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숨긴 사원
“최 사장님. 저 왔습니다.”
“오셨습니까. 부회장님. 아직 사장이라고 부르시면 안 되죠. 발령도 안 났습니다.”
다음 사내 사장단 인사에서 그룹 사장으로 올라서기로 되어 있는 최학주 전무였다.
“확정인데 뭘 그러세요? 그럼 우리끼리만 미리 부르기로 약속?”
수안이 새끼손가락을 들고 눈웃음쳤다.
“하하하. 서서 그러지 말고 앉으십시오.”
수안은 방금 아버지와 나누고 온 내용을 전달하고 업무를 지시했다.
“…해서 기화 자동차 경영에 관련한 이면 계약을 공표할 시기를 가늠해 주세요. 회장님이 돋보일 수 있도록 발표문 준비해 주시고요.”
“인기가 쑥쑥 올라가겠네요. 사전 선거 운동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이릅니다. 아무도 선거 운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겠습니다.”
“조만간 김현성 사장과 배영성 사장을 보내겠습니다. 의인상과 해외 역사서 편찬 지원도 최 사장님이 인수해야 하거든요.”
최학주는 수안이 설명을 이어 갈수록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오.”
의인상은 국가에서 다루지 못하는 새로운 분야였고, 기업의 사회적 기여까지 생각한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해외 만방에 대한민국의 역사를 각인시키는 작업은 향후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사업이었다.
‘대통령은 부회장님이 하셔야 하지 않을지….’
저도 모르게 수안을 대통령감으로 생각하게 된다.
수안은 최학주의 깊은 눈빛에 얼굴을 찌푸렸다.
“…방금 최 사장님 눈빛이 뭔가 꺼림칙했는데 말입니다.”
“아. 별거 아닙니다. 부회장님도 대통령감인가 싶어서 말입니다.”
“푸흣.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계세요? 저는 절대로 안 합니다. 강운 그룹 말아먹을 일 있습니까? 여긴 누가 맡을 건데요?”
“아. 대안이 없네요.”
강운모 회장님에겐 장성한 아들 수안이 있었지만, 부회장님은 이제 4살 된 아들 정원과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딸 나현이 끝이다.
“흰소리하지 마시고 인계나 제대로 받으세요. 이거 끝나면 계열사 이동 작업도 해야 합니다.”
“더블 스타 계열사를 강운 그룹으로 넣으시려고요?”
“우선 휴대 전화를 생산하는 팬탁을 이쪽으로 빼려고 합니다.”
“아. 그게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강운 전자 휴대 전화가 팬탁에 밀리고 있어 회장님이 한 소리 했습니다.”
“SJ 컴퓨터도 이전할 겁니다. 이름도 강운 전자 컴퓨터로 바꾸면 인기가 더해질 겁니다. 강운이라는 이름은 국내에서 신뢰의 상징이니까요.”
중견 기업이라고 말하기에도 너무 커진 두 계열사다. 더블 스타에서 거느리는 것보다 강운에서 거느리는 편이 여러모로 좋았다. 우선 휴대 전화는 강운 그룹으로 넘어가며 기존 강운 생산 설비를 활용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생산량 폭증으로 이어진다. SJ 컴퓨터 대리점은 컴퓨터가 아니라 전자제품 매장으로 변신시키고 강운 전자의 모든 가전제품을 다룰 수 있게 할 계획이다.
강운 휴대 전화 사업부는 공장을 놀리지 않아 좋고, 팬탁은 부족한 생산을 늘려 점유율을 늘릴 수 있다. 가전, 전자제품 분야는 SJ 컴퓨터의 전국 대리점을 통해 판매량 증대를 노릴 수 있었고, SJ 컴퓨터는 컴퓨터에서 벗어나 더 많은 제품을 판매해 종합 가전 쇼핑몰로 날아 오르게 된다.
“지분 교환을 해 둔 것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지분율을 조금만 늘려도 계열사로 편입하는 것은 문제가 없겠습니다.”
“이러려고 지분을 맞교환하지 않았겠습니까. 부족한 더블 스타 사장단을 잘 부탁합니다. 최 사장님.”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주십시오. 제가 부회장님을 회장님 다음으로 믿는다고 얘기했던가요?”
“내가 대차게 속여먹었는데도 말입니까?”
