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처가살이 (160/304)

처가살이

생산을 더 늘려야 했다.

“생산 대수 더 늘릴 수 있습니까?”

“협력사 부품 생산 증대를 요청, 여기에 외주 제조 인원을 더 투입하고 24시간 가동하면 1만 3천 대까지 가능하다는 계산이지만, 말 그대로 이론상 수치입니다. 수출은 여전히 불가능합니다.”

수안은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고 판단했다. 다른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주문이 너무 많아 문제라니….’

해결 방안을 떠올리던 수안의 뇌리에 번뜩 대현의 상황이 떠올랐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K-3와 K-7은 언제든 출시 가능하다고 했었죠?”

“가능은 하지만….”

“소비자의 눈을 다른 K시리즈로 돌립시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겠어요.”

K-3와 K-7으로 눈을 돌리면 전국의 기화 자동차 공장이 동시에 돌아가며 생산 대수를 늘릴 수 있었다. 하나의 모델에 주문이 집중하는 것을 막고 차량 생산과 출고를 원활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한 모델을 최대한 팔기 위해서는 K-5를 오래 생산해야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것도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빠르게 준비해도 한 달 이상은 소요됩니다. 협력사 협조와 외주 인원의 교육까지 생각하면, 실제 첫 모델 생산까지 최소 두 달의 여유를 주셔야 합니다.”

출시 준비를 끝냈지만, 실제 생산을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한 상태. 이대로는 주문이 밀려 쌓이고 1년 이상 차를 인도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었다.

“…….”

수안이 다른 방안을 생각하는 사이 눈앞의 임원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아! 그럼 광고부터 집행하겠습니다. 소비자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면 대현 자동차를 주문하지 않고 기다린 것처럼 우리 소비자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광고부터 빨리 집행하면 주문을 막을 수 있겠어.”

대현 자동차 모델이 기화 차 K시리즈 출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문이 뜸했던 것처럼 K-5 모델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다. 밀려드는 주문을 막는 것이 우선이다.

* * *

수안이 밀려드는 주문에 허덕이는 동안 대현 자동차가 준비한 차량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야 했다. 정영수 회장 앞에 서서 보고하는 임원의 어깨부터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지난달 그랜저XG의 월 판매량은….”

“집어치워.”

말로 듣지 않아도 보고서로 보고 있었다.

강운 그룹에서 강운모 회장이 기자들을 모아 놓고 기자 회견을 한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강 회장은 강수안 부회장이 기화 자동차 경영을 맡는다며 발표했고, 신차에 관한 내용까지 연이어 발표했다. 그때부터 대현의 신차를 기다리던 고객들이 기화 자동차의 신차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대현은 우려 속에 신차를 발표하고 판매를 시작했었다. 정영수 회장은 초조하게 출시 성적표를 기다렸고 크게 실망스러운 결과를 확인했다. 월 판매량에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 있었다.

이제야 우려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후 몇 달간 판매도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서 기화 자동차 K-5의 출시는 대현의 그랜저 XG 판매량을 곤두박질치게 했다.

보고서에는 지난달 900대를 겨우 넘긴 판매량이 이번 달 100대 이하로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8년 IMF 상황을 감안해도 너무 심각한 판매량이다. 최소 올해 7천 대까지는 판매할 수 있다고 예상했는데, 이대로 진행되면 3천 대도 어렵다.

“또한 지난 계약을 취소하겠다는 고객들이 많아서….”

소식이 느린 일부 고객층에서 K-5의 출시 광고를 보고 계약을 물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지난달 900대 실적도 실제로는 이하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K-5와 그랜저는 등급이 다른데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거야?!!”

‘알면서 물으시는지 정말 모르시는지….’

“기화 자동차 K-5는 미래지향적 디자인과 혁신적인 편의 사양이 대거 기본 옵션으로 들어가며 동급 차량을 비롯해 위, 아래 모델의 수요까지 모두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모델입니다. 우리 대현의 그랜저 XG가 고급화와 국산화를 도입한 대단한 모델이기는 하지만, 디자인과 편의사양, 매체 광고에서 크게 밀려….”

“아 쫌! 닥치고!!”

‘알면서 물어봤구만…. 젠장.’

“여기서 뭉개고 있을 거야? 안 나가? 나가서 대안을 찾아야 할 것 아냐?!!”

