작은누나.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좋잖아?”

“그게 그거지!”

수현이 더 열 내기 전에 수용이 입을 열었다.

“이미 형하고 다 얘기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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