BE 인베스트먼트에 관한 일을 말함이다. 속이는 일 없다며 눈앞에서 전화기를 집어 던지기도 했었다. 그래놓고 나중에 떡하니 BE 인베스트먼트를 공개했다. 그동안은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고 이제야 당시의 미안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다 생각이 있어서 숨기지 않으셨습니까. 결국은 강운 그룹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앞으론 부회장님이 뭘 속인다고 해도 다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할 겁니다.”
“이럴 땐 속 시원하게 한마디 하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방금 그 기회가 날아갔습니다.”
“욕해도 되는 거였습니까?”
“하하하.”
* * *
늦은 저녁 영수는 회사 직원들과 회식하고 불콰하게 취해서 비틀거렸다. 영수 주변엔 같은 부서 직원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수를 지켜보고 있다.
“영수 씨. 괜찮아?”
“우헤. 사뢍하는 우리 부우장눼에엠.”
“얘 제대로 취했는데? 누구 영수 씨 집 아는 사람 있어?”
이제 2차가 끝난 참이라 몇몇은 돌아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압니다! 부장님.”
“역시! 사수가 파악하고 있어야지. 그럼 최 대리가 영수 씨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줘. 이건 택시비 해라.”
부장이 건네주는 배춧잎을 거절 한번 없이 품에 넣는 최 대리였다.
“감사합니다. 싸랑하는 부장님!!”
최 대리는 취한 영수를 끌고 택시로 올랐고, 영수의 집 앞까지는 택시로 금방이었다.
“아싸. 돈 굳었다.”
자신의 집도 이 근처였다. 그래서 영수의 집이 어딘지 기억할 수 있었다.
“흠냐.”
문제는 축 늘어진 자신의 후임이다.
“얘는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매번 이러고 먹어. 영수 씨. 정신 차려 봐. 영수 씨 집에 다 왔어.”
“췌 대리. 췌췌췌 대리~~ 3차 가자. 췌 대리.”
최 대리는 부장님에게 받은 돈값을 해야 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인내심을 발휘했다.
“…영수야. 취하면 그럴 수 있어. 조용히 집에 가자. 조용히.”
영수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고 택시에서 내렸더니 주변이 어둑하다.
밤이니 당연히 어두워야 맞지만, 뭔가 인위적인 어둠이었다.
“뭐, 뭐야?”
고개를 든 최 대리 주변으로 어깨가 떡 벌어진 사람들이 다가와 있었다.
“겨, 경찰에 신고할 거야! 저리 안 가?”
“우리가 저분을 잘 압니다. 저희에게 넘기시고 가면 됩니다.”
최 대리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범죄자가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안 돼! 내가 데려다줄 거라고. 바로 여기 앞이 얘네 집이야! 진짜로 신고한다! 저리 안 가? 난 안 취했어!”
“췌췌췌 대리. 잘한다~ 얼쑤.”
“하. 큰일이네. 곧 오신다고 했는데….”
그들 귀에 꽂힌 인이어를 통해 무전이 들어왔다.
-부회장님 차량 진입 중!
“벌써 오셨다. 차 들어온다!”
“여긴 어쩌지?”
“우선 막아놔.”
“오케이.”
인의 장벽으로 둘러 최 대리와 영수를 감춘 보안 요원들은 자신들 앞을 지나는 차가 두 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야? 왜 두 대야?”
-뒤에 회장님 차 넘버다! 비상!
“아!”
-주변 요원들은 근처로 집결해. 오늘 경호에 만전을 기한다!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
인의 장벽을 만들었던 사람 중 하나만 남기고 모두 뛰어서 사라졌다.
그리고 뻘쭘하게 남은 직원이 최 대리에게 말했다.
“의심되시면 직접 모시고 오세요. 대신 문 앞에서는 제가 업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시든지.”
아직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다.
최 대리는 조금 걸음을 옮겨 코너를 돌자마자 골목 가득한 인의 장막을 볼 수 있었다.
“뭐, 뭐야.”
어디 조직폭력배끼리 싸움이 붙었나 싶은 광경이다.
“췌췌췌 대리. 3차 가자. 3차. 달려!”
“조용히 해. 이러다 우리 둘 다 죽어 인마.”
최 대리의 바람과 달리 영수는 실눈을 뜨고 앞을 보다가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여어!! 우리 매제! 매제가 어쩐 일이야!!”
수안은 누군가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영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형님!”
“우헤헤. 우리 잘난 매제. 착하고 돈 많은 매제. 너무 잘생겨서 슬픈 매제. 허으응. 엄마. 난 왜 이렇게 낳았어. 엄마. 어엉.”