“예, 예. 회장님.”

나갔던 임원은 사색이 되어서 금방 회장실에 돌아왔다.

“갑자기 방법이 떠올랐나? 헛소리만 해 봐라. 당장 너부터 모가지야.”

“…과, 광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무슨 광고?”

“기화에서 연달아 K-3와 K-7을 발표한다고 합니다. 그랜저 XG는 끝장입니다.”

K-3 광고에는 요즘 젊은 층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는 HOT가 맡았고, K-7 광고는 무려 강운 그룹 회장인 강운모 회장이 등장했다. 후일 K-9 광고에는 강운모 회장과 강수안 부회장이 동시에 등장할 예정이다. 이미 광고는 찍어 놓은 상태. 언제든 내보낼 수 있었다.

“…또 나온다고? 이렇게 빨리?”

“진짜 출시는 두 달 뒤라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저희 그랜저XG의 판매고는….”

임원이 뒷말을 잇지 않아도 뻔히 그려진다.

‘젠장, 젠장! 천천히 오라니까!’

아래 등급 모델에서 상위 등급 모델을 빨아들이는 현재라면 일부의 판매는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급 모델로 경쟁하기 시작하면 아예 답이 없었다.

“…소문. 소문을 흘려.”

“예?”

“기화 차는 이제 외제 차잖아! 해외 자본인 BE가 가진 회사란 말이야! 아무리 강운 그룹이 경영권을 가졌다 해도 엄연히 해외 자본이 소유하고 판매하는 외제 차! 애국심을 꺼내서라도 우리 대현 차를 사게 만들어!”

“아! 예. 회장님.”

“그리고 우리 대현의 그랜저 XG는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들어졌음을 강조하고!”

정영수 회장은 또 이용할 수 있는 일들이 뭐가 있을지 떠올렸다.

“…결함. K시리즈는 너무 급하게 만들어져서 엄청난 결함이 있다고 소문을 내. 겉모습만 그럴싸하고 실제로 타보니 문제가 많더라 하는 카더라 통신 말이야.”

“오오. 저희 전문입니다. 출처를 파악할 수 없도록 작업하겠습니다.”

“나가! 빨리 움직여!”

“옙! 회장님!”

* * *

대현의 정영수 회장이 지시한 내용은 신문을 통해 대중에 퍼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애국심이다.

[국내 자동차 산업에 관한 소고(小考)]

[한국은 작은 나라임에도 선진국에서나 영위하는 완성차 제조 기업을 갖고 있다. 이는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현 자동차, 대운 자동차, 기화 자동차, 쌍륭 자동차까지 대형 자동차 메이커만 무려 넷. 새로 시장에 뛰어든 강운 자동차와 삼디 자동차까지 더하면 무려 여섯의 메이커가 존재했었다. 왜 과거형이 되어야 하는지는 독자들도 충분히 공감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렇다. 한국은 IMF 금융 위기라는 거대한 파도를 맞이하여 기화 자동차 워크아웃과 해외 매각이라는 위기를 맞이하였고, 대운은 워크아웃이 진행 중이며 쌍륭 자동차는 인수자를 찾기 위해 애쓰는 형편이다. 여기에 삼디 자동차는 이번 기화 자동차 인수에 실패하며 자동차 사업부 일괄 매각을 결정했다고 하니 국내 자동차 산업은 갈피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자동차를 생산하는 남은 국산 자동차 메이커는 대현 자동차를 필두로 강운 자동차 단 둘뿐이다. 여기서 많은 독자가 의문을 가질 것이지만, 왜 기화 자동차를 제외했는지는 위에서 이미 설명했음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기화 자동차가 해외에 이미 매각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화 자동차는 엄연히 해외에 적을 둔 기업이 소유한 외산 차량이다. 당장 국부가 유출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기화 자동차를 사는데 들어가는 돈은 결국 해외 기업으로 귀속된다.

…중략….

IMF 금융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단결된 힘이 필요하다. 이미 우리는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여 단결력을 보여 줬다. 이 부분이 해외 신용평가 기관에도 알려져 국제 신인도를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로를 하고 있다. 단합된 국민의 힘이 자동차 산업에도 절실한 시점이다. 국산품 애용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금융 위기를 이겨내는 힘. 바로 대한민국 국민의 애국심이 원동력이 될 것이다.]