“어휴. 오늘 몇 잔이나 드셨어요?”
“모올라. 모올라…. 세 잔인가….”
“형님 치사량이네….”
수안과 영수가 대화하는 사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수안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
“직장 동료분이신 것 같은데,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혹시…. 강수안 부회장님 닮았다는 소리 안 들어요?”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네요.”
본인이 맞으니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다.
“아. 이상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아들. 무슨 일이야? 정원이는 언제 데려오려고?”
강운모 회장까지 출동했다. 수안이 집으로 들어가지 않아 상황을 확인하러 왔다.
“형님이 취해서요.”
“우앙. 우리 회장님이당~ 오예~ 앗싸라비요. 우리 회장니임~”
영수는 춤을 추며 회장님을 부르고 있었다.
참 못 봐줄 꼴이다.
“…사돈총각이 약주가 과했네.”
“쬐에금 먹었습니당. 죄송합니다아아….”
“수안아 어서 모시고 들어가.”
“예.”
수안이 주변에 손짓하자 직원들이 양쪽에서 영수를 잡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은 똑같았다. 모두 “예. 부회장님.”이라고 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온 나이 든 남자는 눈앞의 남자를 수안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술에 취한 자신의 후임은 강운모 회장을 닮은 나이 든 남자를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
최 대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 회, 회장님… 강 회장님과 강 부회장님!!!!’
눈앞에서 두 분을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어어억!!!!”
영수도 예상치 못한 커밍아웃이다.
“형님 데려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는 길에 차비라도 하세요.”
수안은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최 대리에게 쥐여 줬다.
“아, 아닙니다! 부회장님.”
“이제야 알아봐 주시네요. 하하. 고마워서 그래요. 그냥 받아 주세요.”
“예,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회사에서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무, 물론입니다!”
최 대리는 어떻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걸어 나오고, 자신의 손에 들린 100만 원짜리 수표를 확인하고 나서야 현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하…. 매제? 강 부회장님이 매제?”
매제 다음은 회장님이었다. 회장님이 분명 사돈총각이라고 불렀다.
“회장님이 사돈댁이라고?”
강운 그룹에 사돈댁이라고 한다면 강수안 부회장님의 처인 배우 임아현의 집안 외에는 없었다.
“사모님이 임영수 여동생? 하!”
자신의 후임은 힘을 숨긴 신입사원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거대한 힘을 감춘 녀석이다.
“자, 잠깐. 내가 지금까지 얘한테 뭘 잘못했지?”
처절한 자기반성의 시간이 돌아왔다.
“아악!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더 잘할 수 있었잖아!”
* * *
다음 날 영수는 기억나지 않는 어제의 일을 부모님의 입으로 전해 들어야 했다.
“어제 회장님까지 오셨는데 그렇게 술을 먹고 들어오니?”
“…하아. 나라고 회장님이 오실 줄 알았나. 나 실수 많이 했어?”
“밖에서 했는지는 모르겠고. 안에서는 그냥 잤어.”
“휴우. 다행이네.”
모르는 게 약이다.
영수의 어머니는 차마 어제 있었던 일들을 말할 수 없었다.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너 회사에서 술 먹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회사 생활하면서 어떻게 술을 안 먹나?”
“강 서방은 생전 술 먹고 들어오는 걸 못 봤는데?”
“부회장님하고 신입 사원이 같아?”
“그야 다르겠지만….”
“난 부서에서 먹자면 그냥 먹어야 한다니까 그러네. 신입이 무슨 힘이 있어?”
“내가 회사에 전화라도 할까 봐. 우리 아들 술 좀 그만 먹이라고.”
“엄마! 엄마가 그랬다간 나 얼굴 팔려서 회사 못 다녀.”
“으이그. 알았어. 얼른 밥이나 먹고 나가! 늦겠다.”
“억!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된 거야?”
“네가 늦게 일어났으니 그렇지! 넌 대체 언제 정신 차릴래?”
영수는 벽에 걸린 시계 보고 급하게 출근을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지각은 예정되어 있었다.
‘술 먹은 다음 날 늦으면 사수한테 더 혼나는데.’
영수는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들어서서 자신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사수의 의자가 비어 있음에 안심했다.
‘다행이다.’
그런데 사수 의자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과장님과 차장님도 없고 부장님도 없다.
“다들 어디 가신 거야? 오늘 무슨 회의라도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