기화 자동차가 외산 차량임을 강조하고 애국심까지 들먹이며 대현 자동차를 빨아 주는 칼럼이다.

“…….”

수안은 기사를 보며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냥 패스해? 아니면 반박을 해?”

모른 척 지나가자니 초기부터 외국산 차량이라는 딱지가 붙어 향후 영업 활동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고 급하게 반박하자니 K시리즈 광고까지 해서 K-5 주문을 줄인 노고가 물거품이 될 판이다.

“정 회장이 수를 쓰긴 썼네.”

생각을 이어 가도 대응을 안 할 순 없는 일이었다.

“잠깐 묵혀서 시선을 모으고 단번에 뒤집어야겠어.”

지금은 집안이 우선이다. 수안은 보던 신문을 다시 접어서 탁자에 놓고 거실을 정리했다.

수안은 청소하는 중이었다!!!

강운 그룹 부회장 및 강운 홀딩스 사장, 더블 스타 회장, 기화 자동차 사장 등 가진 타이틀만 넷인데 지금은 청소가 본인의 일이다.

수안이 신문을 보고 있던 곳은 회사가 아니라 처가댁이었다.

“강 서방. 밥 먹어야지?”

“아휴.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장모님 댁으로 와서 산후 조리를 하고 있었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까지 처가댁에 있어 수안도 생활권을 처가댁으로 정한 것이다. 수안은 처가댁에서 머물며 잠깐씩 집안일을 돕고 있다. 처가에서 왕처럼 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장모님이 말려도 수안은 조금씩 집안일을 하며 장모님과 장인어른께 사랑받고 있다.

식탁으로 가자 장모님이 아내의 밥상을 따로 챙겨 둔 것이 보였다. 국이고 반찬이고 아내의 입맛과 산모의 입맛에 맞춘 저자극 식단이다.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어머님은 식사하십시오.”

“내가 해도 되는데….”

수안은 다른 소리가 나오기 전에 얼른 작은 반상을 들고 뜨끈하게 데워진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작은 아기와 아내가 함께 누워 있었다.

“나현아. 아빠 왔다~”

딸의 이름은 나를 사랑하라는 뜻에서 나를 첫 글자로 하고 아현의 현을 붙였다.

아현은 자신의 이름을 왜 딸에게 붙이냐고 수안에게 물었고 수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을 이렇게 많이 닮았잖아. 나현이는 작은 아현이야.”

수안은 아현을 쏙 빼닮은 딸을 지그시 보며 아내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수안의 인기척에 아현이 선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일어났어? 얼른 먹자.”

“당신은요.”

“나도 나가서 먹어야지.”

“내 얼굴 좀 보고 얘기하죠?”

수안은 아현의 말에 답하면서도 잠든 아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딸을 가진 아빠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어쩜 저렇게 당신을 닮았는지 몰라. 예뻐 죽겠다니까 정말.”

수안은 딸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상을 들고 들어왔다. 첫째인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너무 예뻤는데 둘째인 딸은 더 예뻤다.

“푸흣. 큰일이야. 당신이 나현이를 너무 예뻐해서 버릇없어질 것 같아요.”

“당신이 바로잡아 줄 거잖아.”

아들 정원의 교육에 아현의 노고가 가득 들어 있었다.

“미리 경고하는데 나중에 나현이 훈육할 때 참견하지 않기로 해요.”

“…….”

수안은 벌써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가 수진이와 수현이를 왜 그렇게 키웠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니까.’

“…알았어. 노력해 볼게. 국 식겠다. 얼른 들어.”

아현은 슬슬 물리기 시작하는 사골곰탕을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수안도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밖으로 나왔고, 식사를 마친 후 정원이와 인사했다.

“아들. 엄마 잘 지켜.”

“응!”

“나현이도 잘 지키고.”

“내 동생! 예뻐. 귀여워.”

수안은 정원이가 동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갑자기 생긴 동생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성장 발달에 퇴행이 올 수도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는지 정원이는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했고 오빠가 되었다고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아빠는 정원이만 믿고 일하러 갈게.”

“나 믿어. 아빠.”

“사랑해. 아들.”

그래도 아직은 너무 어린 아들이다. 둘째도 예쁘고 첫째도 예쁘다. 아내와 나현은 이미 안아 주고 나와서 이번엔 아들을 품에 가득 안아 주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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